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향 광주의 뿌리 '눌재 박상'의 숨결이 깃든 '광주 송호영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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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 광주의 뿌리 '눌재 박상'의 숨결이 깃든 '광주 송호영당'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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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로움의 대명사 칭송...역사 기록
박상 선생의 절의(節義)사상...의향 광주의 뿌리
광주 눌재로, 서창 검문소~벽진교 ‘눌재로’ 명명
광산구 소촌동 용아 박용철(후손) 생가 뒷편 소재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7] 정성환 기자 = 이번 이야기는 조선시대 의로움의 대명사로 칭송받는 '눌재 박상(朴祥)'선생의 숨결이 깃든 '광주 송호영당(宋湖影堂) 편이다

'눌재 박상' 선생은 16세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다툼의 혼돈속에서 ‘신비복위소’를 올려 정의와 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의인(義人)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이러한 '눌재 박상'의 절의(節義)사상이 광주정신의 뿌리가 됐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부로는 송호영당에 같이 배향된 조카 '사암 박순(朴淳)' 선생 편이 연재된다.

송호영당(宋湖影堂)/눌재 박상, 사암 박순의 영당/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소재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宋湖影堂)/눌재 박상, 사암 박순의 영당/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소재 [정성환 기자]

우리나라 역사속에서 광주인의 정체성과 기질을 광주정신이라 하고 광주정신은 정의로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대첩은 전라도의 수군이, 행주대첩은 전라도 관군이, 제1차 금산성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호남 의병이 중심이 되었고,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의 정의로움도 광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송호영당은 눌재 박상(朴祥) 선생과 영의정의 지낸 그의 조카, 사암 박순(朴淳)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로 1728년(영조 4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절골 마을에 건립되었다.

1839년 소촌동으로 옮긴 이후 도시 산업화와 주거확장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2008년 후손인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 뒤편으로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눌재 박상 초상화/전북 유형문화재 275호. 전북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성환 기자]
눌재 박상 초상화/전북 유형문화재 275호. 전북 원광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성환 기자]

△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

눌재 박상은 1474년(성종 5년) 방하동(절골마을, 사동 :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에서 아버지 박지흥과 어머니 계성 서 씨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 3형제(박정, 박상, 박우)는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송나라 소동파(蘇東坡)의 부자삼소(父子三蘇, 소식, 소순, 소철)에 견줘 ‘동국삼박(東國三朴, 박정, 박상, 박우)’으로 불렸다.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은 원래 충청도 회덕에서 살았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부인 서씨의 고향인 서창 방하동(현, 광주 광산구 소촌동, 절골마을)으로 낙향해 정착했다.

박상은 유년시절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15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형인 ‘하촌 박정’의 가르침을 받아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군 7) 2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관 박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병조좌랑, 전라도 도사, 사간원 헌납, 홍문관 수찬, 한산군수, 담양부사,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눌재 박상은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문으로 닦아왔던 의리 정신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또 한 양심과 신념에 비추어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일절 타협을 거부했던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왕실 종친의 정계 진출을 반대하고 훈구파 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함으로써 훈구대신들의 공분을 사 한산 군수로 좌천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박상은 훈구대신들의 견제 속에 뜻을 펼치지 못하자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모친 봉양을 핑계로 중앙정치를 떠나 임피 현감을 자청해 관료 생활 대부분을 지방 수령으로 보냈다.

눌재는 부임지에서 민생에 힘썼으며 정당한 조세와 부역, 소송 등을 공정하고 명쾌히 처리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힘썼으며, 담양부사와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만큼 두 번이나 청백리 포상을 받았다는 것은 목민관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애민사상은 박상이 쓴 수많은 시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정성환 기자]

박상의 심성은 참으로 곧았다. 양심과 신념에 따라 옳지 못한 일에 대해 일절 타협을 거부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로운 인물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전라도 도사로 부임했을 때에 일으킨 ‘우부리장살사건’과 담양부사로 있을 때의 ‘신씨복위상소’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정의롭고 의리 정신이 투철했는지 알 수 있다.

