고 군수와 조 당선자는 이날 농수산물유통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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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군수와 조 당선자는 이날 농수산물유통공사
  • 박주하
  • 승인 20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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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 고현석 곡성군수-조형래 당선자


아름다운 동행


78표 차 앙금 털고 중앙부처 함께 방문 지역현안∙예산 챙겨




고현석(63) 곡성군수와 조형래(56) 차기 곡성군수 당선자. 3차례나 군수선거에서 맞상대를 한 라이벌이자, 5∙31 지방선거에서는 78표차로 승패가 갈리는 피말리는 승부를ㄹ 벌인 당사자들이다.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악연(?)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이 징역발전을 위해 손을 잡았다. 선거 때의 앙금도 말끔히 씻었다.


낙선한 현직 군수와 차기 군수 당선자인 두 사람은 선거가 끝나자 마자 함께 중앙부처를 돌며 낙후된 지역 현안과 예산을 챙겼다. 지역 생사장에도 나란히 참석, 선거로 피폐해진 지역 분위기를 화합으로 바로 잡아가고 있다.


민선 자치단체장 교체기를 맞아 일부 이역세서 전임 단체장 추진 사업에 제동이 걸리거나 살생부(殺生簿)가 나도는 것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이같은 사례는 주민들과 공무원들에게 화합과 지역안정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두사람은 지난 14일 산업자원부 주관 ‘2006지역혁신산업 기반구축사업’ 심사가 진행된 서울 교육문화회관과 ‘평생학습도시’심사가 주관하는 한국교육개발원을 방문하기 위해 광주공항에거 함께 비행기를 탔다. 단체장 교체기에 주관부처들이 계속사업에 대한 차기 단체장의 의지를 중시하는 터라 고 군수는 조 당선자에게 의중을 물었고 조 당선자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표명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두 사람은 산자부와 교육부 관계자들에게 이들 사업의 필요성과 강력한 추진의지를 전달했고 그 결과 산자부 심사에 응모한 곡성군의 ‘천적연구센터 등 생물적 방제산업’은 최우수 평가를 받아 향후 3년동안 350억원을 들여 친환경농업 활성화를 꾀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고 군수와 조 당선자는 이날 농수산물유통공사(aT)에서 열린 전남농산물전시회 개막식에도 나란히 참석, 곡성농산물 전시관에서 홍보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동행’은 27일 행정자치부와 기획예산처로 이어졌다. 고 군수와 조 당선자는 이날 곡성출신 행자부 공무원 및 기획예산처 간부들과 오찬∙만찬을 함께 하면서 그동안의 관심과 지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고 군수는 이 자리에서 “열악한 군세를 간안해 내가 떠나더라도 더 많은 지원과 배려를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이에 기획예산처 간부들은 “낙선자와 당선자가 함께 찾은 것은 드문 사례로 보기에 너무 좋다”며 “앞으로도 적극 돕겠다”고 호응했다.


고 군수와 조 당선자는 지난 8년동안 세 차례의 군수 선거에서 연거푸 치열한 경합을 벌여온 ‘경쟁상대’라는 악연으로 얽혀있다.


지난 1995년 초대 민선 군수 선거전에서 민주당 돌풍을 잠재우고 무소속으로 당선돼 관심을 모았던 조 당선자는 제2∙3회 지방선거에서는 고 군수에게 2천~3천여표 차로 잇따라 패했으나 이번 제4회 선거에서 78표차로 신승(辛勝)했다. 광주∙전남 단체장 선거 중 최소 표차였다.


고 군수는 “그동안 경쟁과정에서 서로 ‘전임자’이면서 ‘후임자’인 관계가 됐다”며 “단체장 교체기에 자칫하면 일방통행이 될 수 있는데 군발전을 위해 뜻을 함께 하게 돼 적이 마음이 놓인다”고 퇴임을 앞둔 소회를 피력했다.


군정 인수작업이 한창인 조 당선자도 “초대군수를 지낸 사람으로서 그동안 솔직히 서운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이번 ‘동행’을 통해 우의가 더욱 깊어졌다”며 “전임 군수이자 지역 선배인 고 군수에 대한 철저한 예우를 공무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이같은 행보에 군청 안팎에서도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다수의 공무원들은 “소속 정당도 다르고 경쟁 관계인 두 사람이 오로지 군정 발전을 위해 함께 하는 모습은 지역화합의 모델로 주민들에게도 안정감을 심어주고 있다”고 흐뭇해했다.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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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3. 광주 서중학교 졸업


1961. 3. 광주 제일고등학교 졸업


1966. 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법학사)


1976. 2.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경영학석사)


1976.12. 세계은행(IBRD), 경제개발원(EDI), 농촌개발사업과정 수료(Rural Development Projects Course) (Diploma)


1989. 2. 중앙대학교 대학원 지역사회개발학과 졸업(경제학석사), 지역사회개발학과 졸업(경제학박사)


2001. 2.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제7기) 수료


2008. 1.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장수과학최고지도자과정 (제1기)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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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 제5대 단장


농협중앙회 곡성군지부장, 전남연수원장, 조사부장


농협대학 교수, 한양대 겸임교수


3당 대통령후보 초청 농정토론회(세계일보, KBS) 패널 (1997)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


곡성군수 (민선2기, 3기)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공동회장(군수대표)


지방이양추진위원회 위원


강빛마을 추진위원장(현)


장수벨트 실버서비스산업도시개발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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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69. 4. 농협중앙회 입사


1976. 8. 세계은행 농업신용차관 협상대표단


1985. 1. 농협중앙회 송정지점장


1986. 1. 농협중앙회 곡성군지부장


1987. 1. 농협중앙회 자재부차장 겸 비료사업단장


1989. 5. 농협대학 교수


1992. 3. 농협 전남연수원장


1994. 4. 농협중앙회 조사부장


1995. 1. 농협중앙회 퇴직


1996. 3. 사단법인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2년)


1998. 7. 곡성군수 (민선2기)


2002. 7. 곡성군수 (민선3기) (2006. 6.까지)


2005.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공동회장(군수대표)


2006. 10. 지방이양추진위원회 위원(2008. 8.까지)


2007. 1. (사)서남해안포럼 운영위원장(2008. 8.까지)


2007. 4. (주)리버벨리 대표이사


2007. 6. 민주평화국민회의 공동대표


2008. 3. 태평지구전원마을(강빛마을) 조성사업추진위원장(현재)


2010. 12. 장수벨트 실버서비스산업개발회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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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1966. 2. 육군 소위 임관


1968. 6. 육군 중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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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처 김화중: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제42대 보건복지부장관


자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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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


농장투자사업 재무분석비법(1977. 농협중앙회 차관사무국)


자치시대의 농촌을 향하여 (1997, 돌과꽃)


농협합병의 길잡이 (1997,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출판부)/공저


농민협동운동-새로운 방향과 전략-(1997, 농민신문사)/공저


고향의 내일을 생각하며 (2005, 광주문화방송)/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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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논문


▶재무제표의 목적에 관한 연구 - 1975. 서울대학교 경영학 석사학위


▶농촌 공업개발을 위한 농업협동조합의 역할 - 1989. 중앙대학교 경제학석사 학위


▶한국 농협의 특성과 역할에 관한 연구-1994. 중앙대학교 경제학 박사 학위


▶지역 농협의 합병 촉진방안에 관한 조사연구 - 1996. 농협중앙회 조사연구 용역


▶합병 후 지역농협의 조직 및 사업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1997), 농협중앙회 조사연구 용역


