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일제의 조선 강제 병탄에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서와 절명시 남기고 순국
전남 구례 매천사(梅泉祠), 매천 황현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리고 배향한 곳...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사당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9) =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로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함께한 우국지사 매천 항현 선생을 기리기 위한 매천사(梅泉祠) 가있다. 이번 이야기는 [제1편]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찾아서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순국은 [제2편]으로 계속된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구례 시골 마을의 선비 매천 황현은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에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목숨과 바꾼 지식인의 책임, 혼란한 시대의 아픔을 기록으로 남긴 역사학자이자 끝까지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은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함께한 우국지사였다.
◆ 매천사(梅泉祠)
전남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에는 매천 황현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한 매천사(梅泉祠)가 있다.
매천사(梅泉祠)는 한·말 대표적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애국지사인 매천 황현 선생을 배향한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사당이다.
그의 후손과 지방의 유림이 1962년 순국한 집터에 사당(매천사)과 유물전시관을 건립하고 생가인 대월헌(待月軒)을 복원해 매년 봄에 그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후세의 본보기가 되도록 추모행사를 거행한다.
◆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생애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조선 후기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한창이던 1855년 백운산 아래에 자리한 광양군 봉강면 서석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세종 때의 명재상으로 추앙받은 황희(1363~1452)정승과 임진왜란 당시 웅치·이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며 왜군으로부터 호남을 지킨 영웅 무민공(武愍公) ‘황진’ 장군이 그의 조상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왜소하고 병약했지만, 총명함이 남달라 한번 본 글은 절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고 놀이보다는 공부하는 것을 즐기고, 과거시험 공부보다는 시(詩) 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황현의 스승 왕석보(1816~1868)가 황현이 11세에 쓴 시를 보고 “먼 훗날 반드시 훌륭한 선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할 만큼 황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
황현은 태어난 광양과 30대 초에 이주한 구례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그러나 20대에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한·말 양명학의 주류인 강화학파의 핵심인물 김택영·이건창 등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실천을 중시한 학문으로써 황현의 실천적 삶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리고 29세 때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과거시험을 치르는 별시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한다. 그는 초시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그의 조상이 관직에 출사하지도 못한 몰락한 양반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관에 의해 2등으로 밀려나자 조정의 부정부패를 절감한 그는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부친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던 황현은 1886년(32세) 다시 서울로 올라가 생원시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교한다. 그러나 황현은 시국의 혼란함과 민 씨 정권의 관직을 사고파는 부정부패를 개탄하며, 벼슬아치들을 귀국광인(鬼國狂人, 귀신같은 나라의 정신 나간 사람)이라 비판하고 구례로 낙향한다.
선비가 벼슬에 출사한 이유는 배운 것을 실천해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지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 되고, 참된 선비는 도(道)가 바로 서지 않는 시대에는 관직을 버리고 처사로 살아가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 하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매천 황현의 신념이었다.
황현은 비록 세도정치와 명성황후인 민 씨 세력에 의한 부정부패의 타락상을 보면서 관직을 포기하고 처사의 삶을 선택했지만, 그는 참된 선비였기에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체제가 무너져 가는 혼란의 현실을 잊지 않았다.
1886년(32세) 구례(만수동)에 낙향한 매천 황현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구안실(苟安室)과 삿갓 모양의 일입정(一笠亭)을 지었다. 구안(苟安)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라는 뜻이며 이후 ‘구안실’은 황현 문학과 학문의 산실이 된다.
그는 이때 선비의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심고, 조그만 매화 샘을 만들 자신의 자호를 매천(梅泉)이라 짓고 1902년(48세) 광의면으로 이사 갈 때까지 16년 동안 기거하면서 1천 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음풍농월(음풍농월 :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흥취를 즐김)보다는 절의를 지킨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시로 읊었다.
그리고 한국 근대사의 격동의 해인 1894년(40세)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세도정치에 이어 고종의 비 여흥민씨의 척족 세력과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전라도 고부에 사는 민초 전봉준은 인내천(仁乃天)·반봉건·반외세 기치를 내걸고 한국 근대사의 최대 민중운동인 동학혁명을 일으킨다.
이 소식을 접한 황현은 당대의 역사를 저술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매천야록, 梅泉野錄〉과 〈오하기문, 梧下記聞〉을 저술하게 된다. 특히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반 유교적인 운동에 큰 충격을 받고, 유학자의 눈으로 본 동학농민혁명의 원인·과정·결과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책이 최초의 역사서 〈오하기문, 梧下記聞〉이다.
◆ 오하기문(梧下記聞)
〈오하기문, 梧下記聞〉은 ‘오동나무 아래에서 자유롭게 기록했다’라는 의미로 1864년부터 1907년까지의 근대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특히 조병갑의 횡포로 시작된 고부 봉기부터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을 월·일별로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한국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또한, 매천은 유학자이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인 학문을 비판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한 실학자였다.
특히 구례 만수동 시절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의 현실과 농민이 처한 고단한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아무리 바빠도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 놀고먹는 선비(양반)들의 태도를 비판했다.
◆ 매천야록(梅泉野錄)
매천은 동학농민혁명에 이어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이 잇따라 일어나는 격변의 시대를 겪으며 세상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의 필독서라 할 수 있는 〈매천야록, 梅泉野錄〉이다.
