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필문 이선제 부조묘(畢門 李先齊 不祧廟)와 괘고정수(掛鼓亭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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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이야기] 필문 이선제 부조묘(畢門 李先齊 不祧廟)와 괘고정수(掛鼓亭樹)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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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문 이선제, 호남 대표 선현으로 ‘광주 향약’을 실행하고 미풍양속 이루는 데 헌신

광주광역시, 필문 이선제 선생의 업적 기려...서방 사거리~산수동 오거리~남광주 사거리 구간 ‘필문대로’ 명명

괘고정수(掛鼓亭樹), 수령 600여 년, 높이 약 15m의 왕버들 나무...필문 이선제 후손과 흥망성쇄 같이해
필문 이선제 부조묘(사당)/1990년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7호 지정 [정성환 기자]
필문 이선제 부조묘(사당)/1990년 광주시 민속문화재 제7호 지정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앞 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6) = 광주광역시 남구 구만산길(원산동)에는 호남대표 선현인 필문 이선제(李先齊,1389~1454)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不祧廟)와 필문 이선제가 심었다는 600여 년 수령의 괘고정수(掛鼓亭樹)가 보존됐다. 이 부조묘(不祧廟) 건물은 정면 세 칸, 측 한 칸의 앞 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이번 이야기는 필문 이선제에 얽혀있는 이야기다.

* 부조묘(不祧廟)는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가묘(家廟)에서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사당에 모시고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王)에서 불천위(不遷位)를 명하는데 이 불천위를 모시는 곳이다.

필문 이선제 신도비 [정성환 기자]
필문 이선제 신도비 [정성환 기자]
필문 이선제 부조묘 석비 [정성환 기자]
필문 이선제 부조묘 석비 [정성환 기자]
이선제 부조묘 입구/유적비(후손) [정성환 기자]
이선제 부조묘 입구/유적비(후손) [정성환 기자]
필문 이선제 묘지(墓誌) [사진 출처=네이버]
필문 이선제 묘지(墓誌) [사진 출처=네이버]

 

◆ 필문 이선제 묘지(墓誌)

필문 이선제는 호남을 대표하는 선현이었지만, 필문 이선제의 후손인 이발 가문이 기축옥사로 참화를 당할 때 이선제의 관직이 삭탈 되고 저술도 소실되어 생몰연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선제 묘지(墓誌)의 명문(銘文) 기록이 발견되면서 이선제에 대한 삶과 가족관계를 알 수 있었고, 이선제 묘지(墓誌)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묘지(墓誌)란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자손의 이름 등을 사기판이나 돌에 새겨 무덤 옆에 묻은 조그마한 비를 말한다.

필문 이선제 묘지는 1998년 일본인에 의해 불법으로 도굴돼 반출되었는데 2017년 일본인 소장자 ‘도도로키 구이’ 씨의 기증으로 국내에 환수돼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되었다.

이선제 묘지(墓誌)는 1454년(단종 2년)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높이 28.7cm, 폭 25.4cm이며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으로 판명됐다. 명문(銘文)은 묘지(墓誌) 앞면과 뒷면 측면에 이선제의 가계, 관직이력, 후손과 관련한 내용 248자를 새기고 백토로 상감했다.

묘지(墓誌)에 따르면 이선제는 1453년 서울에서 사망했으며 1454년 봄 상여가 광주로 돌아와 만산동에 안장되었고 묘지(墓誌)는 1454년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 필문 이선제의 생애

필문 이선제(1390~1454)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산,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畢門)이다. 자손은 5남 1녀가 있었으며 그의 부인은 보성 선씨(宣氏)이다.

이선제는 141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증광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23(세종 5)년 정도전 등이 편찬한 〈고려사〉를 개수할 때 사관으로 참여한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1431(세종 13)년 집현전 부교리로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강원도 관찰사, 예조 참의,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며 세종대에 20여 년을 집현전에서 근무했다.

1451년(문종 원년)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어 세자의 첫 번째 서연(書筵)에서 소학(小學)을 강론하고, 세종대에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를 광주목으로 복원하는데 헌신했으며 1452년(문종 2)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에 돌아와 ‘광주 향약’을 실행해 미풍양속을 이루는 데 헌신하고, 광주지역 인재 발굴을 위해 젊은 선비들을 선발해 강학을 일으킨 광주의 선각자로 활동하다 1453년(단종 1) 서울에서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 산기슭에 그를 기리는 부조묘가 세워지고, 강진의 수암서원과 화순의 죽산사에 그의 위패가 배향됐다.

광주광역시는 1988년 필문 이선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서방 사거리~산수동 오거리~남광주 사거리 구간을 ‘필문대로’라 명명했다.

옛 희경루의 모습/광주역사 민속박물관 소재 [정성환 기자]
옛 희경루의 모습/광주역사 민속박물관 소재 [정성환 기자]
희경루방회도(사본)/광주 역사민속박물관 소재. 1567년 광주 목사로 부임한 최응룡과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들이 모여 잔치를 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희경루방회도’는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되어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됐다. [정성환 기자]
희경루방회도(사본)/광주 역사민속박물관 소재. 1567년 광주 목사로 부임한 최응룡과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들이 모여 잔치를 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희경루방회도’는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되어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됐다. [정성환 기자]

 

◆ 희경루(喜慶樓)와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

광주에는 희경루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451년 지금의 충장로 우체국 부근에 세웠는데 1899년 소실되었다고 한다. 또한, 희경루는 광주가 무진군으로 강등돼 광주목으로 승진된 것과 연관이 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왕조다. 성리학에서는 강상(綱常, 삼강오륜) 윤리를 범한 죄를 가장 엄하게 다스렸다. 그 강상죄가 신분제 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살해하거나 폭행치사 했을 때 다스린 죄가 강상죄였다. 당시 조선 시대에는 변란을 일으킨 고을이나 강상의 법도를 어긴 고을은 강등시켰다. 이에 따라 광주는 광주 목에서 무진 군으로 강등된 아픔이 있었다.

