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대종교와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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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대종교와 독립투쟁의 대부 "홍암 나철을 찾아서"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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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의 대종교, 단군신화에 기반을 둔 한민족만의 고유한 민족 종교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오기호 등 10여 명과 함께 단군교 창시...1910년 일제의 탄압을 면하기 위해 대종교로 개명

일제는 1915년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단체로 규정 탄압...홍암 나철, 1916년 황해도 구월산에서 민족애와 애국심을 가슴에 묻고 순교

대한민국 정부, 1962년 홍암 나철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1991년 두 아들에게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보성군 벌교읍 홍암 나철 전시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전남 보성군 벌교읍 홍암 나철 전시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5) =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는 '홍암 나철 기념관'이 있다. 홍암 나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대부로서 한민족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의 열망을 담아 대종교(단군교))를 중광했다. 이번 이야기는 "제2편 대종교와 독립투재의 대부 "홍암 나철의 대종교"로 제3편 대종교 교도들의 독립전쟁과 후대의 평가는 다음주에 연재된다.

보성군 벌교읍 소재 홍암 나철 전시관 내 전시실 [정성환 기자]
보성군 벌교읍 소재 홍암 나철 전시관 내 전시실 [정성환 기자]

◆ 대종교(大倧敎) 역사

하늘의 신인 환인이 서자인 환웅을 세상에 보내 홍익인간 이념으로 세상을 다스리라 했는데, 세상에 내려온 환웅은 쑥과 마늘만 먹고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해 역사의 대장정은 시작되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바로 단군신화이다.

이러한 단군신화에 기반을 둔 한민족만의 고유한 민족 종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홍암 나철이 중광 한 대종교이다.

설화로 내려오던 단군신화가 대종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09년 대한제국 시기였다. 대종(大倧)은 주신인 환인을 말하는데 환인은 세상을 주관하는 천신으로 대종교 최고신을 말한다.

나철은 대한제국 시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며 구국운동을 펼쳤지만, 역부족임을 알게 된다. 그는 국가의 기틀은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일깨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1909년 1월 15일, 서울 종로구에서 오기호 등 발기인 10여 명과 함께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한 종교를 창시하는데 이것이 단군교(檀君敎)이다.

1900년대 문헌에는 단군의 고조선을 실제 역사가 아닌 신화로 설명한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일제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역사를 지우기 위해 우리나라 고조선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홍암 나철은 1909년 단군교를 창시하면서 “47명의 단군이 다스린 2000여 년 고조선의 역사는 분명한 한민족 역사이므로 이를 다시 계승한다”라고 표방한다. 그러자 일제의 단군교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자 나철은 1910년 일제의 탄압을 면하기 위해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꾸고 만주 북간도에 대종교 지사를 설치하고 포교활동에 전념했다.

당시 북간도에서 대종교를 이끌던 홍암 나철은 만주벌판을 헤매며 단군(檀君)의 유적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단군 묘와 단군유적지가 만주에만 십여 개가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단군(檀君)이란 개인 이름이 아니라 현재의 대통령과 같은 통치자를 의미하며 『위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문헌을 보면 고조선도 오래전의 왕조였음을 알 수 있다.

청년 시절의 나철/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년 시절의 나철/전시실 [정성환 기자]

1914년 나철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이 살았고 현재는 수많은 애국 독립지사가 정착해 있던 북간도 화룡현 청파호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겨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교인과 교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민족교육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서일, 김좌진, 박은식, 김규식 등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이에 일제는 1915년 대종교를 종교 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대종교 활동을 중지시키는 탄압을 가하자 대종교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고 민족정기를 지키려 단군교를 중광 했던 홍암 나철은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다.

결국, 홍암 나철은 1916년 황해도 구월산에서 민족애와 애국심을 가슴에 묻고 순교로써 생을 마치게 된다.

나철이 순국한 이후 2대 교주로 취임한 김교헌은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1920년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주역이 된다. 1923년 3대 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으며 1932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대종교는 지하로 숨게 된다.

