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 이야기] 일제강점기 흔적이 새겨진 '화정동 동굴'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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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이야기] 일제강점기 흔적이 새겨진 '화정동 동굴'을 찾아서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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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동 동굴 "일제강점기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줘"...광주 학생들과 청소년, 시민들의 역사교육현장 이용

‘광주학생독립기념관’ 앞 산자락에 일제 강점기 군사시설로 조성된 3개의 동굴 보존돼

3개의 동굴서 유류저장용 드럼통 등 발견...일본 군용비행기의 연료창고로 사용되었을 것
일제의 흔적이 새겨진 화정동 군사용 동굴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일대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3) = ‘광주학생독립기념관’ 앞 산자락에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로 조성된 3개의 동굴이 보존돼 있다. 이 곳은 '화정동 동굴'로 지칭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번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새겨진 광주 화정 군사용 동굴을 찾아서다.

광주 화정동 동굴 표지판 [정성환 기자]
화정동 동굴 표지 [정성환 기자]

화정동 동굴

광주광역시 서구 광주학생독립기념관’ 앞 산자락에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새겨진 화정동 동굴이 있다.

군사시설로 조성된 3개의 동굴은 일제가 군사용 목적으로 사용한 비행장이 있었는데 이 비행장의 부속 시설물들을 지금의 화정동 일대에 세웠다고 한다.

화정동 동굴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의 일본본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용 목적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여 만들었다.

이 3개의 동굴 안에서 유류저장용 드럼통이 발견되고 기름 냄새가 났다는 증언을 통해 이 동굴들이 일본 군용비행기의 연료창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동굴은 승용차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반경 3~4m, 길이 각각 80m, 70m, 50m에 이른다.

당시 일제 군사용 시설물은 목포, 제주도, 대구 등 여러 곳이 있지만, 길이가 80m~70m나 되는 동굴이 도심 한 곳에 집중적으로 운집해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 광주비행장의 역사

광주비행장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11월 민간인이 경성과 광주를 1주에 3회 왕복 이용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광주비행장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한 일제가 일본 육군비행장으로 사용했고, 1945년 일본 해군에서 항공 조종사를 양성하는 교육 훈련 비행장으로 사용했다.

1941년 일제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패망을 불러왔다.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고, 이탈리아는 1943년 미국·영국 연합군에게 항복한다. 1944년 미국·영국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폴란드 탈환과 소련군의 베를린 진격으로 독일의 패망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944년 필리핀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군에 대패한 일제는 그 힘이 급격히 약화 돼 일본본토가 미국으로부터 공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1945년 4월 일본본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에 대패한 일제는 본토 사수에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미국은 조선을 일본의 본토로 생각했다. 일제는 목포~여수 간 해안선을 따라 해안경비 부대를 배치하고 광주항공기지에 일본군 해군항공대도 주둔시키는 등, 미군의 일본본토 상륙작전에 대비한 대규모 군사시설물을 한반도 전역에 설치하게 되는데 이때 화정동에 동굴을 만들어 항공유 저장창고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한다.

일제강점기 광주항공기지 주변에는 탄약과 유류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탄약창고는 서구 화정동 월암마을 사월산에 3개의 동굴에 있었으며, 유류창고는 광주비행장으로부터 2.5Km 떨어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 산자락에 4개의 화정동 동굴이 있었다.

현재 동굴 3개는 보존이 잘 되어있으며 나머지 1개는 개인 사유지이다.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1, 2 안내표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1, 2 안내표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1, 2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1, 2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1 [정성환 기자]

◆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1

화정동 동굴 1은 1945년 8월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길이 55.65m, 높이 2.74m, 넓이 2.35~2.75m. 콘크리트 구조물.

용도는 광주항공기지(해군) 연료창고로 확인됨.

출입구는 4각형의 장판형 형식, 평면은 ㅡ자형, 단면은 원통형 아치를 형성하고 있다. 출입구 단면은 동굴 상부의 흙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역삼각형으로 설계된 직선형 동굴로서 구조적으로 안전하게 설치되어 있다.

직선형 동굴은 사람이 머무르거나 탄약을 저장하는 동굴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며, 물품 보관과 수송을 쉽게 하려고 만든 동굴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입구에 길원(吉原 요시하라)이라는 글자는 일본인 감독자 이름으로 추정한다.

측면 장방형으로 인입 된 구조물은 소방수나 방화사를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2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2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2 입구에 새겨진 영문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2 입구에 새겨진 영문 [정성환 기자]

◆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2

화정동 동굴 2는 1945년 8월 이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길이 81.95m, 너비 2.26~2.74m, 높이 2.82m. 반경 3~4m. 콘크리트 구조물.

입구에 영어로 새겨진 글자가 있으나 뜻은 알려진 바 없고, 해방 이후 미군이 동굴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안내표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안내표지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정성환 기자]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정성환 기자]
화정동 동굴 3 절개된 부분의 모습/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앞 [정성환 기자]
화정동 동굴 3 절개된 부분의 모습/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앞 [정성환 기자]

◆ 일제강점기 잔재물 화정동 동굴 3

화정동 동굴 3 는 1945년 8월 이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화정동 동굴 1.2와 유사하며, 동굴 입구보다 내부가 더 확장되어있고, 양측 바닥에 20cm 너비의 배수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동굴 밖과 안 온도가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휘발성이 높은 기름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처로 판단 된다.

내부에 설치된 장방형의 대(臺)는 초병이 근무하는 장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동굴의 뒤편은 학생독립 운동 기념관 앞으로 절개되어 있다.

화정동 1, 2, 3 동굴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동굴을 점령해 사용했고, 전쟁 이후 상무대에서 군사시설로 지정 관리되었다고 한다.

상무대가 장성으로 이전한 이후 특별히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었는데, 2013년 마을 기자단에 의해 공론화되었다고 전한다.

광주광역시는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식민지 잔재청산 전담기구를 구성해 조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 활동의 결과로 ‘화정동 동굴’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잔재물임을 밝히고, 동굴을 정비하고 안전성을 확보해 공개했다. 현재 화정동 동굴은 학생들과 청소년, 광주시민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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