<우부리 장살사건>이 일어난 때는 연산군의 폭정이 심한 때였다.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모의 여인을 찾아 나섰다.

그때 김소부리(우부리)라는 천민의 딸이 궁에 들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발탁되자, 그의 아비인 우부리는 딸의 권세를 업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러나 나주 목사와 전라도 관찰사는 ‘우부리’가 연산군의 후궁이라는 위세에 눌려 그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눌재 박상은 전라도 도사를 자청해 부임한 후 ‘우부리’를 잡아들여 국법을 어긴 죄를 물어 곤장을 쳐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사건은 박상에게 크나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우부리’를 장살 한 이유를 밝히고 사약을 받기 위해 연산군을 만나러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첩첩산중에 난데없는 고양이가 나타나 박상의 목숨을 구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 연산군은 애첩의 큰 처남(우부리)이 장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사약을 내려 사헌부 관리를 나주로 파견한다.

이때 연산군을 만나러 한양으로 가던 박상이 장성 입암산 ‘갈재’에 들어서자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길을 막고 바짓가랑이를 물어 끌면서 따라오라는 흉내를 냈다고 한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박상이 고양이를 따라가다가 샛길로 들어서는 순간, 사약을 들고 나주로 향하던 금부도사 일행이 지나간 것이었다.

박상은 금부도사 일행과 길이 엇갈려 일단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죽음을 면했다는 내용으로, 이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늘의 뜻으로 고양이가 나타나 박상 선생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송호영당/효자충정박금공기실비(효자비)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효자충정박금공기실비(효자비) [정성환 기자]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중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507년 박상 선생은 사간원 헌납(정5품)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사간원 헌납은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으로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한 관청으로써 임금이 올바른 정사를 펼칠 수 있도록 직언을 하는 자리이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왕권이 미약했다.

그런데 왕족인 종친들이 본래의 품계를 넘어선 벼슬에 제수되자 박상은 종친들의 중용을 반대하며 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직언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직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종친들과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기도 했으며, 이후 조정의 훈구 대신들의 탄압을 받아 한산 군수로 좌천된다.

이에 박상은 중앙정치를 그만두고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향과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임피 현령을 자원했고 관료 생활 대부분을 지방의 수령으로 보냈다.

1511년(38세)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고 1515년(42세) 담양 부사로 재임할 당시 <신비복위소>를 올리게 된다.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 신 씨는 신수근의 딸이고, 연산군의 부인 신 씨는 신수근의 누이였다. 즉, 신수근은 연산군의 장인이자 처남이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사위인 진성대군(중종)의 편에 가담하지 않아 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처형되고 진성대군이 왕(중종)으로 추대되자 그의 부인 신 씨는 왕비가 되었다.

왕비의 아버지를 죽인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웠다. 결국, 왕비 신 씨는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 의해 폐출된다.

이처럼 왕후 신 씨는 12세에 진성대군과 결혼해서 7년을 같이 지내다 진성대군이 19세 때 왕이 되자 반정공신들에 의해 7일 만에 폐출된 비운의 왕비였다.

연산군의 폭정과 두 번의 사화와 반정이라는 혼란스러운 정국에 중종반정공신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횡을 일삼았고 왕권은 미약해 민심은 불안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혼란 속에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 윤 씨는 10년 만에 원자(인종)를 낳고 6일 만에 죽자 조정은 새로운 왕비간택을 하게 된다.

왕비간택 소식을 접한 담양 부사 박상, 순창 군수 김정, 무안 현감 유옥 세 사람은 강천산 계곡에서 만나 중종반정으로 억울하게 폐위된 신 씨를 복위시키기 위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폐위된 신 씨를 복위시킬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다.

