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구례 매천사를 찾아서②...우국충절의 본향, 매천 황현 생가와 역사공원
상태바
[문화역사 이야기] 구례 매천사를 찾아서②...우국충절의 본향, 매천 황현 생가와 역사공원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10.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화도 조약(21세), 임오군란(27세), 갑신정변(29세), 동학혁명(39세), 을사늑약(40세) 등 혼란한 시대를 기록으로 남기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초야의 선비로 격동의 시대를 거쳐 구한말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집필하고 2천여 편의 시 후세에 남겨

매천 역사공원, 매천 황현의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양시에서 조성한 공원...매천 황현을 기리기 위한 사당(영모제), 절명시가 새겨진 석비 등으로 조성
매천헌(梅川軒, 매천 황현 생가)/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0) =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로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함께한 우국지사 매천 항현 선생을 기리기 위한 매천사가(梅泉祠) 있다. 이번 이야기는 「우국충절(憂國忠節)의 본향 매천(梅川) 황현(黃玹) 선생을 찾아서」 [제2편]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의 생가와 역사공원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로 평가받는 매천 황현은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대한제국과 운명을 함께한 우국지사다.

 

◆ 매천(梅泉) 황현(黃玹) 생가와 구안실(苟安室)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서석마을)에 위치한 매천 황현 생가는 한말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1910)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황현은 31세 때인 1886년 동생 황원 일가와 함께 그가 태어난 광양 서석마을을 떠나 구례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작은 초가집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삿갓 모양의 일립정(一笠亭)을 짓고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또한, 주변에 선비의 절개와 의리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심고 그 곁에 조그마한 우물을 만들어 매천(梅泉)이라 이름 지어 자신의 아호로 삼고 처사의 삶을 살아가면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저술하고 1천여 수의 시를 지었다.

그가 기거하는 구안실(苟安室)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한 곳”이라는 뜻으로 매천 황현의 문학과 학문의 산실로 그는 이곳에서 학문과 시 창작에 몰두하며 1천여 수의 시를 대부분 이곳 만수동에서 지었다고 전한다.

특히 그는 자연을 대상으로 흥을 즐기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시(詩)보다는 매천 시문학의 특징인 역사적인 충절(忠節)의 인물과 사실을 주제로 한 시(詩)를 읊었다.

지금은 당시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구안실(苟安室)과 일립정(一笠亭), 매화샘(梅泉)을 복원해 매천 황현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절명시첩/문화재 제748호 [출처=네이버]
절명시첩/문화재 제748호 [출처=네이버]

◆ 절명시(絶命詩) 4수

『절명시(絶命詩)』 제1수

<절명시> 제1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죽음을 결심했으나 그러하지 못하고 경술국치를 당하고서야 순명(殉名)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亂離潦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今日眞成無可柰(금일진성무가내)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이나 죽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네

하지만 오늘만은 정녕 어찌할 수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절명시(絶命詩)』 제2수

<절명시> 제2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임금의 조칙이 없어졌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妖氣晻翳帝星移(요기엄예제성이)

久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누지)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琳琅一紙淚千絲(림랑일지루천사)

요사한 기운이 뒤덮어 나라가 망했으니​

대궐은 침침해지고 시간도 더디구나.

임금의 조칙도 지금부터 다시는 없을 것이니​

구슬 같은 눈물만 하염없구나

『절명시(絶命詩)』 제3수,

<절명시> 제3수는 지식인으로서 자책을 드러낸 마음이 담겨있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우리 세상 이미 잠기고 빠져버렸구나​

가을 등잔에 책을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

이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되기는 어렵기만 하구나

『절명시(絶命詩)』 제4수

<절명시> 제4수는 나의 죽음은 충(忠)이 아니라 인(仁)일 뿐, 송나라 충신 진동(陳東)을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황현의 마음이 담겨있다.

曾無支廈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일찍이 벼슬을 하지 않아 조금의 공적도 없으니

내 죽음 어진 마음뿐 충성은 아니네

내 죽음이 겨우 윤곡(尹穀)을 따를 뿐

당시 진동(陳東)을 따르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순국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퇴위 당하고 한일신협약(기유약조)을 통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운데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된다.