▶저비용 고령사회대책과 장수과학의 활용 - 은퇴자마을의 구상을 중심을 -(2008), 서울대 장수과학최고지도자과정 최우수 논문상


▶기타 학회지, 잡지, 신문 게재 및 학술행사, 사회단체 행사 초정 강연 논문, 논설 다수


• 농정관련 : 효율적 지방농정체계의 모색(2004, 전남대학교 최고농업경영자과정)등 다수


• 지방자치 관련 : 한국농촌의 진로 모색 : 고뇌와 희망(2002, 전남대학교 간호과학연구소) 등 다수


• 지역개발 관련 : 지방화시대의 농촌관광개발정책과 문제점(2003, 아시아 그린투어리즘 네트워크 /경복대학) 등 다수


• 협동조합 관련 : 21세기 선진사회와 협동조합의 역할 (1997, 제75회 세계협동조합의 날 기념강연 / 한국협동조합협의회)등 다수


• 곡성 관련 : 관음사와 곡성심청 (2004, 제4회 대한민국 문학메카/한국지역문학인협회)등 다수


• 기타 : 가깝고도 먼 친구 조태일을 그리며 (2003, 시인 제1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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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회활동경력


광주일고 학생회 부회장(1960)


서울법대 농촌법학회 창립회원(1961)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 (각 단과대학 농촌활동단체 연합체) 제5대 단장(1963)


낙산야학교 자원봉사 국어교사(1970)


사단법인 한국농업근대화연구회 이사, 감사


사단법인 광록회 부회장


사단법인 광주교육연구소 이사


사단법인 낙성대경제연구소 감사


21세기 광주∙전남 농업발전을 위한 모임이사


한국농업경제학회 이사, 한국협동조합학회 이사


중앙대학교(협동조합론), 광주대학교(조직행위론), 전남대학교(농업경제학)출강


*농협대학 교수 : 인간관계론/조직행위론, 지역개발론


균형사회를 여는 모임 (공동대표 김중배∙송기숙) 창립회원 (1993.6)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1995)


[농정과 자치] 고현석의 자치강좌 고정 집필(1996 봄호- 1999 겨울호)


3당 대통령후보 초청 농정토론회(세계일보, KBS)패널리스트 (1997)


정부인수위원회 산하 21세기 농업개혁위원회 공동대쵸(1998)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초청 [유럽지방자치연수] (2003)


전남남북교유협의회 방북대표단 (2003)


농협중앙회 제1회 지역농업발전선도상 수상 (2003)


서울경제연구소 제1기 지역혁신최고위과정 지역혁신 최우수 리더상수상(2003)


한양대학교 지방자치대학원 겸임교수 (2004)


한국농업정책학회 운영이사 (2004)


한국농어민신문 농업마당 고정집필 (2004. 4. 29 -9. 27)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창립회원 (2007. 4)


국민농업포럼(이사장 황민영) 창립회원 (200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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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사회활동


∙ 균형사회를 여는 모임 공동대표(고현석, 남영신, 나병식)


∙ 사울대학교총동창회, 서울대학교법과대학동창회, 서울대학교경영대학원동창회, 중앙대학교총동창회 (상임)이사, 전남대학교총동창회 자문위원


∙ 사단법인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 재단법인 지역재단 이사


∙ 한국경제학회, 한국농업경제학회, 한국농업정책학회, 농정연구포럼, 한국지역개발학회, 한국지방자치학회, 한국농업법학회, 한국협동조합학회, 한국주택학회, 한국식물∙인간∙환경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원 국민농업포럼, 농산어촌어메니티연구회, 농산어촌홍보개발원 회원, 서남해안포럼 고문, 한국사회책임투자 포럼 준회원


∙ 광랑회, 한농회, 농법회, 머슴골 회원, 지에스엔제이 인스티튜트 회원회장(2008. 7.)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 지도위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문위원


∙(사)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고문


∙개경 장흥고씨 의열공(학봉) 자손 종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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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기사마을 개장 기념사




오늘 드디어 섬진강 기차마을을 개장하는 공식 행사를 갖게 된 것을 곡성군민과 그리고 곡성향우 여러분과 함께 자축하면서, 섬진강 기차마을 개장을 축하하여 곡성을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언론사 취재진 여러분, 반갑고 고맙습니다. 곡성 방문을 4만 군민과 함께 환영합니다.




섬진강기차마을 관광개발사업의 추진 경위와 현황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 드린 터이므로 그 간의 우여곡절을 새삼스럽게 되새기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의 개방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개장을 축하하고, 앞날의 성공을 기원하며 다짐하고자 합니다.




섬진강기차마을 관광개발사업은 국가계획에 의한 대규모 관광사업개발이 아닌, 기방자치정부가 구상하고 제안해서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추진한, 지방정부로서는 꽤 규모가 큰 사업의로서, 무업보다도 자치시대와 함께 농촌의 활력을 찾아보려는 몸부림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역을 발전시키려면 먼저 가기 고장이 가진 자원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인식해서 활용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같은 농촌이라도, 곡성군은 유명한 관광지에 둘려싸여 있다 보니, 마치 우리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군민들의 마음에 자리 잡아 왔습니다. 이는 무력감으로 이어지기 쉬운 정서입니다.


여기에 1,700년 동안 간직해온 곡성심청이라는 역사문화 자산의 발굴과 전라선 폐선로를 활용한 섬진강기차마을 관광개발사업의 제안에 대한 전라남도와 중앙정보의 인정과 지원은 우리도 가진 것이 있고 이을 활용해서 지역의 활력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지방정부에 능력이 있어야 지방자치가 된다고들 말하면서 이를 걱정하거나 심지어 이를 핑계로 자치를 부정하려고도 합니다. 사실 지방공무원들은 오랜 중앙집권체제에서 자기 지방의 일을 스스로 주도하기보다는 중앙에서 시키는 대로 착실히 시행만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섬진강기차마을 관광개발사업과 같은 무거운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하자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많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수차의 용역을 맡기고 수시로 자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일 그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부터가 매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비록 전문가에게 용역을 맡겨도 용역업체가 사업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제안을 수용해서 사업으로 시행할 지의 여부를 결국 우리의 책임 하에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군수가 사업가가 아니며 공무원이 경영인이 아니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을 수바RDp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간투자자가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는 상이에 사업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부정적 여론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엄혹한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자니 불철주야 연구하고 토론하고 시험해 보고, 이런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 공무원들의 능력이 알게 모르게 많이 커졌습니다. 철로자전거는 우리 실무진이 손수 제작해서 실용신안특허까지 받았고, 미니기차와 증기기관열차는 우리 실무진이 구상해서 제작을 의뢰한 것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드디어 섬진강기차마을을 개장하기까지 구상으로부터 7년, 문화관광부의 예산지원이 시작된 때로부터 5년이 걸렸습니다. 철도를 매입하여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나서서 미니기차와 철로자전거를 제작하여 시험운행을 해온 지 2년만입니다. 실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구상에 도움을 주신 분들, 사업비 확보에 도움을 주신 문화관광부와 기획예산처, 행정자치부와 전남도청의 여러분들, 이 과정에 동참하여 함께 노력해 주신 국회의원, 도의원, 군의원 여러분들 [치포치포 섬진강나들이 관광열차]의 운행에 협조해 주시고 섬진강기차마을 관광개발사업의 추진에 자문해 주신 철도청의 여러분들, 영화[아리랑]과 [태극기 휘날리며], TV드라마 [야인시대]와 최근 [토지] 촬영 차 다녀가신 제작진과 출연진들 구 곡성역과 창고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준 문화재청 등 관계자들, 그리고 관광열차가 오는 공휴일마다 휴일을 반납한 채 뒷바라지에 나섰던 군청공무원, 경찰공무원, 자원봉사안내원, 행사장 운영 주민 여러분들, 특히 가장 무거운 책임을 맡아 열심히 일해 온 관광개발사업단 여러분들의 모습과 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그 하나하나에 성의가 베었었고 고통이 있었고 보람이나 배움이 있었기에, 이를 되새기자면 몇날 며칠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개장은 사업의 완성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지금까지의 고통은 출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탄생한 아이를 무럭무럭 잘 키우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새로운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탄생을 축하하는 기쁜 마음과 미래의 성공에 대한 설레는 희망을 가슴 가득히 품으면서, 여러분들께도 축복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곡성군의 모든 일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섬진강 기차마을]도 우리 공무원들과 주민들의 정성을 바탕으로 많은 분들의 도움 속에 착실히 튼튼하게 커 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관광개발사업단 여러분,


곡성국 공무원 여러분,


그리고 곡성군민과 향우 여러분.


