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광주 취가정(醉歌亭)...김덕령 장군의 애끓는 사연이 깃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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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광주 취가정(醉歌亭)...김덕령 장군의 애끓는 사연이 깃든 곳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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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가정,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인근에 소재...찾는 이 끊임없어

충장로(忠壯路), 광주시가 김덕령 장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도로명 '명명'
취가정(醉歌亭)/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2)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는 조선 시대 풍류 문화의 극치를 이룬 환벽당이 있고, 약 100m쯤 떨어진 곳엔 의병장 김덕령 장군과 석주 권필의 애끓는 사연이 녹아있는 취가정이 있다. 이번 이야기는 김덕령 의병장의 한이 서려있는 '광주 취가정(醉歌亭)' 이야기이다.

취가정(醉歌亭) 편액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 편액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 편액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 편액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은 1890년(고종 27) 임진왜란 때 조선 의병 총사령관이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蘭室 金晩植, 1845~1922) 등이 지은 정자인데,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버린 것을 김만식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했다.

취가정(醉歌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거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마루로 되어있으며 정자 안에는 설주 송운회가 취가정(醉歌亭)이라고 쓴 현판과 〈취시가〉와 〈화답시〉 등 많은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에는 4개의 주련(柱聯)이 부착돼 있어 의병장 김덕령 장군과 석주 권필의 애끓는 사연이 녹아있다.

취가정(醉歌亭) 오르는 돌계단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 오르는 돌계단 [정성환 기자]

취가정(醉歌亭)이란 정자 이름은 조선 중기(선조~광해군) 때 송강 정철의 제자 시인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의 꿈속에 나타난 김덕령의 「취시가(醉時歌)」를 따서 취가정(醉歌亭)이라 했다.

권필은 꿈속에서 임진왜란 당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의병장 김덕령 장군(1567~1596)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한 맺힌 노래 〈취시가〉를 부르자, 권필은 꿈에서 들은 김덕령의 원통하고 외로운 마음의 원혼(魂)을 달래기 위해 〈화답시〉를 지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취시가 비’(忠壯公 金德齡 將軍 醉時歌 碑) [정성환 기자]

◆ 「취시가(醉時歌)」

「취시가(醉時歌)」는 조선 중기 정철(1536~1593)의 제자 석주 권필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총사령관으로서 큰 공을 세웠으나 이몽학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투옥되어 고문을 받아 생을 마감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을 읽는 꿈을 꾸고 난 뒤에 지은 시이다.

권필의 「석주집」에는 꿈에서 본 김덕령의 취시가의 뜻과 꿈에서 읽은 김덕령 장군의 취시가 원문, 잠에서 깬 뒤 서글픈 마음에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몽득일소책(夢得一小冊)

내김덕령시집야(乃金德齡詩集也)

기수일편왕취기가(基數一篇曰醉時歌)

여삼복득지(余三復得之)

“꿈속에 작은 책 하나를 얻었는데,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 번째 편이 〈취시가〉였는데,

내가 여러 번 반복해 읽어 뜻을 알게 되었다.

- 「석주집(石洲集)」 中 -

김덕령 장군의 「취시가」 와 석주 권필의 「화답시」 편액 [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의 「취시가」 와 석주 권필의 「화답시」 편액 [정성환 기자]

「취시가(醉時歌)」 - 충장공 김덕령 -

“취시가차곡무인문(醉詩歌此曲無人聞)

아불요취화월(我不要醉花月)

아불요수공훈(我不要樹功勳)

수공훈야시부운(樹功勳也是浮雲)

추화월야시부운(醉花月也是浮雲)

취시가무인지(醉時歌無人知)

아심지원장검봉명군(我心只願長劍奉明君).”

“취했을 때 노래하니 이 노래를 듣는 이 없구나.

나는 달과 꽃 사이에 취하기를 원치 않으며,

공훈을 세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꽃과 달 속에서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과 같도다.

취했을 때 노래하니 내 마음 알아줄 사람이 없구나.

다만 긴 칼을 잡고 어진 임금께 보은하기를 원하노라.”

〈취시가〉의 기본소재는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이었는데, 석주 ‘권필’이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분노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무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밝은 임금 받들고 싶다.”라는 구절은 반란군의 음모로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무죄를 말하지 않는 소인배 조정 대신들과 선조의 무능을 질타하며, 성군을 만나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한 맺힌 절규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화답시」 - 석주 권필 -

“장군석일파금과(將軍昔日把金戈)

장지중최나명하(壯志中摧奈命何)

지하영령무한한(地下英靈無限恨)

분명일곡취시가(分明一曲醉時歌).”

