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담양 소쇄원을 찾아서①...'소쇄원의 유래와 양산보의 생애'
상태바
[문화역사 이야기] 담양 소쇄원을 찾아서①...'소쇄원의 유래와 양산보의 생애'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 정신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한국 최고의 별서원림(別墅園林)' 평가

'인품이 맑고 깨끗해 속기(俗氣 : 현실 세계의 기질)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산'이란 뜻..."‘천사들이 사는 천국" 의미

소쇄옹 양산보(蘇灑翁 梁山甫)...조선 시대 사림파 거두 정암 조광조(趙光祖) 수제자, 조광조 사사(賜死) 후 초야에 묻혀 소쇄원 조성
전라남도 담양 소쇄원(瀟灑園) 전경. 소쇄옹 양산보가 건립.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소재. 1983년 7월 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2008년 5월 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7) = 전라남도 담양군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별서원림(別墅園林)으로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 정신 그리고 절세적인 풍광으로도 널리 알려진 소쇄원(瀟灑園)이 있다. 이번 이야기는 담양 소쇄원 이야기로 ▲1편 소쇄원(瀟灑園)의 유래와 소쇄옹 양산보(蘇灑翁 梁山甫)의 생애 ▲2편 소쇄원(瀟灑園)의 공간구성으로 다뤄본다.

 


[제1편] 소쇄원(瀟灑園)의 유래와 소쇄옹 양산보(蘇灑翁 梁山甫)의 생애

소쇄양선생유적비(瀟灑梁先生遺蹟碑) [사진=정성환 기자]
소쇄양선생유적비(瀟灑梁先生遺蹟碑). 소쇄원(瀟灑園) 입구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소쇄원(瀟灑園) 입구 [정성환 기자]
소쇄원(瀟灑園) 입구 [사진=정성환 기자]
소쇄원(瀟灑園) 가는 길 [사진=정성환 기자]
소쇄원(瀟灑園) 가는 길. ‘소쇄원’ 가는 길 양쪽 옆 대나무 숲을 자죽총(紫竹叢)이라 했다. [사진=정성환 기자]

 

◆ 소쇄원(瀟灑園)의 유래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어렸을 때 우연히 들판에서 놀던 오리가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고 궁금해하며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는데, 바위가 기묘하고 폭포수가 쏟아지는 경치가 아주 빼어난 어는 그윽한 골짜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곳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어 매우 조용했고, 양산보는 그때 이곳에 집을 지어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소쇄원(瀟灑園)이다.

소쇄원(瀟灑園)은 자연과 인공, 현세와 내세, 현실과 이상을 품고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별서원림(別墅園林)으로,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 정신이 물씬 풍기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한국 최고의 원림(園林)으로 평가받는다.

소쇄원(瀟灑園)의 명칭은 양산보의 호(號)인 소쇄옹(蘇灑翁)에서 따온 것이며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1530~40년경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소쇄(瀟灑)는 맑고 깊을 소(瀟), 깨끗할 쇄(灑) 즉,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중국 제나라 명 문필가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온 말로 “은자(隱者)는 지조가 굳어서 속세를 뛰어넘는 풍채가 있어야 하고, 인품은 맑고 명리(名利)를 탐하지 아니하며 속세를 벗어난 고결한 사상을 가져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소쇄원(瀟灑園은 “인품이 맑고 깨끗해 속기(俗氣 : 현실 세계의 기질)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동산”이란 뜻으로 ‘천사들이 사는 천국’을 의미한다.

 

◆ 소쇄옹 양산보(蘇灑翁 梁山甫)의 생애

양산보(梁山甫)는 아버지 양사원과 어머니 신평 송씨(新平宋氏)의 장남으로 1503년(연산군 9)에 태어나 창평 창암촌에서 자랐다. 자는 언진(彦鎭), 평생을 초야에 묻혀 지내며 호를 소쇄(瀟灑)라 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소쇄옹(瀟灑翁)또는 소쇄처사(瀟灑處士)라 불렀다.

양산보(梁山甫)가 살았던 시기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림(士林)의 시대였다. 그러나 연산군 이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사림세력의 등장은 훈구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1519년(중종 14)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정암 조광조 등 개혁적인 신진 사림파가 참혹한 화를 당하는 사화(士禍)의 시대이기도 했다.

양산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한 성품으로 공부를 잘하는 수제자였다.

양산보가 15살 되던 해(1517)에 그의 아버지 양사원은 신진 사림(士林)의 거두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찾아가 그의 아들 양산보의 교육을 부탁한다. 양사원의 부탁을 받은 조광조는 흔쾌히 승낙하고 ‘양산보’에게 소학(小學)책을 주면서 공부하도록 했다.

소학(小學)은 중국 송나라 주자가 어린이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저술한 책으로, 가족관계나 행동 규범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이념을 확산하는 중요한 서적이었다.

양산보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소학(小學) 공부에 힘쓰며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17세가 되던 해인 1519년(중종 14)은 그에게 희망과 좌절이 찾아온다.

양산보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당당히 현량과에 급제한다.

