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가사(歌辭) 문학의 산실 "담양 식영정(息影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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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이야기] 가사(歌辭) 문학의 산실 "담양 식영정(息影亭)"을 찾아서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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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亭子)라는 뜻으로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교훈 담겨져...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산실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공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이 시를 짓고 노래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곳

송강 정철, 1585년 담양 창평에 낙향 '식영정에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지어...'송강 문학의 산실' 이뤄

식영정엔 서하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등 정자가 있고, 별서 정원(別墅庭園)으로 유명한 소쇄원 있어..."관광객 발길 끊임없어"
식영정(息影亭)/대한민국 명승 제57호/담양 가사문학로(지곡리) 소재 [정성환 기자]
식영정(息影亭)/대한민국 명승 제57호/담양 가사문학로(지곡리)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5) = 전라남도 담양군에는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식영(息影)이란 존천리거인욕(尊天理去人慾). 즉,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조절하라”라는 인간다움의 교훈이 담겨있다. 이번 이야기는 조선시대 가사(歌辭) 문학의 산실인 담양 식영정에 얽혀있는 문화역사 이야기를 다뤄본다.

*가사(歌詞/歌辭)는 조선시대에서 시조와 함께 유행했던 문학 양식으로, 처음에 가사는 노래로 불렸고 양반 여자들 사이에 유행했다. (위키백과 참조)

식영정 편액 [정성환 기자]
식영정 편액 [정성환 기자]
노거송(老巨松)과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 [정성환 기자]
노거송(老巨松)과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 [정성환 기자]
식영정 오르는 계단 [정성환 기자]
식영정 오르는 계단 [정성환 기자]
식영정에서 바라본 광주호 [정성환 기자]
식영정에서 바라본 광주호 [정성환 기자]

 

◆ 식영정(息影亭)의 유래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명종 15) 서하당 김성원(金成遠,1525~1597))이 담양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자신의 장인이자 스승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2~1568)을 위해 창평의 성산에 지은 정면 두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부용당, 서하당과 함께 정자 원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영정으로 올라가는 계단 주변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식영정 정면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로 흐르는 자미탄(紫薇灘)이 보인다. 자미(紫薇)는 백일홍 또는 배롱나무의 별칭으로 자미탄(紫薇灘)이란 배롱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피어있는 개울가란 뜻이다. 식영정 뒤편으로는 〈성산별곡, 星山別曲〉 시비와 노거송, 배롱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식영정(息影亭)이란 이름은 1563년 중종과 명종 대의 문인 석천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오묘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는데,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가 수록된 『莊子』에서 유래한다. “옛날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끝없이 달려 도망갔다. 그러나 제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끝까지 그를 쫓아왔다. 그 사람은 자신의 달리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해 쉬지 않고 더욱더 빠르게 달렸으나 절대로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힘이 다해 죽고 말았다.”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그늘이 있는 곳에서 그림자를 쉬게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

햇빛을 피해 그늘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지듯, 번뇌로 가득 찬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면 인욕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세계’라 불렀다고 한다. 식영정은 바로 이러한 ‘식영 세계’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식영(息影)이란 정자 이름에는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 식영정의 주인 석천 임억령

석천 임억령(1496~1568)은 조선 시대 시문의 대가로 눌재 박상의 제자였으며 사위 김성원에게 시와 글을 가르쳤다. 1545년(명종 즉위년) 금산군수로 재임할 당시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동생 임백령이 윤원형의 소윤 일파에 가담해 대윤 일파를 탄압하는 데 앞장서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은거했다.

이후 담양 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하고, 1560년 사위 김성원이 지어준 식영정(息影亭)에 머물면서 도학을 강론하고 시를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생활을 했다.

서하당(棲霞堂). ‘서하당’은 서하당 김성원이 거처했던 곳으로 1997년 담양군에서 복원했다. [정성환 기자]
서하당(棲霞堂). ‘서하당’은 서하당 김성원이 거처했던 곳으로 1997년 담양군에서 복원했다. [정성환 기자]
부용당(芙蓉堂)‘부용당’은 서하당 김성원이 거처하던 누각으로 원래 연못이 있었던 곳인데1972년에 새로 복원되었다.
부용당(芙蓉堂). ‘부용당’은 서하당 김성원이 거처하던 누각으로 원래 연못이 있었던 곳인데1972년에 새로 복원되었다. [정성환 기자]
장서각(藏書閣). 장서각(藏書閣)은 송강 정철의 문집과 정철의 아들 정홍명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1973년 건립했다. 지금은 목판을 가사 문학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성환 기자]
장서각(藏書閣). 장서각(藏書閣)은 송강 정철의 문집과 정철의 아들 정홍명의 문집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1973년 건립했다. 지금은 목판을 가사 문학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정성환 기자]

