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을 기리며'④]···최초 한인 군사조직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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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을 기리며'④]···최초 한인 군사조직 '조선의용대'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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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서 일본군에 폭탄 투척...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즉사, 일본의 정부 요인들 중상

윤봉길 의거 계기로 김원봉은 1938년 중국 한커우(우한)에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 창설

조선의용대, 일제 요인 암살, 항일단체와의 제휴,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획득 등 전개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 일어나자 일제에 항거했던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들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해방된 조국서 포화 속으로 산화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1898~ 1958).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1898~ 1958).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7) =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도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로 제4편 중국에서 결성된 최초 한인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이다. 마지막으로 제5편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 편은 추후 연재된다.

밀양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의 생가 밀집 지역)/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밀양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의 생가 밀집 지역)/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 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 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만주벌판에서의 한·중 연합작전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많은 희생을 치렀던 한국의 독립군들은 만주로 이동해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를 결성해 대일항쟁을 전개하지만, 1925년 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군벌 장작림(장꿔린)과 일본의 미스야 협약으로 독립군의 활동은 위축된다.

이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독립군의 통합이 논의되고 민족유일당 운동의 영향을 받아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통합이 된다.

1931년 9월 일본군은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 소행이라고 몰아붙여 만주를 침략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괴뢰 만주국을 수립해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만주사변으로 중국 내 반일 감정은 효율적인 일제와의 항전을 위해 한·중 연합군이 형성된다.

3부 통합 결과 국민부 산하 정당으로 조선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이 결성되고, 혁신의회 산하 정당으로 한국독립과 한국독립군이 조직되어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남만주 일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홍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북만주 일대의 중국 호로군과 연합부대를 편성해 쌍성보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현대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한국독립군 사령관 지청천은 백범 김구가 있는 중국 본토로 이동하고, 남만주에서 제2의 홍범도라 불리며 치열한 독립투쟁을 펼치던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1934년 밀정(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일본군에 포위돼 치열한 전투 끝에 순국한다. 이로써 만주지역에서의 항일 독립투쟁의 역사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 무렵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을 일본으로 보내 천황암살을 시도했고, 1932년 4월 애국단원 윤봉길이 일본 천황 생일 기념식이 열린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본의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일본의 정부 요인들이 중상을 입었다.

이처럼 한국독립군들의 활약은 조선인을 일본인의 앞잡이 정도로 생각해 온 중국 민중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특히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한국동포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줘 “중국과 조선은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쳐야 한다”라는 분위기가 중국 민중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인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침체의 늪에 빠진 임시정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다.

1920년대 중국 정부로부터 멸시와 푸대접을 받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총통이던 장제스가 “중국군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며 임시정부 김구를 향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한국의 독립군들은 중국 뤄양 군관학교에 입학해 고급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1938년 의열단장 김원봉은 중국 한커우(우한)에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인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와 협력

1929년 의열단이 분열된 이후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을 결성하고, 1930년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해 조선 청년들의 간부교육을 육성했다.

레닌주의 정치학교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만주로 이동해 항일전쟁을 펼쳤고 대부분은 국내로 잠입해 노동자 파업투쟁, 야학과 강연회, 학생들의 동맹휴학, 항일 시위운동을 주도하며 국내 대중 운동의 리더로 활동한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인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던 김원봉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으로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장제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손을 잡고 그들과 힘을 합치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중국 북방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장제스의 북벌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는 중국 군벌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북벌 전쟁이 장제스의 승리로 끝나자 장제스는 김원봉의 사회주의자와 중국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김원봉은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장제스와 손을 잡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고 장제스 국민당과 손을 잡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 생각했다.

김원봉은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세웠던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포기하고 장제스와 손을 잡기 위해 난징으로 향했다. 진보주의자인 김원봉이 이처럼 반공주의자 장제스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중국공산당 편을 들지 않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김원봉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장제스는 김원봉이 이끄는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의 능력을 북벌 전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고, 의열단의 애국심을 깊이 존경했기에 의열단과 국민당 정부와의 합작이 순조롭게 이뤄진 것이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장소(낭징 천녕사)/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장소(낭징 천녕사)/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장제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1932년 10월 난징(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한다.

이 학교의 설립목표는 한국의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에 있었다.

교육내용은 군사 정치학·유격전·기습·파괴 등 특수공작에 필요한 교육이었으며 이를 통해 125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며 1935년까지 운영되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1904~1944)와 1942년 타이항산 전투의 영웅 독립투사 윤세주(1900~1942) 등이 제1기 졸업생이다.

졸업생들은 국내와 만주로 파견되어 일제 요인 암살, 항일단체와의 제휴, 노동 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획득 등을 전개했다.

◆ 민족유일당 ‘민족혁명당’ 창당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일본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침략은 더욱 거세져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에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국 본토로 이동해 각 정당의 통일 움직임이 전개된 가운데 김원봉은 흩어져 있는 독립단체를 하나의 당으로 모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원봉은 당시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를 만나 일본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각 단체가 힘을 한군데로 모아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김원봉을 신뢰할 수 없었던 김구는 “단체의 통일은 좋으나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그런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

결국,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단체가 김원봉의 노력에 호흥하고 나섰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중국 관내 독립 운동단체인 한국독립당(조소앙), 신한독립당(지청천), 조선혁명당(최동오), 대한독립당(김규식), 의열단(김원봉)의 대표가 모여 민족유일당인 〈민족혁명당=민혁당〉을 창당하자, 상해임시정부 김구는 민족혁명당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국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민혁당 창당 후 두 달 만에 김원봉의 사회주의 계열이 민혁당 당권을 장악하자 조소앙과 지청천 등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결코 서로 함께할 수 없다”라며 김구와 함께 193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정당인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고, 조소앙과 지청천이 민혁당을 탈당하자 김원봉은 민혁당을 조선 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한다.