이처럼 대종교는 민족 종교로 성장하면서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의 산실이 되었으며 대종교 교인들은 음력 10월 3일을 하늘이 열린 날이라 하여 ‘개천절’로 지정해 행사를 치렀다.

그러던 중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 의정원 29인 가운데 21인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 ‘개천절’ 행사를 해오다가 해방이 된 1949년 대한민국 정부는 양력 10월 3일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암 나철/전시실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전시실 [정성환 기자]

◆ 단군교(檀君敎) 중광(重光)

1908년(45세), 유배에서 풀려난 나철은 또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구국운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류하고 있을 때 백두산에서 단군을 숭배하고 있는 백봉신사(白峯神師)의 제자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두 차례 만나게 된다.

나철은 일본 동경의 여관(청광관)에서 두일백(杜一白)에게 『단군교포명서』, 『고본신가집』이란 책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1달 후 또다시 동경에 있는 여관(개평관)에서 두일백(杜一白)을 만나 단군교 영계식(靈戒式, 입교절차)을 받았다.

이때 나철은 “국운은 이미 다했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느냐. 빨리 귀국하여 단군대황조(檀君大皇組)의 교화를 펴시오”라는 두일백(杜一白)의 권유를 받고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나철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그의 가슴속에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즉,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신념이 불타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망했다는 절망감 속에서도 단군 사상을 계승해 나라를 되찾겠다는 역사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독립운동이란 을사오적을 처단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우리 민족 전체가 민족 고유의 정신을 가다듬어 뭉치고 깨어났을 때 독립은 이루어진다”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귀국한 나철은 새로운 구국방략으로 민족 종교인 단군교(檀君敎)를 중광하고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당시 나철은 두 번에 걸친 ‘두일백(杜一白)’의 만남을 “단군의 거룩하신 사랑의 신화이고 묵시다”라고 판단했다. 1906년, 마침내 나철은 서대문 길거리에서 두암 백전선옹(頭巖 佰佺仙翁)이 주고 간 두 권의 책의 가치를 깨닫게 된 다. 나철은 서울 서대문에서 백전선옹(頭巖 佰佺仙翁)으로부터 받은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란 책을 탐독하며, 국파민멸(國破民滅)의 근본 원인은 사대주의 역사교육에 있으므로 이것을 타파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나철 순국 전 기념사진/전시실 [정성환 기자]
나철 순국 전 기념사진/전시실 [정성환 기자]

1904년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 후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과 카쓰라-테프트 밀약으로 한반도 지배권을 정당화했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조선의 국운은 기울어져 국권침탈의 위기에 빠진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나철은 일본의 침략을 무력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통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군의 가르침을 지성으로 받들어 민족의 혼(魂)을 되살리고, 힘을 길러 일제에 저항한다면 국권은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1909년(46세) 1월 15일 나철은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재동(현, 서울 종로구) 취운정(翠雲亭, 초가집)에서 오기오·이기 등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組神位)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해 초대 도사교(都司敎, 교주)로 추대된다.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나철은 단군에 대한 신앙을 체계화해서 환인, 환웅, 단군을 받드는 삼신일체(三神一體) 교리를 정립하고 단군을 교조로 하는 민족 종교인 ‘단군교(檀君敎)’를 중광(重光) 한다.

또한, 나철은 단군교를 중심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구현해 인류 평등과 세계평화를 추구할 것을 주창했다.

단군교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에는 유교의 충효 사상, 불교의 자비 사상, 도교의 무위 사상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애와 평화 애호 사상이 담겨있으며, 대종교 교인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신봉하면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이날이 바로 700년간 단절되었던 우리 고유의 단군 신앙이 빛을 보게 되는 중광절(重光節)로, 중광(重光)이란 새로 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고 있었던 교단을 재건했다는 뜻으로 단군교(檀君敎)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초대 도사교(都司敎) 나철은 5대 종지(五大宗旨)를 정립해 발표하고 교세 확장에 주력한다. 5대 종지(五大宗旨)는 단군교 교인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5가지 기본 계율로 사랑으로 겨레를 합해야 한다는 애합종족(愛合種族), 공경으로 한얼을 받들어야 한다는 경봉천신(敬奉天神), 정성으로 성품을 닦아야 한다는 성수영성(誠修靈性), 고요함으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정구이복(靜求利福), 부지런히 살림에 힘쓰라는 근무산업(勤務産業)을 뜻한다.