 

◆ 서하당 김성원과 모후산

서하당 김성원은 1525년 석저촌(충효동)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당숙인 사촌 김윤제에게 글을 배우고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34세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풍류를 즐겼으며 특히 거문고의 대가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6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복 현감으로 제수되자 병기와 군량 등 의병 봉기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해 조카인 김덕령 형제가 의병을 일으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김덕령 의병장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돼 고문을 받아 옥사하자 세상을 한탄하며 은둔했다. 그러나 73세 되던 해인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화순군 동복면 뒷산(모후산, 성모 산성)으로 피신하던 중 왜적을 만나 노모를 보호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모호산(지금은 모후산)이라 불렀고 마을 이름도 모호촌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서하당과 부용당 전경 [정성환 기자]
서하당과 부용당 전경 [정성환 기자]
부용당에서 식영정으로 오르는 계단 [정성환 기자]
부용당에서 식영정으로 오르는 계단 [정성환 기자]

 

◆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과 일동삼승(一洞三勝)

식영정(息影亭)은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공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이 드나들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짓고 노래하며 당대를 풍미했던 곳이다.

특히 석천 임억령과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을 일컬어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 또는 ‘성산사선(星山四仙)’이라고 불렸다.

이들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은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면서 자미탄, 부용당, 서석대 등 주변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해 각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어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다.

이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이 훗날 정철이 『성산별곡』을 노래한 밑바탕이 된다.

또한, 식영정은 환벽당·소쇄원과 함께 일동(一洞)의 삼승(三勝)이라 했다.

동(洞)은 동천(洞天)을 의미하며, 동천이란 산수가 빼어난 아름다운 경승지를 뜻하는데.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을 상징하는 지명 중에서 특별히 수려한 원림 정자 세 곳을 선정하여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 했다고 한다.

과거에는 창계천 주변이 배롱나무의 붉은 꽃으로 물든 여울이 아름답게 펼쳐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자미탄 일대가 광주호에 잠기면서 그때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탑 [정성환 기자]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탑 [정성환 기자]
『성산별곡』이 새겨진 석비/식영정 소재 [정성환 기자]
『성산별곡』이 새겨진 석비/식영정 소재 [정성환 기자]

 

◆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서울에서 태어나 26세인 1562년 과거에 장원급제해 중앙정계에 출사했다. 1585년 동인의 탄핵을 받아 창평으로 낙향해 식영정에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한시와 가사, 단가를 지으며 송강 문학의 산실을 이뤘다.

이때 지은 『성산별곡』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풍류객 김성원이 세운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을 중심으로 성산(星山)의 아름다운 사계절의 경치를 벗 삼아 은둔생활을 하던 김성원(1525~1597)을 흠모하고 예찬하며 지은 가사이다. 성산별곡은 서사(緖詞), 춘사(春詞), 하사(夏詞), 추사(秋詞), 동사(冬詞), 결사(結詞)로 전체 6단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실려있다.

1단은 서하당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을, 2~5단은 계절 변화에 따른 아름다운 풍경을, 6단은 자연을 벗 삼아 술 마시고 거문고 타는 진선(眞仙) 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어떤 지나가는 손님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들으시오.

인생 세간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당신은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고요하고 쓸쓸한 산중에 들어가 나오시지 않는가.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 『星山別曲』 中 -

식영정(息影亭)은 송강 정철의 가사와 단가, 한시 작품을 많이 남긴 곳으로 조선 중기 송강 문학의 산실을 이룬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가사(歌辭)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생겨난 우리 문학의 한 형식으로 시조와 함께 양반, 평민, 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부른 노래를 뜻하며, 가사 문학은 담양 지방의 정자 원림, 특히 이곳 식영정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광주호 상류 창계천 주변에는 식영정을 비롯해 서하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등 많은 정자가 있고, 별서 정원(別墅庭園)으로 유명한 소쇄원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조선 시대 가사 문학의 산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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