그런 믿음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성을 다 할 각오를 다지십시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처음해보는 일은 최고책임자의 안목과 결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시행착오의 책임은 군수에게 있습니다. 앞으로도 군수는 관광개발사업단이 그 책임 하에 이 사업을 주도해 가도록 보장하겠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군수가 질 것입니다. 결코 실질보다 홍보가 앞서는 일이 없도록 늘 경계하면서, 오늘 일반 소박하게 출발하여, 꾸준한 성장을 기약하고자 합니다. 늘 민간투자에 대하여 문을 활짝 열어놓겠습니다. 그러나 민간투자만을 기다히지는 않고, 공공투자에 의한 시설확충과 프로그램 개발을 지속 해 나갈 것입니다.




자리를 함께 하신 내외귀빈 여러분.


그리고 곡성군민과 향우 여러분.




오늘 섬진강기차마을을 개장하면서 추억의 증기기관차를 띄웁니다. 당초에는 석탄을 때는 본래의 증기기관차를 구상했으나. 그 운영관리의 번잡성과 환경문제 밑 산불위험 등 너무나 문제가 많아서, 그 모습만 재현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소리를 비롯해서 몇 가지는 아무래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꾸준히 찾을 것입니다. 일단 이러한 관광용 증기기관열차를 가지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무척 많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오늘의 개장은 말하자면 1단계 개장인 셈입니다.




오늘 개통하는 관광용 증기기관열차는 한정된 공간에서 운영을 시작하면서, 구 철도와 신철도 사이의 이미 매입한 4만 5천평의 부지도 개발에 착수할 것입니다. 기차와 철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명소로 가꾸고자 합니다. 아울러 섬진강과 열차가 운행되는 철로변에 산재해 있는 청소년야영장과 자전거도로, 농촌체험학교와 봉조 팜스테이마을, 두계 외갓집체험마을, 가정 녹색농촌체험마을, 상한 하늘나리 전통테마마을 및 압록유원지와 연계 프로그램을 시급히 개발하면서, 머지 않아 문을 열 쇠정 심청마을 및 빛고을청소년수련원과 추진 중이거나 구상 중인 송정 산림휴양지구와 호곡 동화마을 및 마천목 도깨비 마을 등으로 연계를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기차마을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재미가 많이지면서 곡성군 관광의 핵심요소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로써 곡성군이 지리산 및 섬진강 광역관광권과 전남 북부관광권의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고, 광양만권의 배후관광지로 각광받게 하는 데에 주역을 담당해 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또 한 가지 언론과 귀빈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만, 섬진강 기차마을을 두고 오랜 동안 부정적인 여론이 제법 심했었습니다. 더러는 오해도 있었지만, 요지는 언제 덕을 보게 될지 모르는 거창한 일을 벌려놓고 많은 돈을 쏟아 붇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였습니다. 그 때에도 저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첫째는 곡성군에 큰 재산을 불렸다는 자부심입니다. 최악의 경우에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못하고 매각하더라도 손해는 안 볼 것으로 기대합니다. 둘째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보존하는 의미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이 더 컸습니다. 근래에 대대적인 철도개걍공사가 이루어지면서 폐선이 많이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몇군데는 한국철도의 역사 기록으로 계속 유지 관리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곡성역과 압록역의 직선화된 새 철길은 주로 터널을 지나면서 간간히 섬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구 곡성역에서 압록역에 이르는 옛 철길은 17번 국도와 함께 섬진강을 따라 활처럼 휘어져 협곡 사이를 달립니다. 곡성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따라가는 도로가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길과 함께 구례구까지 달리는 철길의 정취 또한 아름답다 할 것입니다. 압록역에서 구례구역까지 철길은 아쉽게도 이미 뜯겼습니다. 구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의 폐선만은 꼭 지켜야 합니다. 한국철도의 입장에서도 철길로 계속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정부가 철로를 관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건설교통부나 한국 철도공단 또는 철도시설관리공단에서 그 유지관리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시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억의 기적소리에 온갖 번다함을 잠시나마 날려 보내시고 모쪼록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즐기시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가정과 앞날에 항상 행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5년 3월 30일


곡성군수 고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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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한국지역문학인협회, [제4회 대한민국 문학메카] 자료집, 2004. 12. 112-120쪽




관음사(觀音寺)와 곡성심청(谷城沁凊)


곡성군수 고현석




관음사(觀音寺) 개요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다. 규모가 큰 절은 아니다. 그런데 이웃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에 가면 성보박물관에 이 절의 역사를 기록한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 (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조 영조 때(1792년) 백매자(白梅子)라는 분이 우한자(優閑子) 스님이 들려준 절이 생긴 내력을 다듬고 원통전의 상량문 기록 등 중창한 자취를 뒤에 붙여서 찬술한 기록이다 목판 인쇄를 했는데 목판을 멸실되고 송광사에 보존된 것이 유일한 판본이다.




이 사적에 의하면 관음사는 서기 300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백제가 불교를 공안하기 훨씬 이전이다. 고려말인 서기 1374년에 5중창를 했다는 상량문의 기록에 미루어 유추해도 창건연대가 서기 3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직하다. 그렇다면 관음사가 “백제불교 최초 가람”이라고 내세울 만하다. 무엇보다고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유래에 관한 학술적 연구를 통해서 관음사의 역할이 구명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관음사사적]에는 정유재란 때 (1579년) 오진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殿圓通)만 남고 모두 소실된 것을 그 후 몇 차례 중수한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관음사 원통전은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서 국보 제273호로 지정되었고, 그 안에 모신 금동관음보살좌상(金銅觀音菩薩坐像)은 보물 제214호로 보존해 왔는데,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휴전 후 1954년에 타지 않고 남은 대은암을 옮겨 지금의 원통전을 지었으니, 소중한 문화유산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관음사 경내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어람관음(魚籃觀音) 상이 있고, 비록 머리 부분이 깨져나가고 불에 그슬렸지만 마치 백제의 미소를 전해주는 듯싶은 소조불상(塑造佛像)이 보존되어 있어서, 이 절의 유구한 역사를 전해주는 듯하다. 소조불상은 성덕보살의 상이라고 하며, 오산면 가곡리에는 고려시대의 5층석탑이 있는데 원홍장효행탑이라고 전해진다. 이들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절실하다.






관음사 연기설화 (觀音寺 緣起說話)


관음사가 언제 어떻게 창건되었는지에 관한 [관음사사적]의 기록은 말하자면 서기 300년 창건 이래 1,400여 년을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비로소 문자로 옮겨진 것이다. [관음사사적]에 기록된 관음사의 창건설화, 불교용어로는 연기설화의 개요는 이러하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홍장(洪莊)이라는 외동딸과 함께 곤궁하게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홍법사(弘法寺) 성공(性空) 스임이 불사에 대시주가 되어달라고 간청하자, 가진 것이 없는 원량은 결국 16세의 딸을 데려가 팔아 쓰도록 한다. 비단 딸과 아버지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길에서 이 광경을 보고들은 사람들이 몹시 슬퍼한 가운데, 스님을 따라나선 홍장은 산 넘고 물건너 피곤한 몸으로 소랑포 부두에서 쉬게 되었다.




