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홍암 나철을 찾아서③...대종교 교도들의 독립전쟁과 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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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홍암 나철을 찾아서③...대종교 교도들의 독립전쟁과 후대의 평가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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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의 대종교, 대일 무장투쟁의 기폭제...봉오동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 전투 대승 후 무장독립전쟁 본격적 전개

청산리대첩의 이범석,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대종교라는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

독립운동가이고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 종교로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우리 민족정신과 정기를 꿋꿋하게 지킨 수호신" 평가
홍암 나철/홍암사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홍암사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6) =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는 '홍암 나철 기념관'이 있다. 홍암 나철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대부로서 한민족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지고,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의 열망을 담아 대종교(단군교))를 중광했다. 이번 이야기는 '홍암 나철을 찾아서' 마지막편 "대종교 교도들의 독립전쟁과 후대의 평가"이다.

나철의 삶을 들여다보다/전시실 입구 [정성환 기자]
나철의 삶을 들여다보다/전시실 입구 [정성환 기자]

◆ 구국을 향한 나철의 대종교

나철의 순국은 힘을 잃어가던 민족혼을 되살리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중국에 망명 중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2천만 동포가 총궐기하여 육탄혈전으로 일제 침략을 물리치고 국권을 수호하자”라는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데 서명 인사 39인 중 대부분은 대종교 교인들이었다. 또한, 일본 동경에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의 주역들도 대종교 사람이 주축이 된 신한청년당의 영향을 받았다.

대종교 교인들은 철저한 독립투사였고, 비타협민족주의자였다. 이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당시 임시 의정원 29명 중 21명, 정부 임원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교인이었으며 민족지도자 이시영·신규식·이동녕, 민족사학자 신채호·박은식·김교헌·안재홍·정인보·문일평, 한글문화 운동의 주역 주시경·지석영·김두봉·최현배·이극로,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 <아리랑>을 제작한 배우 나운규 역시 대종교 교인들이었다.

나철의 대종교 사상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의 기폭제가 되어 1920년 홍범도가 이끈 봉오동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북로군정서 서일·김좌진·이범석, 서로군정서의 김동삼, 1930년대 북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등은 중국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대일 무장독립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백암 박은식 선생은 대종교는 단군의 신교를 받은 ‘역사적 종교’라고 정의했으며, 나철의 대종교 활동은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 운동의 모태가 되어 한민족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 우리 민족의 혼을 지키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뿌리가 된다.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리)/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리)/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산리대첩 승리를 자축하는 독립군/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산리대첩 승리를 자축하는 독립군/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산리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김좌진 부대가 사용했던 피 묻은 태극기/전시실 [정성환 기자]
청산리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김좌진 부대가 사용했던 피 묻은 태극기/전시실 [정성환 기자]
흑룡강성 액하감옥.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으로 투옥되어 10여 명이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순국한 곳이다. [정성환 기자]
흑룡강성 액하감옥.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으로 투옥되어 10여 명이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순국한 곳이다. [정성환 기자]

◆ 대종교의 수난 임오교변(壬午敎變)

1942년 일제는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해 교인을 가장한 밀정을 ‘조선어학회’에 잠입시켜 ‘이극로’가 단애종사(3대 교주 윤세복) 에게 보낸 편지 속의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를 압수하게 된다.

일제는 이 원고의 제목을 ‘독립선언서’로 바꾸고, 그 내용을 “일어나라, 움직이라,”를 “봉기하자, 폭동 하자”로 번역 편집하여 〈조선어학회사건〉과 때를 같이해 1942년 11월 19일 3대 교주 윤세복 외 25명을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라는 죄목으로 검거했다.

이때 나철의 큰아들 ‘나정련’은 1943년 만주 ‘액하감옥’에서 61세의 나이로 옥사하고, 둘째 아들 나정문 역시 투옥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3일 만에 사망한다.

그 밖의 간부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세복을 비롯해 7~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중에서 광복을 맞았다.

