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을 기리며'⑤]···대일 전쟁 참여 그리고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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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을 기리며'⑤]···대일 전쟁 참여 그리고 해방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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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미국·영국 등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대일 항전에 참여

1943년 8월 조선의용대 6명과 한국광복군 8명으로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 조직 마얀마(버마) 전선서 영국군과 연합작전 수행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미국과 소련 양국 북위 38도 선 경계로 남북 분할 점령 '참극 현실로'
약산 김원봉(1898~1958) [사진=정성환 기자]
약산 김원봉(1898~1958)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8) =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도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로 '제5편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대일 전쟁 참여 그리고 해방'이다. 6편 민족의 분열,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7편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은 추후 연재된다. 

버마(미얀마) 전선의 ‘인면전구공작대’ [출처=네이버]
버마(미얀마) 전선의 ‘인면전구공작대’. 인면구공작대는 1943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연합국인 영국과 공동작전을 전개하며 대일 항전을 펼친 유일한 한국광복군 소속부대다. 인면전구공작대는 인도 델리와 콜카타에서 훈련을 받은 후 영국군에 배속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임팔 전선에 투입되었다. [사진 출처=네이버]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지역을 표시한 지도 [사진 출처=네이버]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지역을 표시한 지도 [사진 출처=네이버]

◆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

1942년 10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의 통합 의정원에 참여하면서 명실상부한 좌우 합작 통일 임시정부의 결실을 보게 되었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미국·영국 등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며 대일 항전에 참여한다.

1943년 8월 말, 조선의용대원 6명을 포함한 한국광복군 8명으로 조직된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를 미얀마(버마) 전선에 파견해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했다(‘인면전구공작대’의 ‘인’은 인도, ‘면’은 미얀마를 가리킨다)

‘인면전구공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한민국 25년(1943년) 8월 처음으로 파견된 지역인 델리를 비롯해 콜카타(선전방송, 정보 수집 활동). 임팔 전투, 만달레이 전투, 랑군 전투에서 활약했다.

‘인면전구공작대’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와 일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 신문, 문서번역 등 심리전에 투입돼 많은 성과를 올렸다.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미얀마(버마) 파견은 임시정부와 연합국의 대표적인 공동 항일 작전으로 민족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김원봉은 ‘인면전구공작대’와 영국군의 연합작전 공로로 영국 여왕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세계정세는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시작된 세계 2차대전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공격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어 미·영·소 등 연합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패하고, 1943년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 패배하면서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일본은 서서히 패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말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식민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이 무렵 일본의 패망과 연합국의 승리, 그리고 꿈에 그리던 조선의 해방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을 직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좌우 독립세력을 통합한 임시정부로 개편해 한독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재선하고, 민혁당의 김규식을 부주석, 그 밖의 국무위원 7개의 부장 중 김원봉을 한국광복군을 지휘하는 군무부장(현,국방부장관)으로 선출한다.

명실상부한 좌·우 대동단결의 통합된 임시정부의 결실을 보게 된 군무부장 김원봉은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하며 중국군에 이어 영국·미국 등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강화해나간다.

독수리 작전 설명 표지/함평 김철 기념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독수리 작전 설명 표지/함평 김철 기념관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전훈련에 여념이 없는 광복군 대원들(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출처=네이버]
무전훈련에 여념이 없는 광복군 대원들(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출처=네이버]
8월 7일 독수리 작전의 최종합의 [사진 출처=네이버]
8월 7일 독수리 작전의 최종합의 [사진 출처=네이버]
한국광복군의 독수리 작전 훈련 모습이 적힌 백범일지 [사진 출처=네이버]
한국광복군의 독수리 작전 훈련 모습이 적힌 백범일지 [사진 출처=네이버]
국내정진군(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출처=네이버]
국내정진군(독립기념관 소장).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서울 진출을 위해 국내정진군을 8월 16일 출발시켜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저항을 받아 서울 진출에 실패하고 8월 19일 중국으로 귀환했다.[사진 출처=네이버 ]

◆ 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독수리작전)’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군무부장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위해 미국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해 나가고,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도 일본과의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활용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원봉은 1945년 2월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연합해 ‘국내진공작전(독수리작전)’을 수립하고 8월 7일 중국 시안(서안)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미국 OSS 국장 도노반은 독수리 작전 실행을 최종합의한다.

