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로 인연 맺고 일제에 항거하다 사라져가...양진여·양상기 父子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는 구국의 호남 의병장
"서암로와 설죽로에 담겨있는 광주의 영웅 父子 의병장, 양진여와 양상기 애국혼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4) = 광주광역시에는 서방 사거리에서 동운고가에 이르는 ‘설죽로’와 일곡지구에서 신안교에 이르는 ‘서암로’가 있다. 이번 이야기는 부자(父子)지간이라는 천륜으로 맺어진 이들이 의병장이 되어 일제와 싸웠고, 훗날 같은 교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의롭게 순국한 '서암 양진여(瑞菴 梁振汝), 설죽 양상기(雪竹 梁相基)' 부자(父子) 의병장 이야기다.
◆ 광주 호남 한·말 의병의 역사
한·말 의병들의 전쟁은 위정척사사상을 앞세운 유생들과 동학혁명에 참가했던 농민들을 중심으로 1895년부터 1910년까지 15년 동안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의병 전쟁이다.
한·말 의병의 출현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하며 일으킨 을미의병(1895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에 저항한 을사의병(1905년),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정미의병(1907)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정미의병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의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본격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호남 한·말 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며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과 장성 출신 송사 기우만으로부터 시작된다.
기우만은 광주향교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았고, 장성의 기삼연이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절정을 이뤘으나 고종의 의병해산 조칙에 따라 최익현과 기우만 의병부대는 대부분 해산되지만, 고광순과 기삼연을 중심으로 호남·광주의 의병활동은 계속된다.
호남·광주 의병 역사를 시대별 활동상황을 보면 제1기(1906~1907) 최익현·고광순·기삼연, 제2기(1908) 김태원·김율, 제3기(1909) 전해산·심남일·안규홍·양진여·양상기를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호남 의병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907년 후반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면서 광주·호남에서도 기삼연, 김준(태원)·김율 兄弟, 양진여·양상기 父子, 전해산, 심남일 등 의병장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다.
1908년 ‘호남창의회맹소’를 만들어 의병을 일으킨 기삼연이 담양 추월산 전투에서 체포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형을 당했고, 그 뒤를 이어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죽봉 김태원, 전해산, 김원범 의병장도 광주 어등산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순국했다.
일제는 한일병탄을 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 중 가장 치열하게 위협해 오는 전라도 의병을 제거할 작전을 세우게 된다.
당시 전라도 의병의 전투횟수는 1909년 전국의 47.3%, 전투 의병 수는 50.1%에 달했고, 호남지역 의병은 의병장 50여 명을 포함 4천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광주·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이유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본거지로써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조선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면서 외세에 저항하는 반일의식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두 달간에 걸쳐 대한제국 의병의 본거지인 광주와 전라도 외각지에 일본군을 배치하고 전라도 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펼치며 의병 500여 명을 학살하고 1,500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 호남과 광주의 대표적 의병장인 양진여·양상기, 심남일, 안규홍 등 대표적인 의병장들이 체포돼 처형당한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광주에서의 의병투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광주 의병의 정신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1980년 5·18 민주항쟁 정신으로 계승되어 광주의 의(義)로움으로 승화되었고, 2013년 대한민국 정부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일제와 치열한 전투 속에 산화한 어등산 일대를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해 광주·호남 의병들의 숭고한 애국혼을 기리고 있다.
◆ ‘서암로’와 ‘설죽로’에 스며있는 구국 혼(救國 魂)
서방 사거리에서 동운고가에 이르는 ‘설죽로’와 일곡지구에서 신안교에 이르는 ‘서암로’, 이 길의 주인공은 호남 의병사에 기록된 부자(父子) 의병장, 서암 양진여(1860~1910)와 설죽 양상기(1883~1910) 의병장이다.
“거병 당시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국가를 위해 진력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결코 유감이 없다. 목숨은 아깝지 않은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욕을 당해 죽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서암 양진여>
“살아서 영광 있고 죽어서 애달프니, 몸은 비록 죽었어도 명성이 남았도다.” <설죽 양상기>
이 글은 서암 양진여 의병장과 그의 아들 설죽 양상기 의병장이 순국하면서 남긴 유언이다.
父子지간이라는 천륜으로 맺어진 이들은 의병장이 되어 일제와 싸웠고, 훗날 같은 교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의롭게 순국한다.
