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영당] 청백리 명재상 '사암 박순'의 학덕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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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영당] 청백리 명재상 '사암 박순'의 학덕을 찾아서
  • 정성환·고석훈(광산) 기자
  • 승인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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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무릅쓰고 윤원형 세력과 맞선 의기
이황에게 대제학을 양보한 겸양의 미덕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와 지조...'칭송'
광주 사암로, 사암 박순의 의기 존경...명명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8] 정성환·고석훈(광산) 기자 = 이번 이야기는 조선시대 절개와 겸양, 청백리의 명재상으로 칭송받는 '사암 박순(思菴 朴淳)' 선생의 숨결이 깃든 광주 송호영당(宋湖影堂)편이다.

송호영당(宋湖影堂)/눌재 박상, 사암 박순의 영당/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소재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宋湖影堂)/눌재 박상, 사암 박순의 영당/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소재 [정성환 기자]

△사암 박순(思菴 朴淳, 1523~1589)

사암 박순은 1523년(중종 18년) 성균관 대사성과 전주 부윤을 지낸 박우(1476~1547)의 둘째 아들로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대사헌, 대사간 등 청요직(청렴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을 거치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사암 박순 초상화/전북 유형문화재 제276호/전북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성환 기자]

사암 박순은 8세에 시를 읊으면 좌중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며 서당 훈장이 탄복했고, 동국삼박(東國三朴)의 하나로 불렸던 그의 아버지도 ‘박순’이 지은 글을 보고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겠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박순의 조상은 본래 개성에서 살았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공주와 회덕에 내려와 은거했다.

박순의 할아버지 박지흥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이자 처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절골 마을로 내려와 정착했다.

박지흥은 세 아들(박정, 박상, 박우)을 뒀다. 박순의 아버지가 셋째인 박우이다.

박순의 아버지 박우는 장가들어 분가하면서 나주시 옹곡면 송죽리에서 살게 된다.

박순의 큰아버지는 하촌 박정이고 둘째 큰아버지가 1515년 ‘신비복위소’를 올린 ‘기묘명현’ 눌재 박상(朴祥)이다.

하촌 박정은 일찍 타계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두 동생, 눌재 박상과 육봉 박우를 직접 가르쳐 자신의 3형제를 소동파의 삼소(三蘇)에 견줘 동국삼박(東國三朴)이라 불릴 만큼 대승케 헌신하다 안타깝게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사암 박순은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학풍은 서경덕의 사상을 계승했으나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율곡의 학설까지도 수용하여 포용적이면서도 독자적인 학문 영역을 구축했으며 우계 성혼, 고봉 기대승과 교우하고 시, 문장, 글씨에도 능통했다.

그는 동인과 서인을 구분하지 않은 화합과 통합의 리더였고 고정관념에 얽매이거나 구애받지 않았다.

박순이 1553년(명종 8) 31세에 대과에 갑과 1등,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출사한 때에는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펼칠 때였으나 명종은 문정왕후의 영향력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외숙인 윤원형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명종은 자신의 외숙인 윤원형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왕비 심 씨의 외숙인 ‘이량’을 등용했지만 이량은 윤원형보다 더욱 심한 패악질을 저질러 세상은 더 혼란스러웠다.

그 당시 그 누구도 외척세력인 이량과 윤원형의 권력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순은 핵심요직인 이조 좌랑,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면서 당대 최고 권력자인 윤원형과 이량에 맞선, 기개 높은 관료로서 조선 역사에 사림의 시대를 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561년(명종 16) 박순은 청요직인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면서 임백령 시호 사건으로 시련을 겪는다.

을사사화의 주동자이며 윤원형의 최측근인 임백령이 죽자 명종은 그의 시호를 지으라는 어명을 내렸으나 아무도 그의 시호를 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박순은 임백령의 패악질을 반영하여 충(忠)과 문(文)자를 넣지 않고 소공(昭恭)라는 시호를 지어 올린다.

‘이미 잘못이 있으니 고칠 수 있다’라는 소(昭)와 ‘모습과 거동을 조심하다’라는 공(恭)을 쓴 것이다.

이처럼 박순의 성품은 외척세력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선비였다.

윤원형은 명종을 보위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에게 충(忠)이나 문(文)자를 시호를 올리지 않자 격분했다.

이 사건으로 박순은 관직을 삭탈 당하고 향리인 나주로 돌아와 은거하며 고봉 기대승과 학문을 토론하며 지내다 다시 한산 군수에 임명된다.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1563년(명종 18) 명종의 정비 인순왕후 심 씨의 외척세력인 이량은 명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고맹영, 김백균 등과 당파를 만들어 국정을 농단하고 그의 아들 이정빈을 병조 좌랑으로 발탁하는 등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이에 기대승, 윤두수 등 신진 사림이 이량을 비판하고 나서자, 이량은 사헌부를 사주하여 기대승, 윤두수 등을 모함하고 탄핵하여 관직을 삭탈했다.

이러한 참상을 지켜보던 박순은 기대항 등 신진 사림과 힘을 모아 이량을 탄핵하고 인순왕후 심 씨의 동생 심의겸이 이량의 비리를 고발하고 나서자 명종임금도 어찌할 수 없어 이량을 유배형에 처하고 억울하게 파직된 기대승, 유두수 등을 복권 시켰다.

이처럼 박순은 불의에 항거하며 기대승 등 신진 사림들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게 힘이 되어 주었으며 외척들의 비리를 제거하기 위해 앞장섰다.

1565년(명종 20) 박순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문정왕후와 그의 외척세력인 윤원형과 대립하게 된다.