이 때 서쪽에서 배 두척이 달려오더니 배위의 사자가 홍장의 아름다운 용모를 살펴보고는 창으로 황후마마라고 절을 하였다. 사연인즉 진(晋) 나라의 황후가 돌아가겼는데 황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새 황후가 동국에 태어나 이미 장성하였는데 단정하기가 전 황후에 못지않다고 하여 예물을 싣고 모시러 왔다는 것이었다. 이에 예물을 스님에게 드리고 상국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한 후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힘써 정업(淨業)을 행하였다. 조칙으로 석공에게 마노로써 삼천의 탑을 만들게 하여 여러나라에 나누어 주고,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거듭 조칙을 내여 53 불, 500 성중, 16 나한을 만들어 배에 실어 본국으로 보냈는데 표류끝에 감로사에 안치되었다. 석공이 늙자 그 아들을 시켜 또 탑을 만들어 보내기를 두 번이나 했고. 다섯 번째로는 아버지의 복전(福田)으로 불상과 탑을 조성하여 대홍현 홍법사에 옮겨 모셨다.




마지막으로 장인을 시켜 자신의 원불(願佛)로 관음상을 주조하고 뱃사람에게 명하여 석선에 싣고 동국으로 떠나보냈는데, 표류 끝에 낙안(樂安)의 단교(斷橋) 부근에 도착하였다. 수비병들이 황당선(해적선)으로 의심해서 잡으려 하니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움직여 아득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 버렸다. 이튿날 옥과(玉果)에 사는 성덕(聖德)이라는 처녀가 수평선을 바라보니 조그만 석선이 이끌리듯 다가왔는데, 배위에 금빛 찬란한 관음상을 뵙고 홀연 공경심이 일어나 몸을 던져 예배하고 몸소 과능ㅁ상을 업었던바 새털마냥 가벼웠다. 그런데 길을 도와 이 고개에 이르자 태산처럼 무거워져서 여기에 안치해 놓고 큰 절을 세워 그 이름을 성덕산 관음사라 하였다.




대저 홍장과 성덕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하겠다. 당신에 화주승 성공 스님은 재물을 얻어 달을 넘기기전에 공덕을 일으켰고, 장님 원량은 딸과 이별할 대 흘린 눈물로 먼 눈이 홀연히 밝아져서 두루 복을 누리다가 95세에 돌아가겼다. 이 모든 것은 부처님이 감응하신 오묘한 자취로서 묻어버릴 수 없는 일다.




관음사에 얽힌 다른 이야기들




여기까지가 [관음사사적]의 찬술자인 백매자가 장로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음어 기록한 것이다. 이어서 기록의 경위를 간략이 설명하고 나서 절의 중창에 관한 사적이 뒷부분을 이룬다. 말미에는 절의 직분을 가진 스님들의 법명과 간각자의 성명 및 간행 시기와 장소를 기재해 두었다. 간행처를 옥관 관음사라고 했는바. 당시에는 곡성현과 옥과현이 각각이었고 지금의 오산면은 옥과현의 화면이었다.




관음사 연기설화와 관련하여 [관음사사적]에는 없으나 이 고장에서 널리 회자되어온 이야기로 12정 이야기가 있다. 성덕이 관음상을 업고 낙안을 출발하여 옥과로 향하는데 도중에 12정자를 만나 쉬어갔다는 것이다. 처음 정자는 이름을 알 수 없고, 두 번째부터는 대취정, 천정(샘정), 미타정, 율목정, 불휴정, 흥복정, 현정, 삽정, 그리고 열 번째박 9일동안 머물렀다고 해서 구일정이다. 지금도 곡성군 겸면에 흥복(興福) 마을과 현정(玄亭) 마을이 있느니 성덕이 이미 고향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아흐레 동안 동쪽에 있는 화순 백아산으로 갈까, 서쪽에 있는 담양 추월산으로 갈까, 옥과의 설산에 모실까를 궁리 끝에 백아산에 모시기로 작정하고 구일정을 나서서 운교에서 쉬고 하느재(천치 天峙)를 넘었다. 이 때부터 그 동안 가볍기만 하던 관음상이 점차 무거워져서 근처에 합당한 터를 잡아 관음상을 모신 곳이 지금의 관음사이다. 관음사는 바로 겸면 운교(雲橋)마을에서 하느재를 넘어간 곳에 있다. 이 정을 정자가 아니라 마을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관음사의 창건설화라고 할 수 있는데 [관음사사적]에는 누락된 채 전해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학술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또 관음사에 [오색주(五色珠)]라는 이름의 소책자가 전해오는 데 환주대사의 일생을 그린 아주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이다 열두 정자 이야기 및 환주대사 이야기와 함께 관음사의 근대 영험설화까지 모아서 소개한 자료가 1995년에 관음사에서 발행한 광만편저 [심청전의 원형, 관음사의 연기설화]이다 편저자 광민은 당시의 주지 스님이다. 이책은 엄밀한 학술서적이 아니고 관음사의 유서를 널리 알리고자 편저한 것이다. 그러므로 [관음사사적]과 12정자 이야기에 구분이 없고 불교적 윤색이 섞여 있다. [관음사사적]의 핵심이라고 할 연기설화에 대해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은 2001년 관음사 발행의 지인 편저 [원홍장의 아름다운 효심이 서린, 심청정의 원형, 관음사 연기설화] (21-28 쪽)가 있다. 또 2003년 박이정 간행의 박혜범 저 [원홍당과 심청정] (17-33 쪽_에는 [관음사사적]의 전문이 한문과 국문의 대역으로 소개되어 잇다. 지인은 지금의 관음사 주지이고 박혜범은 향토사학자이다.


곡성심청(谷城沈凊)의 부활




곡성군에서 심청축제를 한다면 산골에서 무슨 심청이냐 또는 그곳에 인당수가 있느냐 하고 의아해 한다. 그런데 곡성군에 전해오는 효녀 원홍장 이야기 (관음사 창건설화)가 1930년 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 소개된 이래로 심청전의 근원설화 또는 배경설화로 국문학계에서 널이 인정받고 잇다고 하면 또 한번 놀랜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자치시대의 곡성군은 심청을 문화자산으로 활요해서 다양한 심청사업을 펼칠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껏 그 가치를ㄹ 인식하지 못하고 지났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크고 소중한 자산이기에 성큼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구용역을 통해서 한번 정리를 해보고 나가기로 했다. 그런에 양권승 전문연구원이 중심이 된 연구팀은 원홍장 이야기가 기록된 [관음사사적]이 관음사의 역사기록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서기 300년대 철의 주산지였던 섬진강변의 처녀가 무역항로를 따라 중국 양자강 어귀의 관음불료 성지인 보타도(普陀島)에 이르는 경로를 추적했다. 그곳 심가문진(沈家門鎭)에 심가촌(沈家村)이 여러 곳 있고 심수도(沈水道)와 연화양(蓮花洋)과 성비궁터등 심청전의 무대를 연상시키는 지명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원홍장 이야기를 실화로 복원하고, 이로부터 인당수와 인신공희 및 용궁환생 등 비현실적 요소가 가미된 소설 심청전으로 발전한 경로화 판소리 심청가에 황주 도화동이 등장하게된 배경을 추론했따. 말하자면 심청전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접근을 통해서 역사기록인 [관음사사적]과 문학작품인[심청전]을 연결시키고 심청이 실존인물임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 연구 성과 [효녀 심청의 사학적 국문학적 고증]이 2000. 4. 1. 방영된 KBS 1TV의 「역사스폐셜」을 통해서 전국에 소개되었던 바, 제목은 “역사추적, 심청의 바닷길”이었다. 이로써 심청은 1700여 년만에 곡성땅에 부활했고 곡성심청은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일찍이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에 의해서 [관음사사적]이 절의 역사기록임에 착안하여 관음사 연기설화를 창건설화(이야기)가 아닌 역사로 복원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성덕산 관음사” [불교춘추] 1997년 1월호, 86-111쪽). 이 연구에서는 원홍장을 고려인으로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로 보고 그 무대를 개성의 대흥동으로 추론하였다. 또 옥과가 옛날 당골이었고 판소리의 명인이 많았다는 데에 착안하여 관음사 연기설화가 이 고장의 수많은 소리꾼들과 무당에 의해서 판소리로 짜여졌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완판계 [심청정]이 나왔을 것이라는 추론을 한 향토사학자도 있었다 (옥과고 정일선 교사, “심청전의 고향 옥과 성덕산 관음사”). 그러나 이런 연구가 학계나 지역사회의 논란을 불어 일으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관음사사적]에 의하면 원홍장은 충청도 대흥현 사람이다. 그런데 양권승 연구팀은 서기 300년대 철의 주산지 곡성과 중국 관음불교의 성지 보타도를 연결시키면서 원홍장이 곡정 출신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대흥현으로 잘 못 기록하게 되 연유를 추론하엿다. 예컨대, 전해오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옮긴 시기는 조선 시대이지만 서기 300년 당시에는 충청도도 대흥현도 없었다거나 곡성군에는 지금도 대흥(大興) 마을이 두 곳이고 같은 의미의 덕흥(德興) 마을까지 합하면 셋이나 된다는 것이다.