◆ 의병장 서암 양진여(1862~1910)
서암 양진여(瑞菴 梁振汝) 의병장은 광주 서창면 벽진리(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서 태어났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일제의 강압으로 기유약조를 체결해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는 등 일제 침략 만행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1905년 한·말 유학자 최익현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의 의병해산 조칙과, 우리나라 군대인 진위대와 싸우는 것은 동족의 비극이라며 스스로 의병을 해산하고 체포돼, 대마도에 유배되어 단식 끝에 한 많은 적지 옥사에서 순국했다.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송사 기우만 역시 고종의 의병해산 조칙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만다. 이에 서암 양진여는 최익현과 기우만의 패배를 거울삼아 왜적에 당한 치욕을 설욕해야 한다며 의병을 봉기할 것을 다짐한다.
이때부터 양진여는 1907년까지 부인 박 씨(박순덕)와 함께 광주, 장성, 담양, 창평, 광산, 나주, 순창, 영광, 고창 등에 10곳의 주막을 경영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양진여가 주막을 경영하는 목적은 의병을 일으켜 친일파 제거와 일본인들을 조선 땅에서 척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07년 4월경 담양에서 기삼연과 고광순을 만나 거병을 논의한 양진여는 격문을 돌린다.
[서암 양진여 격문] “아국(我國)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어 대소의 관리에 일본인을 임용하는 것은 자국의 멸망을 초래케 하는 것으로, 그 원인은 현 정부의 대신 등 현직에 감(甘) 하여 자국의 존망을 개의치 아니하는 것으로 의병을 일으켜 속히 현 대신을 무너뜨리고 이어 일인의 대소 관리를 살육하고 또 각지에 침입하고 있는 일본인을 퇴거시키고 독립국으로 복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동지를 모집한 까닭이다.”
1907년 10월경 제자들이 격문을 들고 각지로 떠나 의병들을 모으자 선비, 장사꾼, 포수 등 3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의병들은 서암 양진여(瑞菴 梁振汝)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양진여는 “일본의 앞잡이가 돼 조선을 패망하게 하는 친일파를 제거하고 일본인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자”라며 역설한다.
300여 명의 양진여 의병부대는 1907년 7월경부터 광주와 담양 경계에 있는 대치산을 근거지로 삼고, 추월산 일대 담양, 창평, 나주, 장성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다.
1907년 9월 초 양진여 의병부대는 정읍 주제소, 순창 우편취급소와 주재소를 공격해 소총 20여 정과 실탄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리고, 1907년 12월 30일 본진을 담양 병풍산에 두고, 담양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 3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908년 1월 양진여 의병부대가 장성군 삼서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200여 명의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양진여 의병부대가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서 사력을 다해 교전했으나 32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하는 심각한 손실을 가져왔다.
이처럼 양진여 의병부대의 친일세력 암살과 군자금 조달 등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양진여 의병부대를 쫓는 일제 토벌대의 추격도 치열했다.
양진여 의병부대가 일본군 토벌대의 토벌목표가 되자 양진여 의병장은 ‘호남 창의회맹소’에 참여했던 전해산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펴며 장성과 담양전투에서 승리한다. 또한,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대치산에 주둔하며 광주 탈환 작전을 세우기도 했으나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실행하지는 못했다.
1908년 11월경 양진여는 담양 대치로 광주수비대를 유인해 섬멸하는 작전을 짜고 전해산, 양상기, 조경환 의병장 등을 규합해 연합 의병대를 편성하고, 광주수비대를 향해 “너희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들이 쳐들어간다”라며 선전포고를 하자 광주수비대는 대포를 앞세우고 담양 대치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는 무려 12일 동안 계속되었고, 연합 의병과 광주수비대는 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과부적으로 양진여 의병부대가 추월산으로 퇴각하는데, 추월산에는 이미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 토벌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진여 의병부대는 담양 추월산 전투에서 의병 15명이 전사하고 화승총과 대포를 빼앗기는 패전을 하며 세력이 급속히 약화 된다.
양진여 의병장은 1909년 6월 이후 지병과 부상으로 직접적인 전투활동은 하지 못하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군자금과 군수품 확보 활동에 주력하며 담양에 은거하던 중 1909년 8월 25일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만다.
◆ 의병장 양진여 순국
양진여 의병장은 체포된 후 면회 온 아내에게 “거병 당시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국가를 위해 진력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결코 유감이 없다. 목숨은 아깝지 않은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욕을 당해 죽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라고 한탄했다고 전한다. 양진여는 내란죄를 적용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30일 대구형무소에서 의롭게 순국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광주광역시는 서암 양진여 의병의 구국정신을 기려 1992년 10월 광주 서방 사거리에서 전대 사거리를 거쳐 동운고가 까지를 ‘서암로’라 명명했다.