20년간 권력을 농단했던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普雨)의 죄를 물어 제주도에 유배 보내 참형에 처했으며, 윤원형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는 등 문정왕후의 외척세력을 척결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암 박순은 겸양의 미덕을 갖춘 선비였다.

1568년(선조 1년) 46세의 나이로 홍문과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자신보다 22세가 많은 퇴계 이황이 아래 직급인 제학에 임명되자 퇴계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박순은 명예로운 대제학 자리를 퇴계에게 양보하여 직위를 바꿔줄 것을 선조에게 요청한다.

대제학(大提學)을 문형(文衡)이라 하는데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에서는 삼정승(三政丞)보다 더 명예로운 자리로 여겼다고 한다.

박순은 “열 정승보다 더 영광스럽다”라는 이 명예로운 자리를 이황에게 양보하고 물러나려 한 것이다.

선조는 박순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황을 대제학으로. 박순을 제학으로 임명했지만 퇴계 이황 또한 병을 이유로 대제학을 고사해 결국 ‘박순’은 대제학에 임명된다.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이처럼 아름다운 겸양의 덕을 갖춘 ‘박순’은 조정 대신들의 칭송을 받으며 이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79년(선조 12) 55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명재상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14년 동안 정승으로 재직하면서 영의정은 7년을 역임했으며 청렴하고 결백하여 청백리에 선정되기도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박순은 남은 높이고 자신은 낮추는 겸양의 덕을 갖춘 선비’로 추앙하고, 귀하고 빛나는 벼슬을 남에게 양보한 박순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면서 사암능양(思菴能讓)이라 기록하고 있다.

‘사암능양’이란, 사암 박순은 겸양(謙讓)에 능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는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고 어진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을 임금에게 추천하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 유능한 대학자들에게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주었으며, ‘이이’가 사직하려 할 때는 임금에게 그를 다시 중용할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박순’은 14년간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당파를 떠나 좋은 인재들을 발탁하여 정치에 참여토록 길을 열어주었으며 학맥이나 구태 정치에 연연하지 않고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준 위대한 정치가였다.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그러나 동·서 분당이 격화되면서 동인들은 박순을 “율곡 이이와 성혼의 편을 들어 분당을 격화시키는 간사한 사람”이라고 비판하면서 “박순, 이이, 성혼 세 사람은 얼굴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라며 탄핵하자 선조 임금은 “착한 부류끼리 상종함이 도에 무슨 손상이 있겠느냐”라며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순을 신뢰했다.

이처럼 ‘박순’은 동인들의 모함과 비판 속에서 유능한 인물을 발탁하여 정치에 입문시키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반대파들의 공세는 그칠 줄 몰랐다.

1584년 율곡 이이가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동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1585(63세)년 서인의 심의겸,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이 정여립, 이발 등 동인의 탄핵을 받아 심의겸이 삭탈관직을 당하자 박순은 조정에서 외로운 처지자 되고 만다.

동·서 분당의 혼란 속에서도 14년 동안 정승을 역임하지만 끝내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어 그의 뜻을 다 펴보지 못한 채 김효원 등 동인들에 의해 양사의 탄핵을 받게 되자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조정을 떠난다.

박순은 외동딸이 살고 있은 경기도 영평(현재, 경기도 포천) 백운계곡에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에서 기거하며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촌부처럼 살다가 1589년 6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사암집(思菴集) 목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정성환 기자]

‘박순’은 고향인 광주에 은거하지 않고 포천으로 갔던 것은 그의 외동딸이 결혼하여 살던 곳이 포천이기 때문이다.

박순은 부인 고씨 사이에 외동딸이 있고, 서자(庶子) 한 명을 두었다고 한다.

광해군 때 계축옥사(칠서의 옥, 1613년)에 연루된 박응서가 그의 서자이다.

박응서는 시문에 능한 명문가의 서출이었기 때문에 벼슬에 나아갈 길이 막히자 서얼 차별에 불만을 품고 명문가의 서출 7명이 ‘강변칠우’라 자처하며 북한강 근처에서 시와 술로 지내다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죄를 면해준다는 대북파 이이첨, 정인홍 등의 사주를 받고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 자금을 조달하고자 강탈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이러한 모함으로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이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재남 등 소북파가 화를 당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난다.

7명의 서자 중 박응서 혼자만 죄를 용서받고 사면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 때 체포되어 주살되었다.

사암집/사암 박순 시문집, 1652년 간행/박순의 글씨. [정성환 기자]
사암집/사암 박순 시문집, 1652년 간행/박순의 글씨. [정성환 기자]

사암 박순은 시(詩), 서(書), 문(文)에 능통한 정치가였다.

글씨는 조맹부의 송설체, 시는 당나라 시풍을 따랐다.

선조는 사암 박순에 대하여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 즉,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곧은 절개와 지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극찬했으며, 퇴계 이황은 “박순과 상대하다 보면 한 가닥의 맑은 얼음을 대한 것 같이 정신이 상쾌해짐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며 그는 청빙(淸氷, 맑은 얼음)과 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 천변에는 박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옥병서원(玉屛書院)이 세워져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촌동 송정 고가에서 시작하여 비아동 광산교차에 이르는 도로를 박상의 호를 따서 ‘사암로’라 이름 짓고 그의 절개와 겸양의 미덕을 기리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호영당’에는 눌재 박상과 함께 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나주시 노안면 월정리 광곡마을의 ‘월정서원’에는 정철, 심의겸 등과 함께 그의 위패가 봉안되어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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