대종교에서는 이 사건을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부르며, 숨진 10명의 간부를 순교십현(殉敎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추앙하고 있다.

삼성사 참배 기사와 예언시(豫言詩)/전시실 [정성환 기자]
삼성사 참배 기사와 예언시(豫言詩)/전시실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 예언시/전시실 [정성환 기자]
홍암 나철 예언시/전시실 [정성환 기자]

◆ 홍암 나철의 예언시(豫言詩)

홍암 나철 선생은 순국 전 예언시(豫言詩)를 남긴다.

예언시에는 우리나라의 운명을 정확히 내다본 혜안과 예지력이 숨어있다.

〈홍암 나철의 예언시(豫言詩)〉

조계칠칠(鳥鷄七七) 일락동천(日落東天)

흑랑홍원(黑狼紅猿) 분방남북(分邦南北)

낭도원교(狼道猿敎) 멸토파국(滅土破國)

적청양양(赤靑兩陽) 분탕세계(焚蕩世界)

천산백양(天山白陽) 욱일승천(旭一昇天)

식음적청(食飮赤靑) 홍익이화(弘益理化)

이 내용을 직역하면 “을유년 음력 7월 7일 동쪽 하늘의 해가 지고/ 검은 이리와 붉은 원숭이가 나라를 남북으로 나눈다/이리의 도와 원숭이의 교가 국토와 나라를 망치고/ 붉은색과 청색 두 나라가 세계를 분탕질하고/천산의 선도문화가 세력이 강성해져/붉은색과 청색 이념을 먹어버리고/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게 된다”라고 한다.

이 내용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공산주의와 외래문화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공산·자유의 극한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마침내 한민족의 선도문화가 크게 번창하여/공산·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여기에서 조계(鳥鷄)의 새조(鳥)·닭계(鷄)는 새을(乙)·닭유(酉)와 같아서 육십갑자의 을유(乙酉)를 가리키며 을유년(乙酉年)은 바로 1945년이라고 한다.

그해 음력 7월 7일은 양력 8월 14일이며 그날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하고 8월 15일 일왕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는 8월 15일 해방된다.

오행으로 보면 흑(黑)은 북방, 홍(紅)은 남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이 개입해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된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낭도(狼道)는 소련의 공산주의로, 원교(猿敎)는 미국의 자본주의로 보아 미·소 냉전 시대를 예측했다고 할 수 있다.

천산(天山)은 중국의 천산이 아니라 백두산을 뜻하고 백양은 흰 백(白), 신선 선(仙)으로 우리 고유의 선도문화를 의미하며 그 선도문화가 현존하는 이념을 뛰어넘어 홍익인간·이화세계를 펼친다는 뜻이다.

홍암사(홍암 나철 사당)/홍암 나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사(홍암 나철 사당)/홍암 나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사 내부 전경/홍암 나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홍암사 내부 전경/홍암 나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 대종교에 대한 후대의 평가

청산리대첩에서 지휘관으로 참여한 ‘이범석’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만주에 살던 조선인 대부분이 대종교 신도였으며 특히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대종교라는 신앙의 힘과 민족정신에 불타는 신념의 결과라고 평가했으며, 민족사학자이고 독립운동가인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은 대종교의 종(倧)은 신인(神人)의 칭호이며,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민족 종교로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우리 민족정신과 정기를 꿋꿋하게 지킨 수호신이었다.

대종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윤세복 선생이 설립한 동창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설립한다. 해방 후 대종교는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민족학교인 홍익대학교를 설립한다.

홍익대학교 학생들은 극우세력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의 상여를 매고 그의 마지막 길을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익대학교는 친일파 후손에 의해 학교 제정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사대주의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었고, 민족주의 사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사람들은 대종교가 항일독립운동의 뿌리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단순히 민족 종교, 또는 이상한 종교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아직도 일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후손들은 우리의 민족주의 역사관을 정립하고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대종교를 구심점으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목숨 바쳐 독립전쟁에 헌신했던 선조들을 향한 경(敬)이고, 국혼(國魂)을 수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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