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 '김철 기념관을 찾아서'②] 일강 김철 선생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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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 '김철 기념관을 찾아서'②] 일강 김철 선생의 생애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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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강 김철(1886~1934. 48세),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대한민국 독립에 헌신한 호남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1933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국무위원,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활동...조국의 독립을 위해 각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진력 중 급성폐렴으로 쓰러져

함평의 천석꾼으로 태어나 자신의 모든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헌납하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김철 선생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4년 6월 29일 48세의 일기로 항저우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쓸쓸히 순국
일강 김철(1886~1934) 선생.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2) = 전남 함평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일강(一江) 김철 선생(金澈 先生)의 애국정신과 호국충절을 계승하기 위한 김철 기념관이 있다. 이번 이야기는 '독립운동가들이 살아 숨쉬는 함평 김철 기념관을 찾아서' 마지막 편으로 일강(一江) 김철 선생의 생애 편이다.

일강 김철 선생 동상/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동상과 기념관 전경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동상과 기념관 전경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생가터/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생가터/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의열문(義烈門, 구봉사 내삼문)/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의열문(義烈門, 구봉사 내삼문)/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사당(구봉사)/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사당(구봉사)/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영정(구봉사)/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 영정(구봉사)/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의 독립신문 기고문/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의 독립신문 기고문/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 뒷줄 좌측이 김철 선생/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 뒷줄 좌측이 김철 선생/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 일강 김철(一江 金澈, 1886~1934) 선생의 생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호남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은 1886년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아버지 김동진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일강(一江) 아명은 김영탁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 주위로부터 항상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김철은 영광군 묘량의 외가에서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신학문을 배워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08년 영광의 광흥학교에 입학한다. 1909년 경성법률전수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1915년 귀국해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눠주며 노비들이 자유롭게 꿈을 이루도록 배려해주었다.

이후 지식인으로서 빼앗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며 고향에 은거하던 김철에게 일제는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라는 권유와 협박이 가해지자, 김철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단호히 거절하며 1917년 함평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길을 택한다. 이처럼 조국을 떠난 김철의 신념은 대한의 독립을 위한 자신의 의지였고 자신의 목표였다.

1917년 상하이에 도착한 김철은 여운형·장덕수 등 동제사(同濟社) 소장파들과 함께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독립을 위한 첫걸음으로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내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해 국내외에 대한의 독립을 호소하며 외교독립노선을 주도해 나간다.

1919년 김철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각국에 대한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선우혁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를 만나 3.1운동에 대한 계획을 협의하고, 고향에 있는 모든 전답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김철이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한 사실을 알고 체포하려 했으나, 김철은 이미 국내를 벗어나 상해로 돌아간 후였다. 이 사건으로 김철은 1920년 7월 군자금 모금 활동 혐의로 열린 궐석 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게 된다.

김철 선생의 출생과 성장 기록화/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의 출생과 성장 기록화/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숭고한 김철 선생의 기록물/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숭고한 김철 선생의 기록물/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김철 기념관. 김철 선생의 명의로 임대하여 사용했던 이 청사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 요원들이 피신하면서 매각해 도피자금으로 사용됐다. [정성환 기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김철 기념관. 김철 선생의 명의로 임대하여 사용했던 이 청사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 요원들이 피신하면서 매각해 도피자금으로 사용됐다. [정성환 기자]
김철 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김철 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철은 이동녕·이시영·신익희 등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대한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제1회 임시의정원 의원(전라도 대표)과 임시정부 재무원 겸 법무위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김철은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에 임명돼 교통총장직을 겸임하면서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하고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하게 된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부 차장과 총장직으로 활동한 김철은 전국에 지방교통국을 설치하는 등 국내외 동포사회를 연결하는 비밀 연락체계인 연통제와 교통국를 시행하고 김구·손정도·김순애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을 조직해 일제 기관의 습격과 일제 고관들을 처단하는 독립군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또한, 도산 안창호와 함께 선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정책을 국내외 동포에게 알리며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협조할 수 있도록 헌신한다.

그러나 이 무렵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운영에 암흑이 드리워진다.

1921년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과 각 계파 간 독립투쟁노선의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정쟁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에 김철은 1922년 안창호, 여운형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결성하고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김철의 이러한 신념은 위기에 닥친 임시정부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김철은 임시정부 내 계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한다. 그리고 개조파의 입장에서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지만, 임시정부 내 창조파와 개조파의 의견대립을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국민대표 회의는 결렬되고, 신채호 등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가게 된다.

국민대표 회의가 결렬된 이후 침체의 늪에 빠진 임시정부의 위기 속에서 김철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외교적인 무능과 독립자금 유용 등의 혐의로 탄핵당하고 박은식이 제2대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되자 김철은 외무총장에 임명된다,

1925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임시정부 헌법이 개정되자 1926년 김구(국무령)의 신임을 받아 법무장으로 선출되어 본인의 명의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임대한다.

이 정부청사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항저우로 이전할 때까지 6년 동안 사용되었다.

현재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청사는 1993년 원형을 복원해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전람관’으로 명명되어 유지되어 오다가 2001년 전시관을 확장 재개관하여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교육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1927년 김철은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며 1929년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김철의 중국 국적 취득은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930년 김철은 김구·이동녕·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군무장(현, 국방부장관)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1931년 김구와 함께 비밀 결사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주요 인물을 암살해 일본의 대외침략을 저지하고 임시정부의 위기를 돌파하고 싶은 김구와 김철의 결단이었다.