순창 강천사 삼인대(三印臺)/비문,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 [정성환 기자]
순창 강천사 삼인대(三印臺)/비문, 전북 유형문화재 제27호. [정성환 기자]

<신비복위소>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 씨의 원통함을 풀어 복위시키고, 신 씨의 폐위를 주장한 반정의 3대 공신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의 관직을 박탈하고 죄 주라는 내용이다.

중종반정 초기 임금을 협박하여 왕후를 폐출한 반정공신들을 단죄하라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목숨을 건 의로운 행동이었다.

<신비복위소>는 조정의 권력을 독점한 반정공신 세력들에 의해 실패로 끝나고 박상과 김정은 중벌을 받을 위기에 처해 졌다.

그러나 신진 사림과 조광조 등의 적극적인 변론에 힘입어 가까스로 중벌을 면하고 박상은 전라도 남평 오림역으로 유배를 갔고, 김정은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간 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박상의 목숨을 건 <신비복위소>는 무오·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훈구파 공신들에 의해 입지가 좁아진 조광조 등 신진 사림들을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개혁정치의 활로를 제공하여 사림 중심의 정치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들의 결집은 조광조 등 개혁을 주도한 신진 사림들은 역성혁명을 꾀한다는 훈구대신들의 모함과 중종 임금의 견제를 받아 화를 당하는 기묘사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훗날 영조 임금은 박상 등의 상소를 ‘늠름한 행위였다’고 평가했고, 박상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정암 조광조는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했으며, 퇴계 이황은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이라 평가했다.

박상이 목숨을 걸고 상소한 지 200여 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년) 신 씨는 ‘단경(端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단경왕후’라 불리게 된다.

1744년(영조 20년) <신비복위소>를 올렸던 장소에 ‘삼인대 비’가 세워지고, 정조 임금은 박상의 제문을 직접 지으며 “삼인이 걸었던 그 누대는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라며 그의 정의로움을 극찬했다고 한다.

송호영당 입구 [정성환 기자]
송호영당 입구 [정성환 기자]

1516년 <신비복위소> 사건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박상은 순천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직을 청하고 귀향하여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을 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소격서 혁파, 향약 실시, 현량과 설치, 반정공신의 위훈 삭제 등 개혁을 추진했으나 반정공신들의 모함으로 신진 사림들이 화를 당했다.

박상은 직접 화를 면했지만, 광주 남문 밖 분수원(현, 학동 삼거리)에서 유배형을 받고 화순으로 내려오는 조광조를 만나 마지막 이별을 나눠야만 했다.

조광조는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 고향 땅 용인으로 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박상은 상여를 보내면서 “내세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그때의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는 하지 말자”라는 만시(輓詩)를 지어 시대의 불운을 한탄했다.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是非), 이는 그가 겪은 <신비복위소> 사건과 조광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박상이 52세 때인 1526년 문과 중시에 응시해 장원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대로 승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주 목사로 좌천되는 아픔을 겪었다.

1529년 나주 목사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박상은 1530년 57세로 생을 마감했다.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조 5년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744년(영조 20년) 전라북도 순창군 강천산 계곡에 ‘삼인대비’가 세워졌으며 1795년 정조대왕은 불천위(不遷位)를 명했다.

눌재집/눌재 박상 시문집 [정성환 기자]
눌재집/눌재 박상 시문집 [정성환 기자]

눌재 박상은 의리의 선비정신을 겸비한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백성을 위한 목민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하서 김인후와 교분이 깊었으며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정만종 등의 후학을 양성하여 호남 사림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원류가 되었으며 당대의 문장가로서 추앙받았다.

