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질박한 삶을 닮은 '분청사기' 이야기...'무등산 전시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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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질박한 삶을 닮은 '분청사기' 이야기...'무등산 전시관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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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시간을 간직한 고고한 비색의 '고려청자'
소박하고 우아하면서도 호방한 '조선백자'
실용적이며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청사기'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관=정성환 기자]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관=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1]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화려한 청자와 유교적인 백자 사이에서 투박하지만 친숙한 서민들의 질박한 삶을 닮았으며, 해학과 실용성을 강조한 다양한 모양들로 그 예술성을 인정받은 분청사기(粉靑沙器)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는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관'을 찾아서다.

[분청사기 전시실=정성환 기자]
[분청사기 전시실=정성환 기자]

인류는 6천~1만 년 전 처음으로 토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8천 년경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를 거치면서 삼국시대에 이르러 예술과 불교 문화가 발달하고 토기문화도 함께 발전하면서 고려시대의 비색청자 도자기 시대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무등산 충효동 도요지 인근은 중생대 화산 활동으로 암석이 풍화된 토양(風化土)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961년 충효동 도요지가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고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팀에 의해 발굴되면서 ‘한국도자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1964년 무등산 자락 충효동‧금곡동 산 일대 주변의 5곳이 사적 14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1998년 충효동 요지(窯址)에 분청사기 전시관을 신축·개관하여 무등산 주변에서 생산되었던 분청사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의 몰락과 조선 건국 사이에 등장한 새로운 시대의 그릇이었다.

이 시기에는 원나라의 간섭과 왜구의 침입이 심했다. 도공들은 해안가의 강진이나 부안에서 청자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자 왜구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된다.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 일대에서도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여러 종류의 도요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도공의 일부가 광주 금곡동과 충효동의 무등산 자락에 정착하면서 자기를 구워냈던 것으로 추정한다.

600여 년 전, 청자의 시대가 가고 소박한 분청사기의 시대가 열리자 물과 흙이 좋고 땔감이 풍부한 무등산 기슭의 충효동 일대에 솜씨 좋은 도공들이 모여든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유학의 영향으로 실용적인 그릇이 요구되자 도공들은 값비싼 흙이나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도공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그릇을 만들게 된다.

충효동 요지가 있는 금곡(金谷) 마을은 ‘쇠골마을’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무기를 만들었던 제철 유적지인 ‘주검동’이 있다. 예로부터 그릇을 만드는 곳은 흙이 좋고 땔감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무등산 자락의 충효동 요지는 도자기 재료인 물과 흙, 땔감이 풍부했고, 무등산 원효 계곡에서 흘러내린 증암천(창계천·자미탄)의 물길이 영산강으로 흘러 한양으로 도자기를 운송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무등산 충효동 일대는 도자기의 원료인 질 좋은 백토(고령토)가 많았다.

이치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이 있는 곳에 백토가 쌓여 있어 그 모습이 마치 달빛에 배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하여 이치마을로 불렸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무진군(茂珍郡) 동쪽 이점(梨岾)에 자기소(瓷器所)가 한 곳 있고 북쪽에 도기소(陶器所)가 한 곳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점(梨岾)은 이치(梨峙)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충효동 가마가 당시 분청사기와 백자, 청자를 굽는 자기소(瓷器所)였음을 알 수 있다. 

[충효동 점토광물 산지/무등산권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 명소=정성환 기자]
[충효동 점토광물 산지/무등산권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 명소=정성환 기자]
[충효동 2호 가마터/사적 141호=정성환 기자]
[충효동 2호 가마터/사적 141호=정성환 기자]
[충효동 점토광물 산지/6단계의 퇴적층=정성환 기자]
[충효동 점토광물 산지/6단계의 퇴적층=정성환 기자]

충효동 2호 가마터는 아궁이부터 굴뚝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고려청자가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발전하는 과정과 도자기 가마의 변천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파편 퇴적층은 분청사기의 변화와 쇠퇴, 백자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교육 및 역사교육장으로 활용 운용되고 있다.