곡성군은 학술연구와 KBS 1TV 역사스폐셜 방영에 힘입어 2000년 초파일(부처님 오신날)에 군민끼리의 심청축제를 가졌다. 곡성 땅에 심청의 부활을 선언한 것이다. 이날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가 참석하여 자작시 “고향에 돌아온 심청”을 낭송하여 축하해 줌으로써 곡성심청은 더 한층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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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군의 심청사업




곡성군의 심청사업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2001년 대외적인 행사로 곡성심청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수십만이 축제를 찾아 주어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아직 지역경제와 연결되지 못해서 애태우고 있다. 관음사 입구에 심청문화센터를 열었고 야철터가 있는 섬진강변의 옛 쇠정 마을 터에 심청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이에 앞서 관음사가 있는 오산면에서는 주민들의 모금으로 심청공원을 만들었고, 대회적으로는 곡성군과 중국의 보타도(절강성 주산시 보타구) 사이에 자매결연의 교류를 하고 있는데, 공원조성계획을 세우면서 ‘심청별원(沈凊別院)’을 만들기로 하여 협조하고 있다.




곡성심청축제는 매년 학술대회를 병행하고 있다. 처음 두 번은 곡성심청을 주제로 했는데, 세 번째와 네 번째는 효를 주제로 선택했다. 매년 의미 있는 학술대회를 열어서 곡성군이 비록 한국의 작은 농촌이지만 현대 인류를 향하여 값진 메시지를 발신하는 진원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심청축제다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자 애쓴 끝에 “공양미 삼백석” 코너를 설치했는데, 곡성심청축제에 대한 중앙언론의 주목을 이끌어 낸 효자가 되었다. 백내장 녹재장 등 안과질환으로 실명의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수술비를 마련 못하는 딱한 노인들이 농촌에 많이 계시는데 매년 3천만원 이상이 걷혀서 곡성 안팎의 어려운 노인들에게 개안수술을 해드리는 아주 보람있는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학술적으로는 심청전을 문학이 아닌 역사로 접근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허구가 아닌 실화로, 즉 심청을 실존인물로 볼 수 있는가에 관하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곡성군의 ‘심청마을’에 내포된 허구성이 폭로되면서 역사교육을 왜곡시킨다는 비판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한편 향토사학자에 의해서 심청이 곡성 출신이며 심청마을은 동악산 아래라는 주장도 제기되었고 (박혜범), 다른 한편에서는 관거의 옥과현이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유봉남). 그러나 곡성군은 학술연구기관이 아닌 지방정부이다. 곡성군을 심청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고장으로 가꾸고 싶지만, 결코 역사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 말하자면 코펜하겐의 인어공주나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처럼 이야기가 있는 관광지를 갖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으로 논란꺼리일지라도 재미있는 소재라면 곡성군에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이며, 어느 의미로는 학술적으로 시끄러운 논란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학술연구가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엄밀한 검증을 거친 통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곡성군민들은 이쯤에서 심청를 곡성군이 독점하고 싶어 한다. 심청이 곡성 사람이므로 심청을 곡성군이 독점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곡성군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국문학계가 심청전의 근원설화와 관련 있는 국내지소로 인정하는 곳이 다섯이다. 백령도의 인당수와 연희리, 화성군 서신면 (흥법사와 홍장각시), 예산군 대흥면 (조선시대 대흥현), 곡성군 관음사, 속초 동해안 심청굿 근거지이다. (최래옥, [심청전]의 총체적 분석, 1984). 훗날 등장하게 된 황해도 황주까지 합하면 심청전과 관련되는 곳이 여섯으로 늘어난다. 백령도에는 이미 심청각이 세워졌다. 심청이 그 마을에서 태어나 인당수에 투신했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확신으로 간직해온 마을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옹진군이 곡성군보다 먼저 심청사업을 펼친 것이다. 서로 배경이 다르다.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자산인 심청과 연관이 있다고 학계가 인정하는 곳이면 지방정부가 나서서 그 지역에 맞는 심청사업을 펼치고 북녘의 황주도 넣어서 심청연대(沈凊連帶)를 만들어 교류하면 오히려 좋을 것이다. 정말 심청다운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곡성군은 심청 축제 대회사를 통해서 해마다 이 같은 제안을 천명해 왔는데,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적극적으로 나설만한 일이다.




곡성심청은 그 부활에서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착실히 성장해 왔다. 새로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제 2단계의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밑그림을 마련할 때이다. 많은 주민들이 심청을 기리는 사당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영정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청축제가 제의로부터 출발해야 전통적인 맛이 있고, 그래야 성공한다는 주당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음사 연기설화의 종교적 신앙적 측면을 살리는 사업을 펴야한다는 제안도 있다(임재해, “설화의 역사성과 관음사 연기설화의 재인식” [제2회 심청학술대회]자료집, 1-50 쪽, 곡성군, 2002).




관음사 연기설화가 심청전의 근원설화이며 원홍장이 심청으로 변환되었다고 보는 것은 원홍장의 세속화라고 할 수 있다. 연기설화에 나타난 홍장의 아버지를 위한 효행(孝行)을 부처님에 대한 신심(信心)의 발로로 보는 견지에서 이를 못 마땅해 하는 비판도 있다. 장님 원량의 개안은 믿음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기적을 매개로 하는 범종교적 행사를 심청사업에 접목시키자는 제안도 있다.(곡성신문 박정하 사장). 모두 의미 있는 비판이며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종교의 입장에서도 심청에 의한 세속화가 홍장의 신앙적 측면에 못지 않은 가치를 갖는다고 본다.. 즉 심청에 의한 세속화가 홍장의 신앙적 측면에 못지 않은 가치를 갖는다고 본다. 즉 심청이 비록 세속의 인물일지라도 그 효심이 지극하기가 성녀의 면모를 갖추었으므로 홍장이 우리 민족에게 널리 사랑을 받아 온 심청의 모태로 추앙되는 것을 싫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심청을 내세운 세속적 사업과 홍장을 기리는 신앙적 사업내지는 성덕을 기리는 종교적 사업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유념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고 사업으로서 성공하기도 쉬울 것이다. 현재까지는 세속적인 심청사업에 머물러 있다. 그 틀을 갖추고 뿌리를 내리는 데에 진력하는 단계이다. 앞으로 신앙적 종교적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지역발전에 큰 활력이 될 것이다. 관음사 연기설화에는 그만한 폭발력이 잠재해 있지만 여기에는 사찰과 종단의 동참이 필요하다.