이처럼 홍암 나철은 인류공영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단군교(檀君敎)를 통해 실현하고 국난을 극복하려 했으며 중국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국파민멸(國破民滅)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찾으려 했다.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전시실 [정성환 기자]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전시실 [정성환 기자]

◆ 단군교(檀君敎)를 대종교(大倧敎)로 개명

일제는 경술국치 이전부터 단군교(檀君敎)를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국권 회복의 기수로 평가하고 철저히 증오하고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에 나철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1910(47세) 8월 5일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고 교세 확장에 총력을 기울인다.

대종(大倧)은 한얼님(하느님)이 이 세상을 널리 구제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는 뜻으로 단군(檀君)을 가리킨 것이며 대종교에서는 환인·환웅·단군을 삼신(三神)으로 숭배한다는 뜻이다.

대종교에서는 삼신(三神)을 각각 조화주(造化主), 교화주(敎化主), 치화주(治化主)로 여긴다고 한다. 이것은 환인은 창조주이고, 환웅은 신도(神道)를 가르쳤으며, 단군은 신도(神道)를 바탕으로 세상을 다스렸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종교다.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종교단체로 출발했지만, 그 성향은 항일독립운동에 가까웠다.

이처럼 나철은 우리 민족의 국조 단군(檀君)을 구심점으로 한 우리 민족의 종교인 대종교(大倧敎)를 설파함으로써 나라를 빼앗긴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구세주가 되었고, 대종교의 민족정신은 국내외 독립투사들이 대종교에 입교하는 계기가 된다.

대종교 교단 조직(4도 본사 책임자)/전시실 [정성환 기자]
대종교 교단 조직(4도 본사 책임자)/전시실 [정성환 기자]

 

◆ 일제의 대종교 탄압

1910년대 대종교 교인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였다. 한·일 병탄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자 1911년(48세) 나철은 만주(북간도) 화룡현 청파호에 교당과 학교를 세우고 단군 신앙과 민족교육에 헌신하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산파 역할을 했다.

이렇게 육성된 청년들은 독립군이 되어 북간도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은 전개했다. 이에 일제강점기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은 51종 20만 여권의 단군 관련 역사서를 강탈해 소각했고, 우리 민족정신을 철저히 파괴했다.

일제는 또한 단군 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하고 단군 조선의 역사를 지웠으며 대종교를 독립단체로 규정해 탄압했다.

당시 대종교 동도 본사 책임자인 서일(1881~1921)은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확대 개편해 독립정신 함양과 군사교육에 진력하면서 대일 무장 투쟁에 주력했다. 중광단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만주에서 결성된 최초의 항일무장투쟁 성격을 띤 대종교 단체로써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전신이다.

당시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1881~1921), 총사령관 김좌진(1889~1929) 등 독립군의 대다수가 대종교 교인들이었다. 이처럼 항일독립전쟁의 이념적 기반으로 성장한 대종교는 경술국치 초기에 국권 회복 운동의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역사학의 시발점이 되어 만주 항일독립전쟁의 구심점이 된다.

1915년(52세), 대종교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자 조선총독부는 ‘종교통제안’을 공포해 무속을 비롯한 국내의 모든 종교단체는 허가하면서 대종교만은 신교(神敎)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고, 대종교를 종교단체로 위장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속화 했다.

이에 나철은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 북간도(백두산 아래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고 민족 교육과 포교활동에 전념하자 대종교는 종교를 넘어 우리 민족의 이념이 되어 만주와 연해주의 동포에게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이에 나철은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대종교 4대 본사를 조직하고 책임자를 파견했다. 북도 본사는 이시영과 이상설, 동도 본사는 북로군정서를 이끈 서일, 남도 본사는 백두산에서 혈서로 제천(祭天)한 강우, 서도 본사는 신규식과 이동영이 이끌었다. 그러자 일제는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남도 본사를 강제 해산시키며 본격적인 폐교(廢敎)정책을 단행한다.

