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이야기5] 정약용의 애민정신...1표 2서(一表二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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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이야기5] 정약용의 애민정신...1표 2서(一表二書)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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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愛民)의 개혁 철학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에 담아내...
경세유표, 근본적인 법과 제도개혁의 청사진 제시
목민심서, 목민관이 지켜야 할 경세론(經世論) 대표
흠흠신서, 재판관이 제대로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법제서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2]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 시대 천재 실학자로 칭송받은 『다산 정약용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서』 △제5편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다. 1~5편에 이어 제6편 '18년 만의 귀향...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는 이번 이야기의 마지막 편으로 다음주 월요일 연재된다. 

 

◆ 정약용의 애민정신 1표 2서(一表二書)

다산박물관/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소재. 다산박물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로 선정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과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 생활 18년의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의 공간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다산박물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다산박물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다산박물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다산박물관/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정약전의 죽음

정약용은 18년의 오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하늘이 나에게 겨를을 주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다”라고 하며 다산초당을 가꾸면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책을 읽고 쓰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서러움과 고통을 이겨나간다.

그러나 둘째 형인 정약전은 1801년(순조 1) 흑산도로 유배된 후 풀려나지 못한 채 16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직접 조사하고, 채집하여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 玆山魚譜>를 남긴 채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에서 각각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만날 수는 없었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토론을 나누던 다정하고 우애가 깊은 형제였다. 정약용은 형의 부음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친구처럼 대하고 사랑했던 소중한 형을 가슴에 묻는다.

 

◆ 정약용의 애민정신과 실학사상

정약용은 1808년부터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불리는 18인의 유능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학문에 몰두한다. 그는 정치의 개혁과 지방행정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공평한 분배, 노비제 폐지 등 당시 사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개혁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서양의 합리주의적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유형원과 이익의 중농주의적 학풍과 박지원의 중상주의적 학풍을 계승해 조선의 실학을 차근차근 완성해나간다.

정약용은 제자들에게 생업에 힘써 생활기반을 확보하고, 학문에 힘써 인격을 함양하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당시 양반이란 신분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생활고에 시달린 조선 선비들의 생활 태도를 비판한 것으로, 현실을 중시하는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정약용은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선진유학을 연구해 232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 연구서를 저술한다.

정약용은 논어의 글귀인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의 해석에 “학(學)이란 알도록 해주는 일이요, 습(習)이란 행하는 일(學所以知也 習所以行也)”이니 학이시습(學而時習)이란 앎과 행함을 함께 실천해야 한다는 새로운 해석을 편다.

이것은 당시 유학자들이 선진유학자들의 경전해석을 잘못해 온 세상에 화를 끼치고 후세에까지 해를 미친다고 판단한 정약용의 새로운 경전해석의 이정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경전의 뜻이 밝혀진 뒤에야 도(道)에 이르고, 도(道)를 얻은 뒤에야 심(心)이 바르게 되고 심(心)이 바르게 되어야 덕(德)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고, 배워서 알게 되면 그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삶의 가치가 이룩된다는 정약용의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정약용의 가르침은 형이상학적인 한·당 경학과 훈고학의 전통적 유교 관념에서 벗어나 양명학과 고증학에 입각한 보다 더 현실적이고 개혁적 학문인 실학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지(知)와 행(行)을 함께 진행 시키는 일(知行兼進), 실행과 실천이 없는 어떤 논리도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고, 그의 그러한 생각이 선진유학을 연구한 경전해석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러한 정약용의 사상은 명·청대의 실증적 고적연구의 학풍인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지향한 개혁적인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실학사상으로 나타난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를 한탄하며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후세에 남긴다.

그의 저서는 사람 사는 세상이었고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철학이었다. 정약용은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온갖 불법으로 재물을 탐하는 지방 수령과 아전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처참한 삶을 지켜보면서, 무너져가는 조선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 애민(愛民)을 위한 자신의 개혁 철학을 1표 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에 담아낸다.

 

경세유표/강진 다산박물관 전시실(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경세유표/강진 다산박물관 전시실(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 경세유표(經世遺表)

1817년(56세, 순조 17)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백성이 힘들어하는 현실을 보고 느끼고 냉철히 분석해 일표이서(一表二書) 중 첫 번째 작품인 〈경세유표 經世遺表〉에 자신의 철학을 써 내려 간다.

〈경세유표〉의 원제목은 〈방례초본 邦禮草本〉이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법(法)보다 예(禮)를 중시한 성리학자였기에 “방례(邦禮)가 국법(國法)보다 우선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초본(草本)이란 단어에는 비록 자신이 쓴 기록이지만 앞으로 수정과 보완이 더 필요할 것이라는 정약용의 겸손이 담겨있다고 한다.

