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의 절의 정신 깃든 곡성 '도산사’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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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의 절의 정신 깃든 곡성 '도산사’ [2편]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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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 유팽로(月波 柳彭老, 1554~1592)...『호남 연합의병과 제1차 금산성 전투』
조선의 절체절명 속 충과 효, 의리...호남 의병봉기 주도 '월파 유팽로' 선생의 짧은 삶을 기리며...
"임진왜란과 의병운동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충과 효, 역사 정신이 무엇인지 되뇌어 보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8]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임진왜란 조선의 절체절명 속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국 최초의 의병을 일으키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한 '월파 유팽로' 장군의 절의 정신이 깃든 곡성 '도산서'를 찾아서...마지막 편 『호남 연합의병과 제1차 금산성 전투』이다.

 

◆ 월파 유팽로(月波 柳彭老, 1554~1592) 제2편 『호남 연합의병과 제1차 금산성 전투』

도산사/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도산사/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왜군이 조선에 상륙한 지 20여 일만에 한성에 무혈입성하고 두 달 만에 평양을 점령하자, 의주로 피난을 간 선조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명나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운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들의 호남점령은 매우 중요한 작전이었다고 한다. 전라도는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곡창지대이자 조선 각지로 연결되는 보급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군은 조선 전 지역을 장악했지만, 호남지방은 침범할 수가 없었다. 유팽로의 갈담역 전투,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이순신 장군이 남쪽과 서쪽 바다를 지킴으로써 왜군은 호남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초기 5~6월에 시작된 의병봉기는 곡성 옥과의 유팽로를 비롯하여 나주의 김천일, 광주의 고경명·박광옥, 화순의 최경회, 남원의 양대박 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

임진왜란 의병 사상 최대규모로 기록된 7000여 명의 호남 의병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월파 유팽로의 호국 애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그 흔적은 유팽로라는 인물의 생애와 의병활동이 상세하게 기록된 일기체 형식의 「월파집」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장기간 평화를 누려 변방의 소규모 전투만을 예상했을 뿐 임진왜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의 군대는 장부 기록만 있을 뿐 실질적인 군대는 거의 없었다.

농민으로 편성된 군사는 농번기에는 농사에 주력해야 했음으로 상비군으로서 활용이 어려운 형편이었고 정기적인 군사훈련도 형식에 불과했다. 군역은 당시 화폐인 면포(綿布)로 대신 받는 방군수포제가 널리 행해져 군사동원에 어려움이 있었고 관군의 기능은 상실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명무실해진 관군을 대신해 유생들과 전직 관료들이 나라를 위해 의병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이렇게 모인 병력이 임진왜란 의병이었다.

“재물이 있는 자는 빠지고 노약자, 가난한 자는 복역을 하고 있으니 군역의 부실함이 분명합니다.” 「월파집」 임진년 상소 中-
“전장에 내보낼 만한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징비록」 中-
“새처럼 숨고 짐승처럼 엎드려 (관군에) 응모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선조실록」 中-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가 피난을 떠나는 상황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유팽로는 그와 뜻을 같이했던 남원의 이종사촌 형인 양대박(1543~1592)과 함께 명망 높은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해 의병을 결성하기로 약속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으고 담양에 집결토록 한다.

이처럼 유팽로는 재향 유지들을 전라도 연합의병 지도층으로 결속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592년 5월 29일 담양에 모인 의병들은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유팽로를 좌부장, 양대박을 우부장으로 삼아 호남 연합의병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담양 추성관에서 창의한 7천여 명의 전라도 연합의병인 <담양회맹군>이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유팽로 등이 맨 먼저 하였기에 고경명, 유팽로, 양대박을 호남 삼창의라고 한다.” -「연려실기술」中 -

도산사 전경/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선환 기자]
도산사 전경/옥과면 합강리 소재 [사진=정선환 기자]
기록벽화/옥과면 합강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기록벽화1/옥과면 합강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기록벽화2/옥과면 합강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기록벽화2/옥과면 합강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기록벽화3/옥과면 합강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기록벽화3/옥과면 합강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월파 생가터/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월파 생가터/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호남 연합의병의 봉기는 패배의식으로 가득 찬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며, 향토방위를 넘어 전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호남 의병의 특징은 자기 고을이 침략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재빠르게 군·현이 연합적으로 의병을 조직해 경기도·충청도·경상도 등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한편, 한양을 무혈입성한 왜군은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이미 피난을 떠난 후라 당황했고 후방에서는 의병의 공격으로 육로보급이 차단되자 북상했던 일본군은 되돌아와 싸워야 하는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그들은 오로지 선조임금을 사로잡기만 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후방의 협공을 무시하고 다급히 한성을 향해 북상해 육로보급과 해상보급이 차단되는 위기를 맞게 되자 전라도를 점령하지 않고는 북진할 수 없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이처럼 의병의 출현과 이순신 장군의 존재, 선조임금의 피난은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예상치 못했던 변수로 작용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장기전에 대비하면서 조선 팔도를 분할통치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당시 전라도 통치를 담당했던 왜군의 장수는 코바야카 다카카게였다.