자연속의 가족마을 곡성군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제도가 있다. 광주지방검찰청이 매년 그 마을 사람들이 단한건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마을을 선전하여 표창하고 전라남도가 마을에 상으로 사업비를 주는 제도이다. 1980년 제도가 생긴이래 20년 동안을 합해 보면 곡성군이 전체 마을 수의 1/3 또는 1/2을 차지한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곡성국은 2004년에 뒤늦게 이미지통합(CI)을 시작했다. [친환경 가족도시 곡성군]을 비전으로 설정하고 [자연 속의 가족마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를 형상화한 아름다운 도안도 만들었다. 이런 비전을 만들어 낸 바탕에는 역사문화자산으로서 곡성심청을 부활시키고 자연환경자산으로서 섬진강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해 낸 노력과 성과가 깔려 있다. 섬진강이 그 가장 큰 지류인 보성강을 받아들이는 곳이 곡성군의 압록(鴨綠)이며, 곡성군 관내를 흐르는 두 강의 본류만 해도 54km에 이른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열녀 춘향의 고장 남원과 효녀 심청의 고장 곡성이 마주하고 있는 것과 곡성군이 “충절의 표상, 고려 신숭겸장군”(김지욱, [자유] 2004. 11월호, 59-66)의 탄생지어서 충효가 함께 하는 것이 곡성심청을 더욱 좋은 모습으로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효열이나 충효가 마치 귀한 골동품을 구경하는 것처럼 옛날의 봉건적 가치를 새겨보는 데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될것이므로, 현대 민주사회의 가치로 새롭게 다듬어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곡성군은 [자연 속의 가족마을]에 포근하게 자리 잡은 친근한 곡성심청를 기를 것이다 .


곡성군은 순후한 인심을 바탕으로 [자연 속의 가족마을]을 잘 가꾸어서, 지리산통합문화권의 일원으로서, 섬진강환경행정협의회의 일원으로서, 한 몫을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청소년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뽑힌 농촌 군은 단양과 곡성 두 곳 뿐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노장청이 어린이와 함께 어울려 사는 지역사회의 복원을 소망하고 있다. 곡성심청은 이러한 곡성군을 일구는 원동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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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바보임을 아는 바보




친애하는 곡성군민 여러분


군수 고현석입니다.




내중에 퇴임의 인사말씀을 올리기전에 오늘은 눈에 보이지 않거나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군정에 대해서 몇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대목이 저의 인생철학에 관련 되는 지라 다소 쑥스럽기도 합니다만 앞으로도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에서 말씀드려 봅니다. 곁들여 개인적인 이야기도 좀 말씁드리겠습니다.




8년 전 저는 구조조정이라는 정말 어렵고 하기 싫은 과제를 안고 군수의 직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다른 군의 부러움을 살만큼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고통이 불가피했고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분들은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돌아보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사람에 관련되는 일은 사물에 관련되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힘이 듭니다. 공직사회와 지역사회의 깊은 이해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구조조정 당시에 친절봉사자세를 점검해서 불친절한 공무원을 조정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가히 살얼음판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군은 친절봉사를 그런 수단으로 쓴적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자치시대를 맞아 ‘친절’은 주민과 고객을 상대하는 기본자세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흔히들 대면친절, 전화친절에는 신경을 쓰면서, 문서를 친절하게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적습니다. 우리 군은 대면친절, 전화친절과 함께 문서친절도 생활화하자고 강조했던 기억이 납니다. 새삼스럽지만 공무원 여러분에게 떠나는 인사로 ‘친절한 문서’에 대해서 꾸준히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이와 관련해서 잘 정착된 일이 하나 있습니다. 표창장이나 감사패의 성명 다음에 반드니 ‘님’을 붙여서 아무개님이라고 쓰고 읽는 것과 마지막을 ‘표창함’이 아니라 ‘표창합니다’라고 존댓말로 맺는 것입니다. 작은 일 같지만 매우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표창장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학생들 생각이 납니다. 저는 임기 중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들의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강조해 왔습니다. 가령 표창을 하는 경우라면 군행사에서 수여받는 것을 병예로 생각해서 더 큰 격려가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학교장이 전수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지침으로 정해 놓지 않다보니 철저히 지켜지지는 못했자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6월 정례조회에 학생이 상을 받으러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철저히 지켜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장학금 지급의 경우는 학생 대신 학부모를 모시고 행사를 하다가 아예통장에 넣어 드리는 방식으로 바꿔서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제가 민선 2기 군수에 나서려고 준비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군민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릴 좋은 기회이니 집단민원에 앞장서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감사를 시키라는 제보와 제안도 받았습니다. 모두 거부했습니다. 제가 군수에 추임했던 초창기에 부딪친 집단민원이 몇가지 있습니다. 옥과통합보건지소는 이미 준공되어 개장을 앞두고 있었는데도 지역사회에 논란이 심했습니다 통합쓰레기위생매립장과 곡성하수종말처리장은 이미 입지가 선정되어 있었는데 진행이 쉽지 않았습니다. 다소의 시간이 걸렸지만 제 책임하에 주민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서 마무리했습니다. 전임자가 해놓은 일이어서 나는 모른달지, 왜 일을 이렇게 해놓았을까 하고 전임자 탓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집단 민원이 심심찮게 이어졌습니다. 곡성읍 진입도로, 곡성읍 우회도록, 전라선 철도개량공사, 겸면 산정리 광산개발, 오산 조양 공원묘지사업, 단사 흥복 간 군도 마무리 공사, 섬진강 다슬기 채취, 곡성읍 입구 개사육장, 건설폐기물처리장, 청계원 납골시설, 석곡 납골시설, 오산 운곡 납골시설, 이른바 수양댐 건설 사업, 옥과 하수종말처리장, 옥과 주산리 국도확포장공사, 오산 골프장 건설사업 등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잘 마무리된 것도 있고, 뒷맛이 개운치 못한 것도 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것도 있습니다. 다만, 상식과 원칙을 존중하면서 대화에 의한 조정과 합의에 최선을 다했고, 어떠한 개인적 거래나 고려도 없었다는 데에서 떳떳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군수가 이런 일의 해결에 뒤로 빠지거나 그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전가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곡 송정의 심청마을을 둘러싸고 광주 언론계가 후끈 달은 적이 있습니다. 연합통신, 문화방송, 시민의 신문 등이 자세한 경우를 듣고 납득했는데 결국 KBS가 ‘군수가 알고도 조작한 사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군수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군수실에 들이닥친 일행을 담담하고 담당하게 응대했습니다. 후일에 그 팀이 이번에는 우리 심청쌀을 소개해 주는 취재를 하러 왔었습니다. 이 분들 말씀이 심청마을 사건때 “군수가 자리를 피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직접 취재에 응해서 놀랐었다”고 해서, 저에겐 유쾌한 추억거리가 되었습니다.