위 사진은 경북대 김의환 교수가 1980년대 일본 오사카의 한 고서점에서 입수한 것으로 ‘남한 폭도대토벌 기념 사진첩’ 에 수록된 사진 중의 하나다.
사진 속 인물들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중에 일본군에 붙잡힌 의병장들의 모습으로 이들은 사진 촬영 얼마 뒤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양진여·양상기는 부자(父子) 의병장이었고, 김원국·김원범은 형제(兄弟) 의병장이었다. 안규홍은 머슴 출신의 의병장으로 심남일·전해산과 함께 호남의 3대 의병장으로 평가받는다.
◆ 의병장 설죽 양상기(1883~1910)
설죽 양상기(雪竹 梁相基)는 광주군 서양면 이동(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서 서암 양진여 의병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상기는 1905년 우리나라 군대인 진위대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 1907년 일본이 정미7조약 체결해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해산 조칙을 거부하며 일본군과 3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다 목숨만을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24세의 양상기는 아버지 양진여를 만나 의병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에 대적할 수 있는 무기와 일본군의 이동 정보를 알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어 1908년 4월까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일본 경찰 내부에 잠입해 활동한다.
양상기가 일본 순사로 위장한 것은 일본 군·경의 동태를 파악해 의병활동을 하는 아버지 양진여를 돕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1908년 4월 광주경찰서 순사직에서 근무하던 양상기가 의병장 양진여의 아들로 밝혀지면서 양상기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양상기는 한국인 경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도주에 성공한다.
이후 양상기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부대에 들어가 훈련대장직을 맡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양상기는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감행한 때인 1909년 무렵 80여 명의 젊은 청년들을 규합해 별도의 독립된 의병부대를 조직해 의병장이 되어 동복, 화순, 곡성, 담양, 장성 등지에서 일본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군자금을 확보했다.
이처럼 양상기 의병부대가 아버지 양진여의 부대가 그러했듯 친일파들을 처단하고, 일제 헌병부대와 경찰서, 주재소를 습격해 방화하는 등 의병 전쟁을 감행하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양상기 의병부대를 타도하려고 더욱더 긴밀하게 움직인다.
1909년 3월 200여 명의 양상기 의병부대는 담양 대치 전투 이후 광주, 창평, 동복, 담양, 장성 등지에서 일본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가열 찬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담양군 무정면 덕실마을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양상기 의병부대는 친일파 밀정의 밀고로 담양수비대에 포위되어 양상기 의병장은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의병 28명이 전사하는 대참사를 당한다.
이에 분노한 양상기 의병장은 잔여 의병들을 규합해 동복·창평·담양 주재소와옥과 분견소 등을 파괴하며 일제 토벌대를 격파했으나, 화순과 담양전투에서 일본군의 협박과 회유를 받은 친일파들의 밀고로 일본 군경의 기습공격을 받아 40여 명의 의병 중 23명이 전사한다.
결국, 부대원들을 잃은 양상기 의병장은 1909년 6월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전북 남원으로 피신해 새로운 전투방법을 모색하던 중 1909년 12월 20일 일제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된다.
◆ 의병장 양상기 순국
일제 경찰의 심문과정에서 자신들에게 협조하면 살려주겠다고 귀순할 것을 권유하지만, 의병장 양상기는 “내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울 것이다”라며 끝까지 의병항쟁 의지를 당당히 밝힌다.
양상기 의병장 역시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이 재판받았던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내란죄도 살인죄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구 공소원(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결과는 아버지 때와 똑같았다.
스물일곱의 청년 의병장 양상기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이 교수형으로 순국한 두 달 후인 1910년 8월 1일 그렇게 의로운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고, 광주광역시는 1992년 10월 양상기 의병장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해 신안 제1교에서 북구 일곡동까지의 도로를 ‘설죽로’라 명명했다.
◆ 양진여·양상기 의병장의 묘소
광주광역시 남구 매월동 백마산 기슭에는 부자(父子)의 묘가 나란히 있다.
양진여의 시신은 처형 직후 사위가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해 안장했지만, 양상기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시신마저 수습할 상황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인연을 맺고 일제에 항거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영웅 양진여·양상기 父子 의병장은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과 버금가는 구국의 호남 의병장이었다. 이처럼 ‘서암로’와 ‘설죽로’에 담겨있는 광주의 영웅 父子 의병장 양진여와 양상기의 애국혼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