그는 조선 참전 왜장 가운데 가장 지략에 뛰어난 장수였다고 한다.

코바야카가 이끄는 왜군의 정예부대는 임진강 전투를 치른 뒤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한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장악해야 조선 정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와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대패함으로써 조선 팔도 중 유일하게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군의 계획은 전라도를 점령해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것이 전라도를 점령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였고 또 하나는 전라도는 중국과 조선을 침략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병참기지이고 식량창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1527년 5월 코바야카의 부대는 호남을 침략하기 위해 남강을 건너다 경상도 의령의 정암진에서 곽재우 의병장에게 대패하자 공격 방향을 바꿔 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무주를 거쳐 금산성으로 향했다.

충청도 금산은 대둔산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으로 전략상 요충지로써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해 왜군은 금산성을 점령해 본진으로 삼아야 했다.

6월 22일 금산 군수 권종이 전사하고 금산성을 지키던 방어사 곽영이 퇴각함으로써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금산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웅치와 이치 고개로 향했다. 7월 8일 웅치 전투에서 김제 군수 정담이 전사했으나 황진 장군이 전주성 부근 안덕원에서 왜군을 궤멸시키고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과 동복 현감 황진이 왜군을 막아냄으로써 전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호남 연합의병의 목표는 왕을 구하러 출정한 근왕군(勤王軍)의 성격이 강했다.

이를 위해 호남 의병은 선조가 있는 의주로 가기 위해 담양을 출발해 전주와 여산을 거쳐 연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유팽로는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이 전주를 침공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된다.

유팽로는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주성을 방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해 의주로 가는 것보다 금산성을 공격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을 내게 되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진다. 금산성의 코바야카 부대가 진중에 소수병력을 남겨놓고 웅치와 이치 고개를 넘을 때 금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충청도와 전라도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을 뿐만 아니라 전주를 향해 공격하는 왜군을 후방에서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 유팽로의 전략이었다.

7월 2일 고경명의 호남 의병은 연산에서 진산으로 진군해 금산의 적정을 살피고 7월 5일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에 고경명은 유팽로에게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양군이 합세해 금산성을 공격하자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고경명의 호남 연합의병은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 코바야카의 본진이 있는 금산성 눈벌(와우평)로 진격한다.

유팽로는 선봉장으로서 금산성 부근에 진을 치고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신중론을 펼쳤으나 방어사 곽영은 유팽로의 전략을 무시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가 반드시 불리할 것이니… 5, 6일간 진을 치고 사태를 살펴봅시다” 「월파집」 中-

7월 8일 금산성 밖 눈벌(와평)에 진을 치고 7월 9일 방어사 곽영의 부대와 함께 공성전을 감행해 일시적인 성과를 올렸으나 다음날 7월 10일 조총으로 무장한 적의 기습공격에 전라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겁을 먹은 채 싸우지 않고 도망가자 의병들도 사기가 떨어져 동요되면서 7000여 호남 의병도 전선이 무너지면서 패하게 된다.

“방어사 군이 왜군을 바라보고 놀라 먼저 무너지고 의병군도 뒤따라 와해 되었다.” 「월파집」 中-

금산 눈벌(와우평)의 혈전(제1차 금산성 전투)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유팽로가 보여준 의병장의 최후는 더없이 처절하고 거룩했다.

의병장 고경명이 왜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유팽로는 고경명을 구하기 위해 다시 진중으로 되돌아가 밀려오는 적과 맞서 분전하다가 왜군의 칼날에 장렬한 최후를 맞으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호남 연합의병의 활동 기간은 비록 40여 일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적지 않았다.