광주가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된 것은 1430년(세종 12년)의 일이다.

필문 이선제가 조정에서 근무할 당시 광주에 사는 노흥준이라는 사람이 그의 애첩을 가로챈 광주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고 신보안은 석 달 뒤 사망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된 것이다.

광주가 무진군으로 강등된 지 21년 만인 1451년(문종 원년) 당시 예문관 제학으로 근무하던 필문 이선제와 광주 원로들의 노력으로 광주는 다시 광주목으로 복원된다.

당시 광주 백성들은 광주목으로 복원된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지금의 충장로 우체국 인근에 루(樓)를 짓고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한다”라는 뜻을 담아 그 루(樓)를 희경루(喜慶樓)라 명명했다. 이처럼 희경루(喜慶樓)에는 필문 이선제의 광주를 아끼는 마음이 담겨있다.

희경루에 대해 당시 신숙주(1417~1475)는 ‘동방(東方)에서 제일가는 루(樓)’라 평가하고“고을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경축했다”라며 광주의 경사스럽고 기쁜 마음을 〈희경루기〉에 담아냈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의 동기생들이 광주 희경루에서 20년 만의 재회를 기념하여 1567년(선조 즉위년) 〈희경루방회도〉를 남긴 것으로 추정한다.

〈희경루방회도〉는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되어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희경루방회도〉 오른쪽 밑을 보면 궁터 과녁이 보인다. 관덕정이다.

관덕정은 희경루 옆에 설치된 궁터였다. 이 그림을 보면 옛날 관덕정은 희경루 터에 있었고, 지금 사직공원에 있는 관덕정은 충장로 우체국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부용정/1422년 창건=김문발(金文發, 1359~1418). 부용정은 광주지역의 향약이 최초로 시행된 장소로 활용됐다. [정성한 기자]
부용정/1422년 창건=김문발(金文發, 1359~1418). 부용정은 광주지역의 향약이 최초로 시행된 장소로 활용됐다. [정성한 기자]

 

◆ 필문 이선제와 광주 향약

광주에서의 향약은 형조 참판을 역임한 김문발(1359~1418)에 의해 부용정에서 처음으로 실시됐다고 한다. 그러나 ‘김문발’이 시행한 향약은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필문 이선제가 실시한 광주 향약의 내용은 이선제의 문집인 〈수암지〉에 기록돼있다.

〈수암지〉에 실린 ‘광주 향약’의 주요 내용 중

제1장은 가족 및 향촌질서를 위한 조항으로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자, 가족의 질서를 해하는 자, 고을의 연장자를 능멸하는 자에 대해 가장 엄한 상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2장은 향촌 사람들이 지켜야 할 일반적인 내용으로 친척과 화목 않는 자, 정부인을 박대한 자, 친구끼리 서로 싸우는 자, 염치가 없는 자, 힘을 믿고 약자를 구휼하지 않는 자, 국가의 각종 세금 및 역을 행하지 않는 자 등은 중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3장은 회의 시 불참자나 문란한 행위를 한 자는 하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선제의 광주 향약은 상·중·하 등의 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전해지지 않지만,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가 가장 엄한 벌을 받고 있음을 통해 가정의 질서유지가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다.

필문 이선제가 사망한 이후 ‘광주 향약’은 16세기 초 만들어져 100여 년을 이어온 ‘양과동 동약’으로 계승되고 발전되고 있다.

 

괘고정수(掛鼓亭樹)/광주광역시 기념물 24호. 주소광주광역시 남구 구만산길 34 (원산동) 소재 [정성환 기자]
괘고정수(掛鼓亭樹)/광주광역시 기념물 24호. 주소광주광역시 남구 구만산길 34 (원산동) 소재 [정성환 기자]
괘고정수(掛鼓亭樹)/광주광역시 기념물 24호 [정성환 기자]
괘고정수(掛鼓亭樹)/광주광역시 기념물 24호 [정성환 기자]
괘고정수(掛鼓亭樹)/광주광역시 기념물 24호 [정성환 기자]
괘고정수(掛鼓亭樹)/광주광역시 기념물 24호 [정성환 기자]

 

◆ 괘고정수(掛鼓亭樹)

괘고정수(掛鼓亭樹)는 광주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있는 수령 600여 년, 높이 약 15m의 왕버들 나무로 필문 이선제(李先齊, 1389~1453)가 심었다고 한다.

괘고정수(掛鼓亭樹)란 ‘북을 걸어 놓았던 정자나무’라는 뜻으로 나무로는 드물게 괘고정(掛鼓亭)이라는 정자 이름이 붙여졌다. 이선제의 후손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축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나무가 ‘괘고정수(掛鼓亭樹)’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선제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후 이선제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고 괘고정수의 북소리는 10대를 이어 울려 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선제의 예언처럼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그의 5세손인 동인의 이발 가문이 서인 정철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자 이선제가 심어 놓았던 나무 역시 싹이 돋아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1624년(인조 2) 이발·이길 형제의 신원이 복권되자 죽었던 나무에서 다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가문도 다시 일어나 수령 600년이 된 왕버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문 이선제와 그의 후손들의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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