산불이 나고, 봄가뭄에 시달리고, 충수해가 덮쳤을 때 그 현장에는 늘 군수가 앞장섰습니다. 그때마다 젊은 시절 보병 소대장의 자세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이 역시 힘들었지만 뿌듯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지난 8년동안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선거를 의식한 사람관리, 조직관리에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행동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거에서 저의 앞장을 서신 분들의 마음을 한없이 답답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군청중견직원 부인들의 모임으로 군수부인이 회장을 맡던 개나리회를 해체시켰습니다. 어떤 사회 단체에도 이른바 내사랑을 심기 위해서 압력을 넣거나 부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방자치가 발전하려면 민간단체의 자율적 성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승진인사를 개인적 은혜로 인식하는 풍토를 바꿔보고자 무진장 애썼습니다. 군수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군정에 충성할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습니다. “인사와 공사만 없으면 군수의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는 고민 끝에, 인사제도에 다면평가와 인사 기준사전예고제를, 수의계약에 전자견적을 선도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일찍이 예산서를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예산서의 구조 때문에 별 실효성은 없었지만 아마 국내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곡성군수실은 항상 군수실 문을 열어놓고 손님을 맞고 대화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흔히들 판공비하고 하는 업무추진비도 각 실과에 배분해서 실질적인 업무추진에 쓰도록 했습니다. 지난 8년 간 개인적으로 지출한 영수증, 축부의금과 회비 등의 송금증서, 은행거래통장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음모적, 조작적인 행동을 지극히 싫어합니다. 상대가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도 그가 말한대로 믿고 행동해 줄 경우도 많습니다. 속이는 것은 상대가 결정한 행동이기 때문에 스스로 고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책에 보면 인간의 심리적 약점을 밝혀서 이로 인한 잘못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살이에서는 이러한 약점을 악용하는 사례가 많고, 특히 정치에서 심합니다. 저는 늘 이런 일을 경계해왔기에 적어도 우리 공무원들이나 주민들을 대상으로 공작을 하거나 충동질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무슨일이든 직선적으로, 정면돌파의 자세로 임했고 처리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군수실에서 한 말이 금방 샌다”. “군수를 위해서 총대를 매는 간부공무원이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운동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새서는 안 되는 말이라도 있는가?” “일시 거쳐가는 군수가 공무원의 총대를 매주어야지 평생직장으로 다녀야할 공무원더러 군수의 총대를 매주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내가 평생을 책임지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걸기를 바랄 것인가?” 이것이 변함 없는 저의 생각이고 답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자랑을 좀 해야 하겠습니다. 일반 군민들이 알고 계시는 것보다는 훨씬 유명한 사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웬만한 큰일은 모두 김화중 전 장관과 연관시켜 생각하시지요. 그런 일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아서 부부간에 종종 웃으면서 공을 다툰적도 있습니다. 더러는 저 더러 ‘군수로는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제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신 고마운 말씀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군수의 직을 가볍게 본다 싶어 동의하지 않습니다. 흔히 ‘지방시대’라는 말을 하지만 현장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지방 현장의 8년 경험은 매우 값진 것으로 귀하게 간직할 것입니다. 곡성군 홈페이지 ‘군수생각’에 들어오시면 약 100개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가끔 지방정부가 자기 지방정부 수장의 글을 모아서 출판한 것을 받아보았습니다만, 저는 그럴 생각도 시간도 못냈습니다. [군수생각]에 실린 글은 오는 29일이면 모두 삭제할 예정입니다. 떠나는 군수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한번 쯤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집사랍 이야기가 나온김에 마저 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군민들이 김화중 전 정관을 좋아 하시고 아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 군은 군수가 두 명이라고 좋아들 하셨습니다. 통상 군수가 두 명이라거나 여러 명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의미로 말합니다. 그런데 곡성군에서는 한 사람 봉급만 주고 두 사람을 부린다는 좋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곡성군수의 자격으로 곡성군민과 함께 김화중 전 장관에게 곡성군정을 크게 도와주신 데 대하여 고마운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좋은 군수가 되라’고 당부하신 어머니와 집에 돈 한푼 들여놓지 못해도 열심히 응원해 준 가족들, 선거때만 되면 물심양면으로 신세를 지곤 했던 수많은 친지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선거를 마치고 혼자 생각에 실소를 했습니다. 저에게 투표하신 분들 가운데에는 무심함 사람, 정 없는 사람이라며, 섭섭하지만 그래도 찍는다거나 좀 심하게는 밉지만 그래도 찍어준 분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어쩌면 “일 따로 표 따로”라고 하는 선거판의 징크스를 곡성에서 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이 아니고 여론조사가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공을 못했습니다만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 것이어서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 면에서 우리 곡성군은 좋은 사례를 만들었습니다. 21,258표 중에서 저에게 주신 8,018표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며, 제 마음에 매우 자랑스럽게 간직할 것입니다.




“모두를 품으려 하면 아무도 내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모두를 품으려는 과욕을 가진 사람, 뿌릴 줄만 알고 낚아 챌 줄을 모르는 사람, 알아서 해주기를 기다릴뿐 요구하거나 다르치지 않는 답답한 사람, 선거로 뽑힌 사람이 선거보다는 일에만 몰두한 멍청한 사람, 이런 사람은 세상살이를 바보처럼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을 받아 곡성군정을 8년 동안이나 맡았던 군수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바보이긴 한데 스스로 바보인줄 알고 있는 바보이지요.


그렇긴 한데 주변사람들에게 별로 해롭지 않고 오히려 이로울때가 많았던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 바보처럼 살아왔는데도 이만큼 사는 것이 대견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스스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향후 거취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1년 전 서울을 떠날 때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만, 곡성에서 살 것입니다. 아마 중앙에서 일자리가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서울사람들이 시골에 발령 받으면 시골에 부임했다가 임기 마치면 서울로 돌아가듯이 저도 서울일 끝나면 다시 곡성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김화중 전 장관도 오래 정들었던 서울대학교에 명예퇴직을 신청해서 8월말로 그만두고 곡성에서 함께 삽니다. 전국여성단체협의회장 등의 직책 때문에 서울출입이 잦겠지만 일 마치면 곡성의 집으로 돌아오곤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곡성군민 여러분




다소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8년 동안 군수를 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에도 곡성군과 군민들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긴 계절입니다. 날씨가 점차 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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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의 직을 마치며




친애하는 곡성군민 여러분


군수 고현석입니다.




퇴임인사를 드립니다.


저를 두 번이나 군수로 뽑아 주시고, 8년 동안 군정을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8년 동안 원없이 일한 데 대한 뿌듯함과 그런 기회를 주신 군민들에 대한 한없는 감사를 안고 떠납니다. 기간중 곡성군정을 도와주신 향우 여러분, 국회의원도의원군의원과 기관단체장 여러분, 전라남도와 중앙정부 요로의 여러분, 저와의 인연으로 곡성군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신 친지 여러분, 이 모든 분들께 곡성군정과 곡성군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도록 협조와 격려를 주신데 대하여 곡성군수로서 군민을 대표하여 마지막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는 돈을 벌어도 더 이상 광주로 이사 가지 않고, 곡성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곡성에서 아이들을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면서 가족과 함께 살며, 도시의 능력있는 노인들도 찾아와서 사는, 그래서 인구는 적지만 노장청이 쾌적한 환경속에 어린이와 함께 어울려 사는 그런, 농촌 모델을 향해서 열심히 뛰어왔습니다. 그 일을 내손으로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이 소중한 꿈을 접어야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참으로 무거운 짐을 벗어 내려놓은 안도감과 편암함이 또한 큽니다.




사랑하는 곡성군 산하 공무원 여러분


‘골짝나라’, ‘심청골’, ‘자연 속의 가족마을’은 곡성군의 발전방향을 고뇌하면 모색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온 우리들의 궤적을 말해 줍니다. 거기에는 많은 고통이 있었고 많은 보함도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여러분과 함께 한 지난 8년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어려움을 헤쳐 나온 보함이 훨씬 컸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평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직도 고쳐야 할 점, 부족한 점이 많고, 새롭게 개척해야 할 분야가 많으며, 사람과 분야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대체로 지방정부의 공무원으로서 그 역량이 매우 커졌다는 것을 외부에 자랑 하고 싶고 여러분에게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중앙정부로부터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업들을 유치하다 보니, 국비 보조에 대응하는 군비의 충당에 부담을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군 자체의 실질적인 투자심사가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그동안에는 필요한 사업들을 요청하고 얻어오기에 급급했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의 역략이 이처럼 커진것입니다. 마음 든든합니다. 투자사업의 계획과 분석에 대해서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었는데 기회를 못 갖고 떠나서 못내 아쉽습니다.