한인애국단의 주인공 김구, 김철, 이봉창, 윤봉길/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한인애국단의 주인공 김구, 김철, 이봉창, 윤봉길/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윤봉길·이봉창 의사 의거/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윤봉길·이봉창 의사 의거/김철 기념관 [정성환 기자]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 의사는 1932년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그해 4월 윤봉길 의사는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상하이 전승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 상해 주둔 군사령관 시리카와 대장 등을 살상하는 등 목숨을 건 의로운 투쟁을 감행했다.

이처럼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정의로운 의거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한국인이 독립을 염원하고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모든 독립운동가의 역량을 결집해 상해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활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는 현상금을 걸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한다. 김철은 김구·엄항섭·안공근과 함께 평소 친분이 있는 미국인 피치의 집에서 20여 일을 은신한 이후 임시정부를 항저우로 옮겨 존폐 위기에 처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맥을 이어나간다.

이 무렵 김철은 너무나 과로했다. 1933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국무위원,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각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철은 몸이 쇠진하여 급성폐렴으로 쓰러지고 만다.

함평의 천석꾼으로 태어나 자신의 모든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헌납하며 그토록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일강 김철 선생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4년 6월 29일 48세의 일기로 항저우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쓸쓸히 순국한다.

1934년 김철 선생이 순국한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항저우를 떠나, 자싱-전장-광저우-류저우-치장 등지를 일제의 감시를 피해 8년 동안 떠돌아다니며 1940년 충칭에 정착하게 된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정부조직을 주석제로 개편해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고, 좌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국내외 모든 한국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1945년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한다. 이것은 중국, 영국, 미국 등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전해 일본과 항전함으로써 전후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해 우리나라의 힘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독립한다는 임시정부의 전략이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국전략사무국(OSS)은 광복군을 국내로 잠입시켜 첩보와 파괴 공작을 벌일 수 있는 독수리 작전(The Eagle Project)을 수립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이 작전은 실현되지 못하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임시정부의 희망은 좌절되고 만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제 식민치하에서 벗어나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의 간섭으로 곧장 환국하지 못하다가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원의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중국에서의 27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쓸쓸히 환국하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국 직후부터 김구를 중심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좌익과 우익의 피 흘리는 증오와 대립,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속에서 한반도의 통합된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의 탐욕으로 인해 남과 북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오늘까지 한반도가 분단되는 아픔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철 선생은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국내외에 흩어져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결집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를 주도하며 분열된 임시정부를 위기에서 구한 불멸의 독립운동가였다.

김철 선생의 장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으며, 많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애도 속에 중국 항저우시 악비묘의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묘소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김철 선생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김철 선생의 공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75년 8월 김철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를 세우고 1984년 6월 서거 50주기를 맞이해 기념비를 건립했다.

2003년 함평군청과 주민들은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김철 기념관과 김철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구봉사’를 건립해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단심송(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김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단심송(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김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일강 김철 선생 합장묘/김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일강 김철 선생 합장묘/김철 기념관 소재 [정성환 기자]

 

◆김철 선생의 합장묘와 단심송(丹心松)

상해임시정부청사(독립운동 역사관) 옆에는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모든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던 호남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의 합장묘가 조성돼 있다.

이 합장묘는 김철 선생과 첫째 부인 김해 김씨(김정자), 둘째 부인 독립운동가 수성 최씨(최혜순)의 합장묘이다. 이 합장묘에는 김철 선생의 유해가 없다.

김철 선생이 안장된 중국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는 아파트 건립으로 그 흔적이 사라져버려 유해를 발굴할 수가 없어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인근에서 흙 한 줌을 가져와 부인 두 분과 함께 합장한 것이라고 한다.

그 묘소 옆에는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한 기개 넘치는 소나무가 일강(一江) 김철 선생의 합장묘를 지키고 있다.

이 소나무는 일강 김철 선생의 부인(김정자 여사)이 목을 매 순절한 나무로 순절 소나무 또는 단심송(丹心松)이라 불리고 있으며 수령은 250여 년이며 나무로는 드물게 국가보훈청 현충 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김철 선생의 부인 김정자 여사는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사천마을에서 태어나 1915년 김철 선생과 결혼했으나 김정자 여사의 신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 김철이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일제의 감시와 회유, 협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1917년 남편인 일강 김철이 조국광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제 헌병과 경찰들은 김철을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김철의 부인 김정자 여사를 모진 협박과 위해를 가하며 괴롭히기 시작한다.

일제 헌병은 간교했다. 남편의 행방을 추궁한다는 명분으로 한밤중에 찾아와 치근덕대며 몸을 탐하려 덤벼들기까지 했다. 김정자 여사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의 독립자금 모금 때문에 부인 김씨가 일제의 악랄한 탄압을 받게 되자 부인의 안전을 위해 이혼을 결심한 김철은 “나는 조국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라는 서신을 아내에게 보내게 된다.

남편 김철의 편지를 읽어본 김정자는 1924년 사랑하는 남편 김철의 마음을 확인하러 상해로 향했다. 김철은 아내를 걱정하며 피눈물로 쓴 이별사를 전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한다.

상해에서 남편 김철은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내 김정자는 일제 헌병의 감시와 잔악함이 두려웠다.

그녀는 마침내 “남편이 가족 걱정 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은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결심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1925년 어느 날 구봉마을 집 뒤에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에 목을 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남편의 뜻을 받들고 지아비에 대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한 부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애틋함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세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철 선생의 두 번째 부인(최혜순, 1900~1976)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광주 도립병원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임시정부 요인의 소개로 상해에서 김철 선생을 만나 결혼한 후 두 딸(미경, 혜경)을 두었다. 그녀는 혜생 의원을 개원하고 한국의 인삼을 수입 판매하며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생활고에 시달린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김철 선생이 순국한 이후 최혜순은 3년여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두 딸을 데리고 귀국했으나, 일제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게 된다. 이후 고향인 광주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6년 별세했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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