중종은 조광조 제자 중에서 최종합격자를 뽑으려 했으나 이미 뽑아 놓은 급제자가 너무 많아 조정 대신들은 오히려 합격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양산보는 합격자 수를 줄이는 바람에 최종 탈락하게 된다. 이에 중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양산보를 불러 위로하며 종이를 하사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 훈구파에 의해 조선의 개혁을 꿈꿨던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김식·기대항 등 신진 사림들이 죽임을 당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이처럼 양산보는 아버지의 관심 속에 상경해 15세 때 당대 최고 개혁정치가인 신진 사림의 영수 조광조의 제자가 되어 도학(道學) 사상과 절의(節義) 사상을 배우며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으나 최종 탈락하고, 기묘사화로 인해 그의 스승 조광조가 참화를 당하면서 관직 진출에 대한 양산보의 소망은 완전히 좌절되고 만다.

양산보가 기묘사화 직후 유배지로 가는 조광조를 따라 화순 능주로 내려와 스승을 극진히 보살피며 지내는 가운데, 유배된 지 1달 후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비통한 일을 당한 열일곱 살의 양산보는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초야에 묻혀 살아갈 결심을 한다.

양산보는 고향인 창평에 내려와 산수 좋고 경치 좋은 무등산 아래에 창암촌(지석마을)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소쇄정(瀟灑亭)이라 이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호남의 선현들과 교우하면서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곡문(五曲門)에서 내려다본 소쇄원(瀟灑園) 전경 [사진=정성환 기자]
오곡문(五曲門)에서 내려다본 소쇄원(瀟灑園) 전경 [사진=정성환 기자]

양산보(梁山甫)는 기묘사화 후 은둔생활을 하던 중종 ~ 명종 대에 조정으로부터 출사하라는 여러 번의 천거를 받았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당시 기묘사화로 인해 낙향한 인사 중에는 조정의 부름에 다시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양산보는 끝까지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은사(隱士)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다.

양산보는 당시의 시대상을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외척의 무리가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외면하고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둘러 나쁜 짓만 일삼았기에 도의(道義)가 바로 서지 않는 세상이라 판단하고, 조정의 부름에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절의 정신에 대해 고봉 기대승(1527~1582)이 지은 만장(挽章)에서 밖으로는 화(和)하나 안으로는 엄(嚴)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양산보의 외종형(외사촌)이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1493~1583)은 소쇄원을 조성하는데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다고 하며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하다“라는 뜻의 소쇄(瀟灑)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양산보(梁山甫)는 호남 유림의 유명인사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양산보(梁山甫)는 나주 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의 여동생 광산김씨와 결혼했다. 이들은 처남매제지간이었으며 서하당 김성원은 처조카였다. 일곱 살 아래인 하서 김인후와는 친밀했으며 그의 딸(아들 ‘양자징’의 처)을 며느리로 삼았다.

양산보(梁山甫)는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소쇄원(瀟灑園)을 늘 자랑으로 여겼다.

양산보는 소쇄원에 머물며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고 성리학에 몰두했다.

또한, “효는 덕과 도의 핵심이고, 교화는 효에서 시작된다”라는 그가 지은 한시 「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를 남겼다.

또한, 양산보에 이어 그의 아들 ‘양자징’과 손자 ‘양천운’을 가리켜 깨끗하고 청렴한 소쇄원 3대 선비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효부(孝婦)

가장 소중한 몸은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천금 같은 얼굴과 눈은 어디서 이루어졌는가

아아 부모님께서 진실로 나를 낳아 주셨으니

수고로움도 끝이 없고 아낌과 사랑도 끝이 없어라.

 

애일가(愛日歌)

해 가운데 있는 까마귀야

가지 말고 내 말을 들어라

너는 곧 짐승이더라도 새 가운데 증삼(曾參)이니라

부모님께서 북당에 계시니

하늘 가운데 오래도록 있어다오

 

「효부(孝賦)」를 본 면앙정 송순(宋純)은 ‘이치를 깊이 알고 몸소 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양산보(梁山甫)는 「애일가(愛日歌)」를 집안의 경삿날에 자제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가사를 ‘효자곡(孝子曲)’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양산보가 얼마나 효심이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산보(梁山甫)의 후손들 또한 효심(孝心)이 깊음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양산보가 스승 정암 조광조의 가르침을 받아 「小學」을 깨우치고 「小學」의 규범을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양산보(梁山甫)는 소쇄원(瀟灑園)에서 은둔하며 10여 년간 병으로 누워지내다 1557년 봄 갑자기 병이 깊어져 3월 20일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된다.

양산보(梁山甫)는 임종 시 자제들에게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다. 유독 늙으신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너희는 나의 뜻을 잘 체득하라” 당부하면서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유언은 맑고 깨끗한 선비의 정신을 더럽히지 말고 절의(節義)를 지키고 살라는 양산보(梁山甫)의 뜻이 담겨있다 하겠다.

이에 양산보(梁山甫)의 후손들은 15대를 이어 선조의 유언을 철저히 따랐고, 그 결과 빛나는 문화유산인 소쇄원(瀟灑園)이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장사 유허비(道藏祠遺墟碑)/담양 명옥헌(鳴玉軒)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도장사 유허비(道藏祠遺墟碑)/담양 명옥헌(鳴玉軒)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명옥헌(鳴玉軒)/명승 제58호/담양군 고서면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명옥헌(鳴玉軒)/명승 제58호/담양군 고서면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1557년 양산보(梁山甫)가 세상을 떠난 지 268년여 년 만인 1825년(순조 25) 창평 사림에 의해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원림 뒤에 그를 배향한 사우 도장사(道藏祠)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명옥헌(鳴玉軒)’ 뒤편에 도장사 유허비(道藏祠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