장군께서 옛날에 칼을 잡으시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인 것도 운명인 걸 어찌하랴.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을,

분명히 취했을 때 부른 한 곡조 노래구나.

◆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

석주(石洲) 권필(權韠)은 서울출생으로 본관은 안동, 호는 석주(石洲), 조선 중기(선조~광해군) 명망 있는 풍류 시인으로 송강 정철의 제자이다.

1587년(선조20) 19세 때 진사 초시와 복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임금(선조)에 대해 거슬리는 글자를 써넣어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권필은 선조와 광해군 때의 험난한 정치적 격동기를 겪으며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강화도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야인생활을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천일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그의 누님이 살던 장성으로 내려와 김덕령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해광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의 딸과 결혼했다.

광해군 때는 시문(詩文)으로 풍자를 잘하는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의로운 선비였으나 1612년 광해군의 비(유 씨)의 남동생 유희분 등 척족 세력의 부정부패를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비방한 죄로 감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해남으로 귀양 가는 도중 행인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다 장독이 퍼져 동대문 밖 민가에서 44세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선비였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영정/충장사 [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 영정/충장사 [정성환 기자]
충장사/충장공 김덕령 장군 사당 [정성환 기자]
충장사/충장공 김덕령 장군 사당 [정성환 기자]

◆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 때인 1594년 어머니 상중이지만 위기에 몰린 조선을 구하기 위해 상복을 갑옷으로 바꿔입고 의병을 일으켜 조선 의병장 총수로서 왜군을 격파하며 나라를 구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성품이 불량한 왕족의 서얼 출신 이몽학(李夢鶴, ?~1596)의 역모에 가담했다는 서얼 출신 한 현(韓 絢, ?~1596)의 무고로 투옥되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 의해 27일간 국문과 고문을 당했듯, "지혜는 제갈량에 견줄 만하고, 용맹은 관운장에 견줄 만하다”라며 민중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 역시 조선의 무능한 국왕 선조에 의해 옥에 갇혀 무릎과 정강이뼈가 아스러지는 고문을 당하다 1596년 8월 21일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신은 나라를 위해 친척을 작별하고 선영을 버리고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오히려 상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헛된 이름을 지녔기에 적도들이 신을 시기해 모함한 듯합니다.

7월 14일에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적도들을 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본진으로 돌아간 것 뿐이기에 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 「선조수정실록」 -

“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어머니 삼년상의 슬픔을 잊고 모자간의 정을 끊은 채 상복으로 바꿔 입고 칼을 차고 종군하였지만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 충성도 펴지 못하고 불효만 하였습니다. 죄가 이러하니 신은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 「선조수정실록」 -

이처럼 의병장 김덕령은 선조의 모진 국문에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우의정 정탁, 좌의정 김응남, 지중추부사 이정암 등이 김덕령을 변호하고 나섰지만, 소인배들이 판을 치는 조선 조정에서 선조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덕령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

이처럼 김덕령 의병장의 결백은 필요하지 않았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비겁함으로 백성의 신망을 잃어버렸던 선조는 민중으로부터 존경받았던 의병장 김덕령을 살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충효(忠孝)만을 생각했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매몰된 선조에 의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예감하고 유언을 하듯 원통한 마음을 「춘산곡」에 담아냈다.

「춘산곡」 시비/광주광역시 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춘산곡」 시비/광주광역시 사직공원 소재. 이 비는 광주광역시에서 1974년에 세우고 김용구가 썼다. [정성환 기자]

◆ 「춘산곡(春山曲)」

「춘산곡(春山曲)」 –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고초를 받고 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지은 「춘산곡(春山曲)」은 김덕령 의병장의 유언을 담아낸 한(恨)이 서린 시조이다. 〈춘산곡〉에 담긴 충장공 김덕령의 애통한 심정은 만백성의 슬픔이기도 했다.

김덕령 장군은 65년의 세월이 흐른 1661년(현종 2년) 신원이 복구되었고, 숙종 때에 이르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88년 정조 대왕은 김덕령 의병장을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다시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와 ‘정려비’를 하사하고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려 그의 넋을 영원히 기리도록 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광주시는 1975년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해 김덕령 장군의 위폐와 영정을 모시고 그의 충혼을 기리고 있다.

충장(忠壯)이란 뜻은 몸을 위태롭게 하여 임금을 받들었기에 충(忠)이라 하고, 무(武)에 능하고 몸가짐이 진중하기에 장(壯)이라 했다고 한다.

광주의 중심가 충장로(忠壯路)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 충장(忠壯)에서 유래한 도로명이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효 정신이 깃든 광주광역시 충장로는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군부 쿠데타세력의 권력침탈에 항거한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굴곡진 역사 속에 젊음과 낭만, 한(恨)이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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