유팽로를 비롯한 호남 연합의병의 순절이 국토 수복의 근거지인 호남을 지켰고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는 기폭제가 되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호남지방이 일본군의 침략에서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금산전투의 혈전을 비롯해 김제 군수 정담의 웅치 전투, 권율·황진 장군의 이치 전투,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 황진·김천일 의병장의 제2차 진주성 혈전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제1차 금산성 전투는 전쟁 초기 육지의 관군이 연패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일본군을 상대로 공성전(攻城戰)을 벌이며 싸운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에 처음부터 승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작전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결행한 것은 의병의 본분을 다하기 위한 의로운 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000여 명의 호남 의병이 비록 적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단순한 패전에 그친 전투는 아니었다. 어려운 전황 속에서도 일본군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어 전주성 침략을 좌절시킴으로써 호남을 지킬 수 있었고 충청도 일대가 보전됨으로써 전라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1차 금산성 전투의 패인에 대해 고경명과 관찰사 이광의 불화로 이광이 전투에 전혀 협조하지 않고, 전투에 참전했던 방어사 곽영도 관전만 하고 응전하지 않은 점과 전술 운용의 미숙함 등을 패인으로 평가하는 경향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우세한 화력으로 전쟁준비를 철저히 했던 일본군에 비해 조선군은 관군과 의병 할 것 없이 평소 훈련된 군사가 없었고 기본전력 또한 열세에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고경명 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전투에 협조하지 않았고, 전라도 방어사 곽영 역시 응전하지 않고 후퇴함으로써 사기를 잃은 고경명의 7천여 의병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 「선조수정실록」 中 -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의 기치를 앞장서 올렸던 유팽로, 유팽로의 주도로 결성된 호남 연합의병은 국토 수복을 위한 물적·인적자원의 근거지인 전라도를 방어했고 결국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좌절시키고 왜군의 조선 침략 계획에 제동을 건 주인공이었다.

화순의 최경회, 보성의 임계영, 광주 고종후, 남원의 변사정 등의 의병봉기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유팽로·안영 등의 절의 정신을 본받은 제2의 호남 의병이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월파 유팽로, 그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인 1592년 4월 20일 무지몽매한 부랑자들을 의병으로 교화시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구심점이 된다.

풍채는 왜소했고 한쪽 눈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는 의병장 이전에 문과에 급제해 농본, 애민, 강병, 충군에 대한 글을 남긴 조정의 관료였으며 젊은 선비답게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여 권력층의 비리를 폭로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선조임금과 동인세력의 미움을 받아 좌천되는 아픔도 겪었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성리학의 대가답게 충과 효, 대의를 실천한 선구자였다.

종용사/충남 금산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종용사/충남 금산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포충사/광주광역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포충사/광주광역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유월파정려각/1623(인조3)/옥과 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유월파정려각/1623(인조3)/옥과 도산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의마총비(義馬塚碑)/곡성군 입면 송정리 내동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의마총비(義馬塚碑)/곡성군 입면 송정리 내동마을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마을로 가는 길목 입면 송정리 내동마을에 주인과 함께 죽음을 같이 했던 의마(義馬)의 무덤과 의마총비(義馬塚碑)가 세워져 있다.

월파 유팽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공주에서 지인에게 신마(神馬)를 얻었는데 이 신마(神馬)가 월파의 시신을 부인 김 씨에게 건네주고 죽은 의마(義馬)이다.

월파의 의마(義馬)는 순절한 주인의 머리를 물고 3 백릿길을 내달려 생가인 현 옥과면 합강마을에 도착한 의마(義馬)는 부인 원주 김 씨의 치마폭에 시신을 건네주고 9일 동안 여물을 먹지 않고 울다가 현재 무덤이 있는 곳에서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월파 선생 순절 이후까지 신의를 지키다 죽음을 같이한 의마(義馬)의 의(義)를 기리기 위해 봉분을 조성하고 ‘의마총비’를 세웠다고 한다.

“전장에서 유혈이 낭자한 유팽로 의병장의 의마(義馬) 오려(烏驪)가 그의 머리를 찾아서 입에 물고 고향인 옥과 합강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의마(義馬)는 이미 죽어있었고 땅에는 수급만 있었다.” 「월파집」 中-

월파 유팽로는 사후 사간원 사간(司諫)에 추증되고 광주 포충사, 금산 종용사에 위패를 모시고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으며 그의 문집 「월파집月坡集」이 전한다.

그의 고향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도산사’와 ‘유월파정려각’이 세워졌으며 유팽로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4월 20일을 옥과 면민의 날로 정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정부는 2010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했다.

‘의병의 날’은 국가의 주관으로 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고취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대한민국 기념일이다.

‘의병의 날’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장이 경남 의령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던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6월 1일로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월파 유팽로 선생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에서 옥과로 내려오는 도중 순창 대동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4월 20일을 임진왜란 최초의병을 일으킨 날이라고 평가하는 역사기록도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실천적 지성인, 국가를 위해 충과 효, 의리를 다해 호남 의병봉기를 주도한 월파 유팽로 선생의 짧은 삶을 되돌아보면서 임진왜란과 의병운동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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