이곳 가마터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도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3m가량의 도자기 파편층은 고려시대의 청자는 맨 밑에,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분청사기는 중간에, 조선 후기의 백자가 가장 위에 묻혀 있어 분청사기부터 백자까지 6단계의 퇴적층이 잘 보존되어 있어 도자기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이 지역에서 출토된 도자기를 지질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안산암의 풍화토를 이용했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무등산 분청사기의 제작과 발달과정에는 무등산의 지질학적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충효동 요지는 사적 제141호로 지정되었고 무등산 권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명소로 지정되었다.

분청사기는 대담하고 유연한 선의 흐름, 다채로운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상감기법, 인화기법, 박지기법, 음각(조화)기법, 철화기법, 귀얄기법, 덤벙기법 등 7가지 다양한 기법과 전형적이지 않은 독특한 문양들이 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는 박지와 음각기법이, 충청도 지역에서는 주로 철화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조선 초기에는 상감과 인화기법이, 후기에는 귀얄과 담금 기법이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매병과 단지, 접시와 종지, 잔, 병, 항아리, 벼루 등으로 그 종류와 크기가 다양하며 국화, 나비, 물고기, 게, 구름 등의 무늬를 새겨넣어 그 모양과 빛깔이 참으로 아름답고 서민적이다. 

이처럼 분청사기는 거친 표면을 감추기 위해 회청색 점토질 태토(胎土) 위에 백토를 입혀 분장한 후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것으로, 청자나 백자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무늬를 새겨넣어 귀족적이기보다는 서민적이며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조선 세종 때 충효동 요지는 당시 관아에 납품하는 최고급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그릇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명문은 자기를 납품할 관청명, 생산지를 나타내는 지방명, 제작 시기, 사용처, 등급표시, 제작자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어 분청사기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분청사기에 명문을 새긴 것은 태종(1417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세종이 도입한 도자기 실명제법에 따라 질 좋은 서민들의 그릇과 관아에 납품하는 명품 분청사기를 빚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광(光), 광공(光公), 내섬사(內贍寺)와 같은 생산지를 표기한 명문이 있는가 하면 박덕형(朴德兄), 득부(得夫), 공부(工夫)와 같이 만든 사람의 성씨나 이름을 표기한 것도 있다.

‘어존’이라고 음각된 귀얄로 분장 된 ‘마상배’는 한글로 음각된 최초의 분청사기로 지방에까지 한글 보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어존’이라는 왕실도자기를 제작한 것으로 보아 왕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은 공공의 도자기를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청의 이름을 새기거나, 만든 사람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제작자의 이름을 새기는 규정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전시실/분청사기 명문(전라도)=정성환 기자]
[전시실/분청사기 명문(전라도)=정성환 기자]
[전시실/ 명문(어존)=정성환 기자]
[전시실/ 명문(어존)=정성환 기자]
[전시실/분청사기=정성환 기자]
[전시실/분청사기=정성환 기자]
[전시실/무등산 도요지에서 생산된 자기=정성환 기자]
[전시실/무등산 도요지에서 생산된 자기=정성환 기자]

당시에 분청사기는 이름도 없이 자기 혹은 사기로 불렸다고 한다.

분청사기란 용어는 1930년대에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란 이름을 부정하고 새롭게 이름을 지은 ‘분장회청사기’의 약칭으로, 회색 또는 회 흙색의 태토(胎土)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를 뜻한다.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 약 200여 년간 제작되었고 세종 때 가장 전성기를 이뤘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같은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경기도 광주 일대에 왕실과 관아에 납품하는 백자가 생산되었고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 분청사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서서히 백자에 흡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분청사기는 투박하지만 친숙한 서민들의 질박한 삶을 닮았으며, 화려한 청자와 유교적인 백자 사이에서 해학과 실용성을 강조한 다양한 모양들로 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도자기로써 현대 도예에서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현대 도예의 거장 ‘버나드리치’(1887~1979, 영국 도예가)는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 시대의 분청사기가 이미 다 제시했으며,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며 대한민국의 분청사기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짧은 시기 가장 자유롭고 파격적이었으며 왕실과 서민,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았던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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