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광주 환벽당을 찾아서...호남 누정문화(樓亭文化)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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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광주 환벽당을 찾아서...호남 누정문화(樓亭文化) '명소'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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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소재, 조선중기 문신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

조선 시대 호남 유학과 사림 문화를 꽃피운 원림 문화의 중심지로 푸르름이 사방에 가득한 명소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한동(증암천)안에 세 명승이라 하여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평가
환벽당(環碧堂)/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보존되어 오다가 2013년 11월 6일 환벽당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승격 지정됐다. [정성환 기자]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소재 환벽당(環碧堂)/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보존되어 오다가 2013년 11월 6일 환벽당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07호로 승격 지정됐다. [정성환 기자]
환벽당(環碧堂)으로 향하는 작은 문(협문) [정성환 기자]
환벽당(環碧堂)으로 향하는 작은 문(협문) [정성환 기자]
‘환벽당’ 앞 정원. 정원에는 작고 아담한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 근처에 사촌 김윤제의 초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정성환 기자]
‘환벽당’ 앞 정원. 정원에는 작고 아담한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 근처에 사촌 김윤제의 초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1)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는 조선 시대 최고의 석학들인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이 드나들던 곳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으며 풍류 문화의 극치를 이룬 곳이 있다. 이번 편은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세 명승이라 일컬어지는 '광주 환벽당' 이야기다. 


◆ 환벽당(環碧堂)

환벽당(環碧堂)은 조선시대 시가 문학과 별서 원림으로서 가치가 매우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樓亭文化)를 보여주는 곳이다.

환벽당(環碧堂)은 조선 중종 때 홍문관 교리와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무등산 자락인 광주호 상류 창계천(증암천) 언덕 위에 지은 별서(別墅) 원림(園林)으로, 창건 시기는 사촌 김윤제가 55세가 되던 155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환벽당(環碧堂)은 무등산을 배경으로 자연 풍광이 수려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 등 유명 유학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명승지로써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동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서쪽 2칸이 방이며 그 앞에 반 칸짜리 툇마루가 있는 팔작지붕의 별서 원림으로 호남의 대표적인 정자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효계곡의 물이 흐르는 환벽당(環碧堂) 주변의 창계천은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했다. 환벽(環碧)이란 푸르름이 사방으로 고리를 두른 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의미하는데, “무등산 주변이 온통 푸른 벽을 이루고 있다”라는 뜻으로 당호를 환벽당(環碧堂)이라 지었고,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벽간당’이라고도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다.

당호 ‘환벽당’은‘영천자 신잠’이 짓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정성환 기자]
당호 ‘환벽당’은‘영천자 신잠’이 짓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정성환 기자]
석천 임억령 시문 편액(좌). [정성환 기자]
석천 임억령 시문 편액(좌) / 조자이 시문 편액(우) [정성환 기자]
석천‘임억령’ 편액 [정성환 기자]
석천‘임억령’ 편액 [정성환 기자]
‘조자이’ 시문 편액 [정성환 기자]
‘조자이’ 시문 편액 [정성환 기자]

환벽당(環碧堂)이란 당호는 ‘영천자 신잠’이 짓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썼으며, 환벽당 내부의 벽에는 석천 임억령(林億齡)과 조자이(趙子以)의 시문이 새겨진 편액이 걸려있다. 환벽당 앞으로 펼쳐진 넓은 정원은 조그마한 연못의 흔적이 있는데 이 연못 주변에 사촌 김윤제의 초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환벽당(環碧堂)에서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250m 떨어진 곳에는 ‘식영정(息影亭)’이 있는데 ‘식영정’은 ‘사촌 김윤제’의 조카인 ‘김성원’이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어준 정자라고 한다. 환벽당 주인 김윤제와 식영정 주인 김성원은 창계천에 무지개다리(홍교)를 놓아 서로 왕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세월은 흘러 운치 있는 홍교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그 주변에 ‘충효교’가 놓여있다

환벽당(環碧堂)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이 드나들던 곳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으며 풍류 문화의 극치를 이룬 곳으로 그 주변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 마을, 소쇄공 양산보가 살았던 창암촌이 있다.

이 일대는 16세기 사화와 당쟁의 정치적 암흑기에 절의(節義)를 내세우다 당쟁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고향에 돌아와 누정(樓亭)을 무대로 누정시단(樓亭詩壇)을 형성하고, 호남 유학과 사림 문화를 꽃피운 호남시단(湖南詩壇)의 기상이 서린 곳으로 조선 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지로서 환벽당, 식영정(息影亭),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소쇄원(瀟灑園)과 고려말 공민왕 때의 충신 전신민이 지은 독수정(獨守亭) 등 10여 개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면앙 ‘송순’은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극찬하면서, 소쇄원(瀟灑園)과 식영정(息影亭), 환벽당(環碧堂)을 가리켜 한동(증암천)안에 세 명승이 있다고 하여 ‘일동지삼승(一洞支三勝)’이라 평가했다.