1937년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로 일본의 침략과 탄압은 한층 더 강화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면서 국민당 정부 장제스를 따라 충칭과 우한으로 이동하고, 김원봉 역시 장제스를 따라 우한으로 이동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표지/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표지/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 10일)/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 10일)/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39년 10월 10일)/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39년 10월 10일)/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성립 2주년 기념식 사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성립 2주년 기념식 사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여성 대원들/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여성 대원들/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 조선의용대 창설

중국의 장제스 국민당 군대는 상하이와 난징을 빼앗기고 충칭과 우한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중국의 운명을 돌파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손을 잡고 힘을 모아 일본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중국으로 건너와 반일 활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국과 연합작전을 펼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김원봉은 이를 기회로 삼아 통일된 군대를 갖고 싶었다.

김원봉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청년들에게 항일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고 청년들은 김원봉에게 몰려들었다. 이에 큰 힘을 얻은 김원봉은 김구를 찾아가<조선의용대> 창설을 제안한다. 김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싫어했다. 김원봉과 힘을 합쳐 군대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원봉은 단독으로 무장 군대를 조직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38년 중국의 임시 수도 한커우(우한)에 도착한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총대장이 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로써 핵심 대원은 모두 실전과 이론에 능숙한 엘리트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은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통해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1920년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그 명맥이 끊겼던 항일무장투쟁의 제기를 선언한 것이었다.

〈조선의용대〉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째, 중국군과 어깨를 같이해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고,

둘째, 2천만 조선 민족에게 호소해 전 민족적 항일 혁명을 일으켜 조선 민족이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지원을 받아 힘을 키우고 나아가 만주를 정복하고 국내로 진공할 독립군이 되고자 했다.

중국 관내에서 100여 명의 소규모로 결성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유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많았다. 조선의용대는 무력으로 투쟁하는 것보다 선전 활동을 위주로 전개해 나갔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해 중국군과 의사소통이 능수능란했고, 오랜 식민지 생활로 일본인들의 생리를 잘 파악했기에 유창한 일본어로 선전문을 써서 살포하고 적진을 교란하는 선전 활동이 가능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중국군이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일본군의 정보 수집, 선전, 후방 교란 등 비밀작전에 투입되어 중국군의 대일 항전을 지원하는 선전공작에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이 무렵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임시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임시정부의 김구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도 충칭으로 옮겼다.

임시정부와 각각의 독립단체들이 충칭으로 모이자 김구는 김원봉과 합작을 하기로 한다.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과는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김구의 태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김원봉과 김구의 노력으로 1939년 8월 7개의 당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었지만, 당 노선이 서로 달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한국 독립당의 김구와 합작에 실패한 김원봉은 안으로는 조선의용대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었고, 밖으로는 한국 독립당 등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 그의 지도력이 큰 시련에 부닥치게 된다.

1940년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중국을 점령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군의 공격이 느슨해져 전투는 소강상태였고, 장제스 정부 또한 충칭에 머물며 대일 항전에 미온적이어서 큰 전투는 어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이에 윤세주 등 〈조선의용대〉핵심참모들이 대일전투가 치열한 화북지대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자고 제안하자 김원봉은 이를 승인한다.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인 윤세주 등은 중국공산당 근거지가 있는 화북지대(태항산)로 이동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중국공산당(팔로군)과 함께 대일 무장투쟁을 이어나갔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 소속 대원들은 충칭에 머물게 된다.

조선의용대 전시물/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의용대 전시물/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한국광복군 창설 기념(1940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밀양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밀양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임시정부에 참여한 김원봉

충칭에 남아있던 김원봉은 화북지대로 간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의해 회유된다면 화북지대는 공산당 천지가 될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조선의용대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자주 독립부대로써 중국의 한 당파가 아니므로 김원봉은 화북지대 조선의용대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독립운동의 중심이 연합국과 직접 소통하는 충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의용대〉가 팔로군에 흡수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김원봉은 화북지대로 간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포섭당할 것을 우려해 의용대원들의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김원봉은 중국공산당 대표인 저우언라이(주은래)에게 대일 항전이 치열한 화북지대로 가겠다고 신청한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움직일 때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김원봉이 화북지대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김원봉을 자본주의자, 기회주의자, 영웅주의자로 불신했기 때문이고, 김원봉이 화북지대로 간다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지휘권을 그들이 믿고 있던 김무정(공산주의 항일운동가)이 장악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원들이 이탈하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중국 국민당 지구로 철수시킬 방안을 마련하려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김원봉의 화북지대 조선의용대 철수는 실패하고 만다.

김원봉은 참으로 불행했다. 같은 독립군 진영에서도 보수파 쪽에서는 사회주의자로 몰았고, 진보파 쪽에서는 민족주의자라고 몰아갔기 때문이다.

김구와의 합작 실패가 그랬고, 국외에서도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만 했으니 김원봉에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결국, 김원봉은 김구와 지청천의 권유로 1942년 조선의용대 본부 요원과 함께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 지대장으로 활약한다. 김원봉의 나이 45세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공산주의자 김두봉과 김무정에게 흡수돼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고 임시정부와 김원봉과는 인연을 끊게 된다.

해방된 이후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김두봉 등 ‘조선의용군’은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의 주력부대가 되고, 민족주의의 이념을 가진 ‘한국광복군’은 남한의 ‘국군’으로 편입된다.

그리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이념의 잣대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해방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자 일제에 항거했던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들은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에서 포화 속으로 산화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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