일제의 강압적인 을사늑약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치욕을 느꼈던 매천 황현은 56세 되던 해인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다, 매천은 식읍을 전패하고 삶을 마감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한 후 1910년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아편이 든 술잔을 들이킨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아 국가의 녹을 먹지 않았기에 매천은 스스로 죽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매천 황현은 조선 왕조가 망했어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에 분개하며 ‘지식인으로서 사람 구실 하기가 어렵다’라는 고뇌와 아픔을 가슴에 묻고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다.

다음날 아우 ‘황원’이 급히 달려와 할 말이 있는지 묻자, 황현은 웃으며 말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다만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죽은 것은 쉽지 않은가 보다. 독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입을 댔다 뗐다 했으니,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단 말인가.”

 

〈매천 황현이 가족에게 남긴 유서〉

“내가 죽어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다만, 나라가 선비를 길러온 지 오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을 것이니,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매천(梅泉)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며 선비로서 의(義)로운 죽음을 가슴에 않고 스르르 눈을 감으니 향년 56세였다.

암울한 시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절한 뛰어난 시인이자 역사가였으며 조선의 마지막 의로운 선비이자 애국지사였다.

매천(梅泉)이 순국하자 당시 경남일보 주필이던 장지연은 매천(梅泉)의 순절 소식과 함께 절명시(絶命詩) 4수를 신문 사설에 실었고, 만해 한용운은 곡황매천(哭黃梅泉)이란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를 표했다.

1962년 매천 황현을 기리기 위한 사당 매천사(梅泉祠)를 건립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충절의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매천 황현은 비록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초야의 선비였지만,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책임을 고뇌하고 스스로 죽음으로서 지성을 보여준 그의 사상과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과 교훈으로 다가온다.

매천 황현 생가 전경/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소재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생가 전경/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소재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선생 생가/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소재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생가 마을/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소재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생가 마을/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소재 [정성환 기자]
매천 역사공원 안내도 [정성환 기자]
매천 역사공원 안내도 [정성환 기자]
영모재(永慕齋)/황현 선생을 모시는 사당 [정성환 기자]
영모재(永慕齋)/황현 선생을 모시는 사당 [정성환 기자]
창의정(彰義亭)/매천 역사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창의정(彰義亭)/매천 역사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일대기를 새긴 비문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일대기를 새긴 비문. 붓과 책을 형상화해 경술국치와 순국에 대한 기록을 새긴 기념비 [정성환 기자]
절명시(絶命詩) 비 [정성환 기자]
절명시(絶命詩) 비 [정성환 기자]
문병란 시인의 매천송(梅川頌) 시비 [정성환 기자]
문병란 시인의 매천송(梅川頌) 시비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부부 합장묘와 가족묘 [정성환 기자]
매천 황현 부부 합장묘와 가족묘 [정성환 기자]

◆ 매천 역사공원

매천 역사공원은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나라가 망하자 죽음으로써 항거한 매천 황현의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양시에서 조성한 공원으로 주변에 황현과 그의 부친, 아들의 묘소와 황현을 기리기 위한 사당(영모제)이 세워져 있으며, 매천 황현의 일대기와 절명시가 새겨진 석비(石碑)가 조성됐다.

매천 황현은 근대화를 알리는 강화도 조약(1876. 21세)을 시작으로 임오군란(1882. 27세)과 갑신정변(1884. 29세)·동학혁명(1894. 39세)·을사늑약(1905, 40세) 등 혼란한 시대를 기록으로 남기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였다.

그는 평생 벼슬하지 않은 초야의 선비였지만, 조선 왕조 500년 역사의 수많은 선비 중 한 사람으로서 격동의 시대를 거쳐 망국으로 귀결된 구한말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집필하고 2천여 편의 시를 후세에 남겼다. 그리고 황현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 속에 자신의 책임을 물으며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조선 왕조와 운명을 같이하며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다.

목숨과 바꾼 지식인의 양심, 혼란한 시대를 기록으로 남긴 역사학자이자 끝까지 양심을 지키고자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물은 그의 삶과 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소중한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