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하는 단체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다”를 기치...일제 고위층 암살과 주요시설 파괴 활동 주도
23번의 폭탄 투척, 일제 요인 암살과 친일파 처단...현상금 100만 원(현재 가치 320억 추정) 김원봉 체포 혈안...일본이 가장 두려워 해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5) =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로 제2편 의열단 조직과 무장투쟁이다. ▲3편 조선혁명선언 ▲4편 조선의용대 ▲5편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 순으로 연재된다.
◆ 의열(義烈) 투쟁의 선구자 약산 김원봉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결집 되어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들어갔으나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안창호의 실력양성론,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서로 대립하면서 그 결속력은 극히 미비했다.
이 무렵 김원봉은 이명건과 김두전과 작별한 뒤 오랫동안 꿈꿔왔던 군대 양성을 위해 ‘의군부’가 있는 만주 지린으로 향했다.
의군부는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고모부인 황상규가 있는 곳이었다. 김원봉은 무력투쟁을 위해 총을 구할 방법을 논의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타국에서 대량의 무기를 구할 수 없었고 특히 우수한 장교와 병사들을 단기간에 양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안타까웠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데 우리 민족은 어느 시절에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김원봉은 군대 육성 계획을 포기하고 독립 투쟁의 방법을 무력 혁명으로 바꾼다.
“조국과 동포를 위해 희생정신이 투철한 투사들을 규합해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고 그들의 시설을 파괴하자. 국내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중적 폭력 혁명을 일으켜 강도 일본의 식민통치를 쳐부순다면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6월 김원봉은 뜻을 모은 동지들과 함께 소수의 결사를 조직해 암살과 파괴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서간도로 향했다.
◆ 의열단(義烈團)
김원봉은 이시영과 이회영 형제가 서간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해 뜨거운 조국애와 용맹한 투쟁 정신, 희생정신을 함양한 독립군의 리더로 성장한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중퇴한 이후인 1919년 11월 9일 동지들을 규합해 만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농부의 집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윤세주·김상윤·한봉근 등 밀양 출신을 중심으로 13명이 모여 〈의열단〉을 결성하고 22세의 젊은 청년 김원봉을 의열단장에 선출한다.
이들 13명 중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윤세주 등 5명은 같은 동향인 밀양 동화중학교 출신으로 이웃사촌이었으며, 13명의 의열단원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
의열단(義烈團)이란 “의로운 일(義)을 맹렬히(㤠) 행하는 단체(團)의 약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신명(身命)을 희생한다”라는 의지였으며, 단원들은 목숨을 걸고 일제 고위층의 암살과 주요시설 파괴 활동을 주도했다,
창단 직후 의열단은 공약 제10조와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의열 투쟁의 지침으로 삼아, 소수 인원이 개개인의 결단과 희생을 바탕으로 일제의 강압 통치에 분연히 맞서기로 뜻을 모은다.
△ 7 가살은 일곱 암살 대상으로 ①조선 총독을 비롯한 고급관리 ②군부 수뇌 ③타이완 총독 ④매국 역적 ⑤친일파 우두머리 ⑥적의 밀정(간첩) ⑦민족을 배반한 토호이다.
△ 5 파괴는 다섯 파괴 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기타 일본의 주요 기관이다.
의열단은 만주 지린에서 창단됐지만, 1920년 전반기 본부를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베이징으로 옮겼다.
의열단은 이곳에서 조선인에게 자금과 인력 그 밖의 여러 가지 도움을 받으며 곧바로 암살·파괴 활동에 들어갔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한 것은 3.1운동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과 반성에서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실력양성과 외교독립론에 기반을 둔 일제에 대한 투쟁노선으로는 결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어떻게 해야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라가 없는데 어떻게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고, 어떻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항일비밀 결사조직 〈의열단〉을 이끈 22세의 젊은 청년 김원봉의 신념이었다.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26세의 청년 박재혁, 1920년 밀양경찰서에 폭탄 투척한 27세의 청년 최수봉,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27세의 청년 김익상, 1923년 일제 탄압의 상징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32세의 김상옥, 1924년 39세의 김지섭이 일본 왕궁을 향해 폭탄 의거를 시도했고, 34살의 청년 나석주는 1926년 일제 수탈의 상징 동양척식주식회사 폭발을 시도한 뒤 일본 경찰 7명을 사살했다. 이들은 모두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의열단의 단원이었다.
이처럼 의열단원들은 23번의 식민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해 파괴하고, 일제 요인 암살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일제는 현상금 100만 원(현재 가치 320억 추정)을 내걸고 의열단장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며, 의열단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항일단체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가운데 “의열단의 암살·파괴 등 폭력적인 투쟁은 공산주의자들의 행동과 같다”라는 미국 등 세계 강대국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은 의열단의 과격한 무장투쟁이 자국 식민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열단의 암살·파괴 등 폭력투쟁과 무관하며 조선독립은 폭력주의자들을 이용해 독립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하며, 임시정부는 의열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주장했다.
이것은 김원봉의 의열 투쟁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노선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려 했고, 김원봉은 무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이처럼 의열단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독립투쟁노선이 달랐지만, 의열단원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폭탄 사용을 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무부에 합류해 과격한 활동을 피하고 상황을 주시하며 행동할 것”이라는 요구서를 김원봉에게 보냈고, 요구서를 받아본 김원봉은 “독립외교활동을 하지도 못한 임시정부가 우리의 무력투쟁을 간섭할 수는 없다”라며 단호히 거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태도는 각 독립단체에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었고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독립운동을 가열차게 하기 위해서는 민족 운동의 구심체인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1923년 1월 61개 단체 124명이 모여 국민대표 회의를 열었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였다.
안창호와 여운형 등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근거로 임시정부를 계속 유지한 가운데 점진적 개혁을 요구했고, 신채호 김두봉 등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되어 많은 독립운동가가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을 자초한 이승만은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으로 1925년 탄핵 되고, 2대 대통령에 박은식(1859~1925)이 선출되어 국무령 중심의 정부 구조를 개편해 임시정부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임시정부 또한 초창기의 대표성과 기능을 상실하고 오랜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1920년대 초반부터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은 192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일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념으로 고착되어 민족주의 진영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이 무렵 의열단은 어느 편에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인 의열(義烈) 투쟁을 전개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