또한, 정약용은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경세(經世)라 했다. 자신은 죄를 짓고 유배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정책개혁안을 제출할 자격이 없었기에 자신의 철학을 유언으로 남겨 그가 죽은 뒤에라도 그의 철학이 국가정책에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표(表) 앞에 유(遺)를 넣어 책의 이름을 〈經世遺表〉라 했다고 한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열두 살 어린 순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왕실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왕의 권한과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삼정문란(三政紊亂, 田政 軍政 還政)으로 가혹한 수탈을 당한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정약용은 “머리털 하나라도 썩지 않은 분야가 없다. 그런 썩은 나라를 당장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며 근본적인 법과 제도개혁의 청사진을 〈경제유표〉에 담아낸 것이다.

이것은 무너져가는 조선에 대한 통탄과 분노의 경고였으며 백성을 향한 처절한 사랑의 몸부림이었다.

정약용은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해 관제·토지·부세 제도 등을 개혁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로운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경세유표〉에 담아 조목조목 써 내려 간다.

그것은 그가 정조와 함께 꿈꿨던 백성을 위한 나라, 새로운 조선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목민심서/강진 다산박물관 소재(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목민심서/강진 다산박물관 소재(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년(57세, 순조 18년)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면서 지방관리들의 폭정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느끼면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경세론(經世論)을 대표하는 〈牧民心書〉에 담아낸다.

목민(牧民)이란 두 글자에는 백성을 보살피고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목민관의 의무가 담겨있고, 심서(心書)란 두 글자에는 백성들을 편하게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유배 생활을 한 죄인의 몸이라 몸소 실행할 수 없는 정약용의 애틋한 마음과 비애가 담겨있다.

1818(57세)년에 완성된 〈牧民心書〉에는 정약용의 한(恨)과 서러움이 절실하게 담겨있으며,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고, 목민관으로 임명될 때부터 마칠 때까지 목민관으로서 갖춰야 할 자세와 지침들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청렴과 공정으로 집약된다.

정약용은 “목민관은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먹고살게 하는 일을 먼저하고, 그 뒤에 교화시키는 일을 해야 하며, 교화시킨 뒤에야 학문을 닦게 해야 한다”라고 하며, 공직자들이 먼저 수양하고 청렴한 생활과 마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때 세상이 바르게 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토로한 것이다.

 

흠흠신서/다산박물관 전시실(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흠흠신서/다산박물관 전시실(영인본). [사진=정성환 기자]

◆ 흠흠신서(欽欽新書)

1819년(58세) 정약용은 형사 사건에서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재판관이 제대로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법제서인 〈흠흠신서 欽欽新書〉를 쓰게 된다.

〈欽欽新書〉의 흠흠(欽欽)이란 중국 고전 서경(書經)의 흠재흠재(欽哉欽哉)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람이 하늘의 권한을 대신해 사형도 시키고 징역도 살리는데, 함부로 처리해서는 안 되고, 사건을 맡은 수령은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심 없이 일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공경스러울 흠(欽)’ 자를 반복 사용해 책 제목을 〈欽欽新書〉라 했다.

이 책의 서문은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내고 또 죽이니 인명은 하늘에 매여 있다. 살려야 할 사람은 죽이고, 죽여야 할 사람은 살리고서도 태연하고, 비참함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도 구제할 줄 모르니 화근이 깊어진다.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이 형을 다스리는 근본이다”라는 충고로 끝을 맺는다.

정약용은 수사와 재판의 기본정신이 경(敬)과 애(哀)에 있다고 했으며, 사람의 목숨과 신체의 자유를 너무나도 소중히 여겼다.

어떤 흉악범도 인간인 이상 공경스럽게 대해 수사하고 재판해야 하며, 아무리 악독한 범죄자도 가련하고 불쌍한 생각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정약용이 〈欽欽新書〉에 담은 판결 철학과 원칙은 정의와 공정이었다.

정약용이 말한 공정이란, 힘없고, 돈 없고, 그런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좀 더 신중히 대해야 하고, 만약에 법을 어겼다고 판단 되었을 때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다.

〈欽欽新書〉의 모든 글에는 정약용의 인명 중시와 인권을 존중하라는 내용이 녹아있다. 특히 ‘재판에서 뇌물을 받으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라는 구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내용이다.

 

<마지막 제6편 18년 만의 귀향...다음 세상을 기다리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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