1999년 봄의 남도순환열차가 인연이 되어 2003년 봄까지 운행했던 ‘치포치포 섬진강나들이 관광열차’에 저와 여러분이 쏟았던 정성이 지극했었지요. 섬진강변 축제에 사람들이 몰려서 압록교 일대의 교통이 마비된 적이 있었지요. 처음 겪는 예상 밖의 일이어서 무척 당황스러우면서도 감격적이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엊그제의 일들인데 아련한 추억으로 회상되는 것은 심청축제, 공양미 삼백석, 섬진강 마라톤, 코스모스음악회, 목화축제 등 행사와 자연학습원을 필두로 섬진강 기차마을에 이르는 각종 시설 및 농촌관광마을들의 개장과 프로그램 연계로 곡성군이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정규모학교 육성 시범사업을 위한 지역하회의 합의를 얻기까지, 합의를 바탕으로 적정규모학교 육성 시범사업 예산을 성사시키키까지, 이를 뒷뱓침할 자녀교육지원사업을 마련하기까지, 수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려운 농업여건을 해쳐보려는 다방면의 시도와 함께 기본방향을 친환경농헙에 두고 꾸준히 노력해서 일단 큰 흐름을 잡았습니다.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많지만 자녀교육지원사업과 친환경농헙에 관한 지역사회의 합의와 실펀을 곡성군민의 위대한 결단을 이끌어 낸 보람찬 성과였습니다. 곡성군민들이 긍지를 가지고 자랑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속 전진이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곡성군의 적정규모학교와 자녀교육지원사업은 농폰교육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업으로 전국적으로 큰 주못을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교육부총리를 비롯한 정부당국의 관심은 물론 국회에서도 유명하며, 전국에서 수시로 연구단과 시찰단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자만할 일은 못됩니다. 확실한 성공을 자신할 수 있을 때까지 지역사회가 끈기 있게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건설환경복지 등 손에 잡히는 분야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기획홍보정보민원세정행정지원 등 분야의 혁신활동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실과읍면장과 담당이 한자리에 모여 각각 자기의 직무에 대해서 소개한 일종의 직무박람회를 가진 것은 아마 곡성군만의 소중한 경험일 것입니다.


곡성군의회 희장과 의원들이 연명으로 저에게 준 감사패에 특별히 친환경농업과 심청사업과 섬진강 기차마을, 그리고 적정규모학교육성 시범사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녀교육지원사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네가지 큰 틀의 안팎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사업들을 점철해온 지난 8년의 세월이었습니다. 판소리의 자진모리 가락으로 읊어대도 한참은 걸릴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함께 해냈습니다. 수도들 많으셨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작별을 하려고 보니 사람에 관련되는 일들이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승진을 못 시켜드린 분들. 원하는 자리를 못 드린 분들, 특히는 안 좋은 사유로 직장을 떠난 분들. 승진을 했는데도 불만을 안은 채 떠난 분들, 인사의 시스템화를 향해서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제도와 의식변화의 한계 속에서 여전히 ‘인사는 군수의 고유권한’이므로 ‘군수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서운해 한 분들, 참으로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이 여전합니다.




사랑하는 곡성군민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곡성군 산하 공무원 여러분




저는 인사에 다면평가와 차기인사지침예고제, 공사에 전자견적을 도입하는 등 모든 군정을 떳떳하게 처리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인사와 관련하여 유감이 있는 분들에게도 이 말로써 양해를 구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귀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실수와 모자람은 있었겠지만, 공인으로서 해야 할 도리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성의는 다했기에 떳떳하고 담당한 마음으로 군수자리를 물러납니다.




마음이 떳떳해야 한다는 저의 고집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특히 정치에 나선 뒤로는 그 부담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남편, 그런 아버지, 그런 아들을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친애하는 곡성국민 여러분


“고형석이 어떻게 정치판에 뛰어든다는 것이냐?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 일만은 만류해야 한다”고 걱정했다던 학교동기동창을을 비롯해서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군수가 된 것을 참 대견해 했습니다. 당의 공천받기도 힘들었고 군수선거도 힘들었습니다. 군수에 두 번이나 당선된 것이 제가 생각해 보아도 대견스럽습니다. 그런 만큼 주위에서 귀한 대접도 받았고, 나처럼 선거에 어설픈 사람을 군수로 뽑아준 곡성군민을 주위에다 자랑도 했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라는 국민들의 여망보다도 지방자치를 지역구관리의 수단으로 쓰고 싶은 국회의원들의 계산이 야합의 힘을 발휘해서, 정당공천이 강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분들이 저의 당적을 걱정했습니다. 민주당으로 다시 입당해야 당선이 된다고도 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할맣이 많습니다만, 내년을 위해서 요점만 몇가지 말씀드려 둡니다.




첫째, 제가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변경한 것은 저의 정치신념에 따른 행동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앞으로도 대의가 아닌데 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당을 고집하거나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민주당 국회의원보다 먼저 나가서 기다리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안데리고 혼자 나갔고 나간다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습니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당원동지들과 군민들에게 보고하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 후 치렀던 국회의원 선거 과정을 되돌아보면 알만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둘째, 열린우리당이 당초 목표했던 전국정당으로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고 개혁을 원만하게 주도하지 못하는 등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분명하고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사적으로 다른 당이 그 해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국민의 정부가 호남을 배려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해 안타까웠었는데, 참여정부는 과감한 배려가 많았음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계획하면서 모든 지역이 탐내는 한전을 우리 쪽에 먼저 할당해 놓고 나머지를 나눈 사례, 호남 고속철 조기 착공계획, 광주문화도시, 여수엑스포 국가적 추진, 특히 싱가포르와 추진코자 하는 S프로젝트 등이 이를 입증합니다. 대부분이 실무진의 소극적 의견을 다스리면서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원초적인 감정에 의지해서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대세를 그르치게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넷째, 내년에 참으로 중요한 대선을 치러야 하는데 다시 함께 가야 합니다.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심함 감정의 골이 패이지 않도록 무척 조심했습니다.




정치는 그 미치는 영향이 광범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모두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정치를 바로세울 책임을 정치가에게 돌리면서 비판하고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데 매우 위험합니다. 그 책임은 근본적으로 유권자인 국민에게 있습니다.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를 없애게 되면 이에 따르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장점이 훨씬 크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국민의 힘으로 생활정치인 지방자치를 중앙정치로부터 독립시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곡성군민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곡성군 산하 공무원 여러분




6월 중순에 우리군에서 산업자원부에 신청해 놓은 사업에 대한 최종심사가 있어서 조형래 당선자와 함께 심사장소인 교육문화회관을 방문했습니다. 그 보람으로 전국에서 20여개 사업이 경쟁했는데 곡성군이 1등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교육개발원이 근처에 있어서 원장을 함께 찾아보고 평생학습도시 지정을 부탁했습니다. 잘 될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사업자체도 중요하지만 낙석한 현직군수와 차기순수 당선자가 자기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행보를 함께 하는 모습에 곡성군 안팎으로 찬사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도 흐뭇합니다. 저에게 군수의 일을 할 기회를 주신 군민들에게 마지막까지 군수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써 보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일반 군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갑니다. 감사하고 보람차면서 아쉽기도 하고 오랜만의 휴식에 한없이 편안하기도 합니다. 물러날 때면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감사와 보람만 간직하고 유감은 떨쳐버리고자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드리면서,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실 것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중요한 사업장조차도 군수가 꼭 직접 확인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둘어보지 못했을 만큼 바삐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서울 등 외지의 일을 보게 되겠지만, 가족과 함께 곡성에 근거를 두고 살면서 곡성을 사랑할 것입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곡성의 산하와 마을들을 구석구석 살펴보기도 하고 좋은 분들 만나 담소도 나누고 싶습니다. 감히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흉내라도 내보겠다는 엄두는 못 내지만, 그간 지방자치와 정치의 현장경험을 정리하면서 모자란 대목을 천착하여 보충해 보고 싶은 학구정 꿈도 가져봅니다.




민선 제4기 곡성군 집행부와 제5기 곡성군의회와 함께 곡성군에 큰 발전이 있기를 소망하고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간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6. 6. 30


곡성군수 고현석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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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석


1943. 2. 17.


전남 곡성군 곡성읍 학정리 한양파크빌 101동 808호




학력


광주일고(1961)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사, 1966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영학석사, 1976


중앙대학교대학원 경제학박사 (지역사회개발), 1994


전남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제7기 수료


서울대학교 장수과학최고지도자과정 제1기 수료, 2007.




경력


농협중앙회 26년 근무, 조사부장 퇴직(1995)


(사)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2년)


민선 23기 곡성군수 (1998. 7.-2006.6.)


지방이양위원회 위원


강빛마을 추진위원장 (현)


장수벨트 실버서비스산업도시개발회 회장 (현)




특기사항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 제5대 단장


낙산야학교 국어교사


한국농업근대화연구회 이사, 감사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사


전국귀농운동본부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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