이처럼 일제의 탄압과 만행을 보고 견딜 수 없었던 나철은 교단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비장한 결심을 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로 향했다.

홍암 나철이 순국 전 남긴 유서/전시실 [정성환 기자]
삼성사/황해도 구월산 소재/전시실 [정성환 기자]
삼성사/황해도 구월산 소재/전시실 [정성환 기자]

◆ 홍암 나철의 순국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은 1911년부터 1915년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년간 북간도 지역 대종교 포교활동에 전념한 것은 대종교 신앙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 본사를 강제 해산했다. 일제의 간악한 탄압과 만행을 지켜보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홍암 나철은 1916년(53세) 음력 8월 4일 나철은 경성에 있는 대종교 남도 본사를 떠나 김두봉을 비롯한 수행 제자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동방 한민족의 국조인 환인, 환웅, 단군 등 삼성의 위패를 모신 성전이다)로 가기 위해 사리원으로 향했다.

황해도 사리원에 도착한 나철 일행은 사진관에 들러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고 구월산 삼성사로 향했다.

삼성사에 도착한 나철은 그해 8월 15일 0시 신입 교원 30여 명과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올리고 백두산이 있는 북쪽과 고향 보성이 있는 남쪽을 향해 마지막 망배(望拜)를 드린 후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않도록 하라”라는 글씨를 써서 출입문에 붙인 뒤 방문을 잠그고 수도에 들어간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 보니 나철은 미소 띤 얼굴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제 많은 동포가 괴로움에 떨어지는 죄를 대신 받아 천하를 위해 죽노라.” 나철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유서를 남기고 순명(殉命)한 것으로 그의 죽음은 순교(殉敎)이고 순국(殉國)이었다.

대종교의 정신적 스승 나철의 순국은 충격적이었다. 대종교에 따르면 나철은 스스로 숨을 멈춰서 죽는 폐기법(閉氣法)으로 순국했다고 전한다.

나철은 생을 다하기 전 여러 편의 유서를 남겼는데 순명 3조(殉命三條)를 비롯해 국민과 교인, 김교헌, 신규식, 아들, 딸에게 유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에게도 대종교를 탄압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겼다.

나철의 순명 3조/전시실 [정성환 기자]
나철의 순명 3조/전시실 [정성환 기자]

【나철의 순명 3조(殉命三條)】

“내가 한 올의 목숨을 끊는 것은 대종교를 위해 죽는 것이요, 한배검(단군 대황조)을 위해 죽는 것이며, 천하를 위해 죽는 것이다.”

나철의 비서 김두봉은 그의 시신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중국 지린성 허룽시(화룡현 청파호)에 2대 교주 김교헌, ‘대한독립군단’을 이끈 서일 장군과 함께 안장했으며 대종교 교단은 그가 운명한 날(음력 8월 15일)을 대종교의 4대경절(어천절, 개천절, 중광절, 가경절)인 ‘가경절(嘉慶節)’로 기념하고 있다.

나철은 평생 종교인으로서 수행을 통한 속세와의 단절을 중히 여겼고 한·일 병탄 소식을 들은 뒤에는 자신이 죽은 목숨이라고 말하며 평생 흰옷을 입고 살겠다는 다짐을 실천했으며, 망국의 죄인으로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죽을 때까지 조촐한 음식으로 연명했다고 전한다.

대종교를 중광하고 만주 북간도에서 무장독립전쟁의 길을 개척했던 홍암 나철은 진정 대한독립군의 대부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홍암 나철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두 아들에게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종교 3 종사 묘역(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현)/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호촌 소재/전시실 [정성환 기자]
대종교 3 종사 묘역(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현)/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호촌 소재/전시실 [정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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