독수리작전에 투입될 한국광복군 요원들의 국내 침투 지역도 [사진 출처=네이버]
독수리작전에 투입될 한국광복군 요원들의 국내 침투 지역도 [사진 출처=네이버]

국내진공작전(독수리작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5년 8월 18일 미국군과 연합해 국내에 침투한다는 작전이다.

이 작전의 계획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의 특수훈련을 받은 45명의 요원을 5개 조로 편성해 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비밀리에 침투시켜 해당 지역의 지형과 교통, 일본군 군사시설 등 대일전략첩보를 수집하고 나아가 유격 활동, 민중 봉기 등 일본군의 후방 교란 활동을 전개해 연합국의 한반도 상륙 시 기습 공격한다는 것으로, 이 작전의 목표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해 전승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해서 한국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해 한반도 진입을 서둘렀다. 영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직접 파리를 점령했듯이 임시정부도 국내정진군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OSS 독수리 작전 훈련과정 중 1기생 38명이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2기생이 훈련을 받으려 하는 과정에서 두 번의 원자폭탄 공격을 받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이 작전은 안타깝게 실현되지 못했으나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광복군 지도부는 즉시 국내정진군을 편성해 국내 진입작전을 개시했다.

1945년 8월 18일 이범석 지대장을 비롯한 국내정진군이 중국 시안을 출발해 중국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서울 진입작전에 실패하고 중국 산동성으로 되돌아오면서 한반도 진입작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한반도 강점 이래 대한민국 국군이 처음으로 우리 땅에 발을 내디딘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처럼 해방된 조국에 가장 먼저 국내에 진입한 광복군 국내정진군의 활약은 임시정부가 전개한 독립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귀국 소감을 밝힌 김원봉(1945,12.3)/의열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귀국 소감을 밝힌 김원봉(1945,12.3). 미·소 공동위원회 환영 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환국 직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1945.10)/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환국 직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1945.10)/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 뒤쪽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김원봉이다./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 뒤쪽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김원봉이다./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 해방의 기쁨과 아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은 충칭 시내를 광란의 축제 분위기로 만들었으나 김구와 김원봉은 해방의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국내 진공 작전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일본의 항복을 개탄하며 그때의 상황을 <백범일지>에 남겼다.

“참으로 안타깝다. 일본이 조금만 늦게 항복했더라면…….”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했던 김구와 김원봉의 꿈은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산산이 무너지고 만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미국과 소련 양국은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 점령한다는 방송이 충칭까지 날아들었다.

김구와 김원봉이 우려했던 참극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마자 소련군이 만주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곧바로 평양을 점령하고 사령부를 설치하자 이에 놀란 미군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남한을 점령하고 미 군정청을 설치한다.

해방된 국내 정치 판도는 불확실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김일성 등은 소련군과 함께 9월 중순 입북하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1945년 10월 16일 맥아더 전용기를 타고 화려하게 귀국한다. 그러나 임정 정부 요원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 군정 당국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미 군정은 임시정부 요원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허용했다.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 또한 무장해제 된 체 쓸쓸히 귀국한다.

1948년 11월 상하이에 미 수송기 한 대가 도착했다.

그 비행기에는 15명이 탈 수 있었기 때문에 1945년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들이 제1진으로 귀국길에 오르고, 김원봉은 1945년 12월 2일 제2진으로 귀국해 12월 3일 귀국 소감을 밝힌다.

“금 후 정치는 인민을 행복스럽게, 자유스럽게 하기에 힘쓸 것은 물론이다.

오는 도중에 발을 벗고 남루한 의복을 입은 동포를 보니 잔혹한 일본 침략 정치하에서 얼마나 신음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해외에서 자유스럽게 지내 온 우리가 오히려 편안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해외에서 28년간 풍상을 다 겪으며 투쟁하여 오던 동지가 많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가 환국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감회가 착종(錯綜)해 목을 메이게 합니다.”

[김원봉의 귀국 소감 : 『동아일보』 1945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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