그의 시문집 눌재집에는 “박상의 사상은 경의(敬義) 사상이다”라고 쓴 제자 송순과 정만종이 쓴 편지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경의(敬義) 사상이란, 경(敬)은 치심이경(治心以敬), 의(義)는 처사이의(處事以義)라 했다. 즉, 마음을 경(敬)으로 다스리고 남을 대할 때는 의(義)로서 정직하게 하라는 뜻으로 의(義)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시문에도 뛰어나 1200여 수의 시를 남겼고,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 임금은 박상의 시(詩)에 대해 “청아·고고하고 담박하여 저절로 한없는 맛이 있다. 구성이 치밀하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눌재집 목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정성환 기자]
눌재집 목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 [정성환 기자]

1694년 그의 시문집 <눌재집>이 간행되어 조선시대의 한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눌재집 목판각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됐다.

또 한 박상은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멸망까지의 역사서 <동국사략>을 저술했다.

<동국사략>은 1402년 태종의 명으로 간행된 권근의 ‘동국사략’이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상의 <동국사략>은 자연재해 등을 제외하고 인물 중심으로 편찬했으며, 충절과 의리가 뛰어난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을 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16세기 사림파의 역사의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학적인 가치가 매우 큰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0)의 시비(詩碑)/광주 사직공원 소재, 1994년 건립. [정성환 기자]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0)의 시비(詩碑)/광주 사직공원 소재, 1994년 건립. [정성환 기자]

광주광역시 사직공원에는 눌재 박상의 ‘깊은 산에 묻혀’란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두 개의 산봉우리에 구름이 떠가고, 한 사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雖遁深山晦姓名(수둔심산회성명) 깊은 산에 묻혀 이름 없이 산다 한들
有時天變亦關情(유시천변역관정) 천기 변할 때는 가슴이 조일래라
夜來風雨知多少(야래풍우지다소) 밤사이 비바람이 얼마나 휘몰아쳤는지
揮淚佳花落滿庭(휘루가화낙만정) 낙화는 뜰에 가득 눈물겹구나.
이 시(詩)는 기묘사화로 파직된 청백리 ‘영천자 신잠’의 시에 화답한 시로써 박상은
기묘사화로 참변을 당한 사림들을 애통해하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박상 선쟁의 유적지 절골마을 표지석/광주 서창동 소재 [정성환 기자]
박상 선쟁의 유적지 절골마을 표지석/광주 서창동 소재 [정성환 기자]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절골마을’에는 눌재 박상의 재실인 봉산재가 있다.

절골 마을이라는 이름은 먼 옛날부터 깊은 산속의 골짜기에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골짜기에 절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 절골 마을을 사동(寺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완절문(完節門)/봉산재 대문 [정성환 기자]
완절문(完節門)/봉산재 대문 [정성환 기자]

봉산재를 들어서는 대문에는 ‘완절문(完節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완절문’이란 퇴계 이황이 눌재 박상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이라고 추앙했던 뜻을 기려 ‘완절문’이라 했다고 한다.

완인(完人)이란 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으로서 절개(節槪)와 의리를 완성한 사람을 뜻한다.

봉산재(鳳山齋)/눌재 박상의 재실, 1919년 중건/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절골마을)소재 [정성환 기자]
봉산재(鳳山齋)/눌재 박상의 재실, 1919년 중건/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절골마을)소재 [정성환 기자]

봉산재는 뒷산이 봉황산이고 눌재 할아버지 별명이 ‘봉산거사’여서 봉산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눌재 박상은 성품이 너무나 결백하여 훈구대신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큰 뜻을 펴지 못했으나, 연산군 후궁의 아비가 횡포를 부리자 그 죄를 추궁하며 장살 시킨 의로움, 중종반정 이후 외척들이 품계를 넘어 벼슬을 갖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올곧음, 중종의 첫 부인 단경왕후 신 씨를 왕비로 복권해야 한다는 ‘신비복위소’의 의로움의 실천 정신은 광주정신의 뿌리가 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광주광역시는 서구 서창 검문소에서 칠석동 벽진교까지의 거리를 ‘눌재로’로 명명하여 눌재 박상 선생의 의로움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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