◆ 사촌 김윤제의 생애

환벽당(環碧堂)을 세운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사촌(沙村)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1528년(중종 23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 교리 겸 춘추관으로 벼슬길에 올라 홍문관 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며 평생을 서적 간행과 유학보급에 힘썼다.

1561년(명종 16)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이 주희의 『주자대전』의 중요한 문장을 발췌하여 만든 문집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최초로 간행했다.

김윤제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인물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과 서하 김성원(棲霞 金成遠)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1567~1596)과 풍암 김덕보(風巖 金德普, 1571~1627)가 그의 종조부(작은할아버지)이다.

사촌 김윤제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해 향리인 충효리에 환벽당(環碧堂)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1572년(선조 5)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증암천(창계천, 자미탄)의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깃든 곳이다. [정성환 기자]
증암천(창계천, 자미탄)의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깃든 곳이다. [정성환 기자]
증암천(창계천, 자미탄)의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깃든 곳이다. [정성환 기자]
증암천(창계천, 자미탄)의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깃든 곳이다. [정성환 기자]
쌍송(雙松)’과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 [정성환 기자]
쌍송(雙松)’과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 [정성환 기자]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 [정성환 기자]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 [정성환 기자]

◆ 조대쌍송(釣臺雙松)

환벽당(環碧堂) 아래 창계천에는 사촌 김윤제가 모든 시름을 놓고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釣臺)’와 그 옆에는 늙은 소나무 2그루(쌍송, 雙松)가 기울어져 있는데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은 이 풍광을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 중 제7영에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조대쌍송, 釣臺雙松)라 읊었다.

◆ 송강 정철의 생애

정철(鄭澈, 1536~1593)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송강(松江)이다. 인종의 귀인(후궁)이 그의 큰누이고, 둘째 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이유)의 부인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정철은 궁중에 출입할 수 있었고 같은 나이였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545년(10세) 을사사화 때 계림군의 외숙부인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큰형은 귀양 가는 도중에 생을 마감했으며 아버지는 유배당했다.

하루아침에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한 정철은 1549년(14세)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창평 지실 마을로 내려와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은 시작되고 환벽당(環碧堂)에는 정철에 관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정철이 어느 날 순천의 처가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형 ‘소’를 만나기 위해 환벽당 앞을 지나가던 중 창계천 용소(龍沼)에서 목욕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때 환벽당에서는 김윤제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창계천 조대(釣臺) 앞 용소(龍沼)에서 청룡 한 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다. 용소(龍沼)는 지금 충효교 상류 30m 지점에 있는 깊은 웅덩이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이상히 여겨 급히 그곳에 내려가 보니 목욕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소년이 송강 정철이다. 김윤제는 어린 정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가 매우 영특하고 비범한 소년임을 알게 된다.

당시 14세인 송강 정철은 10여 년 동안 환벽당(環碧堂)에서 유숙하며 김윤제의 가르침을 받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스승 김윤제의 외손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정철은 환벽당에 머물며 기대승, 김인후, 임억령 등 당대의 고명한 학자들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은 정철은 1561년(명종 16, 26세)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62년(명종 17, 27세)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78년(선조 11년, 43세)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낙향했으나 1580년(선조 13, 45세) 선조의 부름을 받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금강산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며 그 경치에 대한 감탄과 정감을 『관동별곡 關東別曲』에 담았다.

1583년(선조 16년, 48세) 정철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대사헌이 되었으나 1585년(50세)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지실 마을로 돌아와 4년 동안 가사 문학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1589년(54세) 우의정으로 발탁된 정철은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을 추국하는 수장이 되어 동인의 지도자 이발(1544~1589씨), 최영경(1529~1590), 정개청(1529~1590) 등 1000여 명의 동인을 처형하고 수백 명을 귀양 보내 선조의 총애를 받아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주도권을 잡은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하게 되는 데, 이 건저의 사건(建儲議 事件)으로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당하고 유배되어 호남 동인의 지식인을 몰살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1592년(선조 25, 57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난 선조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귀양 갔던 동‧서인들을 다시 등용하게 되는데, 이때 유배에서 풀려난 정철은 경기‧충청‧전라 3도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

1593년(58세) 정철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는데, 이때 정철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에서 왜군이 모두 철군했다는 거짓 문서를 올린다. 결국, 정철은 이 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비참한 생을 이어가다가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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