〈매천야록〉은 〈절명시〉와 함께 매천 황현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저서로, 1864년 대원군의 집권기(고종 1)부터 경술국치(1910년)까지의 위정자 비리, 일제의 침략, 의병의 활동 등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비사이다.
비록 날짜와 연대가 뒤바뀐 일부 사건도 있지만, 황현은 이 책에서 자신의 견해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들은 자료를 바탕으로 비교적 특별한 형식이 없이 자유롭게 기술했다.
주요 내용은 고종·명성황후·대원군·안동김씨·여흥민씨 등 주요정치세력의 동향과 문제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세의 침탈, 의병의 봉기와 민족의 저항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그는 대원군의 공과 실을 반반이라고 평가하고,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매천은 세 명(철종, 고종, 순종)의 군주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등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했으며, 기록의 대상에는 충신이나 친구도 가리지 않을 만큼 『매천야록』에는 인물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많이 기술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타인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매천의 유언에 따라 해방이 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제강점기에 숨겨져 있던 이 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고 한국사료 총서 제1호로 수록되면서 매천이 순국한 지 45년만인 1955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매천야록』은 「오하기문」, 「절명시첩」 등과 함께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만큼 『매천야록』은 한국 근대사를 포괄적이고 냉철하게, 진실 되게 기록한 것으로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구한말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매천 황현의 사상과 역사관
매천 황현의 사상은 보수적인 위정척사론이나 근대적인 개화사상은 따르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기반을 둔 실사구시(實事求是)·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그는 정약용의 실학사상이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보다 더 유익하며, 박지원의 문장은 자유롭고 현실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했을 만큼 정약용과 박지원을 존경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부국강병(富國强兵)·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세계를 꿈꿨던 조선 최고의 천재 실학자 정약용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매천의 인물평에는 매천필하무완인(梅天筆下無完人)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매천의 붓끝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으로 그만큼 역사를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의 인물평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매천은 1907년 정미의병 봉기 이후의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과 이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며 의보(義報)라는 표현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에 대해 매천은 동학교도를 동비(동학+비적)의 난동으로 표현하는 등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당시 위정척사파나 개화파, 사대부들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민란은 도적 떼나 역적의 소행으로 단정했기에 매천의 동학에 대한 평가는 당시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시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매천은 역사를 기록하면서 절대 감추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역사는 숨기거나 왜곡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일제가 어떻게 조선을 침략했고 매국노와 친일파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사실 그대로 써 내려간 것이다. 이처럼 권력 앞에 굴하지 않고 신분에 흔들리지 않는 매천의 붓은 매섭고 비장했다. 당시 매천은 현재의 역사를 매우 중요시하고 현재의 역사를 잘 기록해야 후세에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 문변삼수(聞變三首)
황현은 1902년(48세) 깊은 산골에 칩거하며 16년의 세월을 저술에 전념했던 구례 만수동 생활을 청산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진 구례 광의면 월곡마을로 이사한다.
그는 이곳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8년간 머무르며 서재에 ‘달을 기다리는 집이다’라는 대월헌(待月軒)이라는 편액을 걸어두고 세상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매천 스스로 군자의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삶의 방향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현은 말할 수 없는 실의와 충격에 빠찌게 된다.
황현은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과 국권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활동무대인 만주벌판으로 망명을 시도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가 망해가는 슬픔을 달랠 길 없어 그는 붓을 들어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고, 투철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을 ‘문변삼수(聞變三首)’에 담아 울분을 토해냈다.
문변(聞變)이란 ‘변고를 듣다’라는 뜻으로, 조선이 1905년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한 것을 말한다.
〈문변삼수 聞變三首〉 -매천 황현-
열수(한강)도 소리죽이고 백악산도 찡그리는데
티끌 세상에는 여전히 벼슬아치 우글거리네
역대의 ‘간신전’을 읽어나 보게
나라 팔지 나라 위해 죽은 한 사람도 없으니…
◆ 호양학교(壺陽學校)
황현은 1902년부터 1910년 순국할 때까지 구례군 광의면에서 지냈다.
당시 많은 유림과 선비들이 위정척사사상을 깊이 신봉했지만,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개화에 앞장선 지식인들은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서양의 신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오산학교(이승훈), 대성학교(안창호), 창평의숙호남학회(고정주), 보성학교 등 전국에 5천여 개의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육계몽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쓴다.
이 무렵 유학자였던 매천 황현은 위정척사 운동을 배척하고 국권을 회복하고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는 근대적 문물을 수용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민족혼을 일깨워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는 실학사상을 실천하면서 1908년 〈호양학교, 壺陽學校〉를 세워 근대적 교육계몽 운동에 앞장선다.
매천 황현은 스승이었던 천사(川社) 왕석보(1816~1868) 선생의 후학들과 향촌의 뜻있는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후세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1908년 구례 최초의 사립학교인 〈호양학교, 壺陽學校〉를 건립하고 신학문 보급과 민족의식 함양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호양학교>의 호(壺)는 방호산(지리산)을, 양(陽)은 남쪽을 의미한다고 한다고 하며,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왕재일’이 <호양학교> 졸업생이다.
<호양학교>는 설립 이후 10여 년간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교육에 정진하며 구국 애국충절의 근간이 되었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 재정난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1920년 폐교된다. 이후 선현들의 구국 교육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6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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