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 기대승 선생을 기리는...광주 '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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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 선생을 기리는...광주 '월봉서원'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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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을 논한 성리학의 대가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 = 고봉 기대승 선생을 기리는...광주 '월봉서원'

월봉서원은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지금의 첨단지구 산월동 삼각산 아래에 서원을 옮겼는데 1654년 효종이 월봉이란 서원 이름을 하사했다. 그 뒤 월봉서원은 대원군때 철폐됐고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이건 하면서 1981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 고봉 기대승의 학덕을 기리는 추모행사는 3월과 9월 월봉서원 사당인 숭덕사에서 행하고 있다. [정성환 기자]교육체험관에서는 시민과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월봉서원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성환 기자]
월봉서원 전경 [정성환 기자]

월봉서원은 이황과 8년 동안 서신 교환으로 사단칠정을 논한 것으로 유명한 성리학의 대가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세 번 세워졌다.

처음에는 낙암산(광주 임곡동) 아래 ‘낙암’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고, 두 번째는 광산구 산월동(첨단지구) 망월봉 아래 ‘월봉서원’이 세워졌다가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세 번째는 지금의 광곡(너브실)마을에 중건됐다.

빙월당.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정조 임금이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빙심설원(氷心雪月)’에 비유하여 ‘빙월당’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정성횐 기자]

월봉서원은 효종 임금이 지은 서원 이름이다. 강당 건물인 ‘빙월당’이라는 이름은 정조임금이 고봉의 고결한 인품과 학덕을 ‘빙심설월’에 비유하여 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됐다.

숭덕사. 문헌공 고봉 기대승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정성환 기자]
숭덕사. 문헌공 고봉 기대승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정성환 기자]

고봉은 광주 소고룡리 (광주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광조의 사상을 계승한 성리학자로서 도학 사상을 정치에 접목하여 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꿈꿨다.

고봉은 퇴계와 13년간 114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 성리학사에서 가장 큰 사건인 사단칠정논변 편지도 들어있다. 퇴계 이황이 선조 임금에게 고봉을 성리학에 통달한 ‘통유’라고 추천할 만큼 고봉의 학문은 깊었다. 고봉의 나이 31세에 주자가 쓴 100여 권의 <주자대전>을 독파하고 성리학의 참고서 『주자문록』을 편찬하였으니 가히 성리학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말할 만하다.

장파각.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고봉 선생 문집 목판 474매, 고봉과 퇴계의 편지 ‘왕선생 왕복서’. 월봉서원, 충신당, 명성제, 존성제, 유영루 현판과 유근의 시 편액 등이 보관됐다. [정성환 기자]
장파각.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고봉 선생 문집 목판 474매, 고봉과 퇴계의 편지 ‘왕선생 왕복서’. 월봉서원, 충신당, 명성제, 존성제, 유영루 현판과 유근의 시 편액 등이 보관됐다. [정성환 기자]

이성계의 역성혁명과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발한 정몽주, 길제, 이색, 사육신, 생육신 등은 의리 정신이 투철한 성리학자였다. 이러한 의리 정신은 김굉필, 조광조에게 전승되어 고봉 기대승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봉의 의리 사상은 14년의 관직 생활에서 부패한 훈구대신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며 척신 세력인 ‘이량’의 모함으로 삭탈관직을 당하기도 했다.

칠송정.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 기효증 선생이 세운 정자로 시묘하던 곳이다.  아버지께 효도하지 못함을 후회하며 손수 일곱 주 소나무를 심은 연유로 인하여 ‘칠송정’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정성환 기자]
칠송정.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 기효증 선생이 세운 정자로 시묘하던 곳이다. 아버지께 효도하지 못함을 후회하며 손수 일곱 주 소나무를 심은 연유로 인하여 ‘칠송정’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정성환 기자]

특히 ‘김개’의 모함은 신진 사림들에게는 크나큰 위기였다. ‘김개’는 신진 사림들이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여 오늘날 사림들의 폐습은 기묘년에 있었던 조광조 등과 같다고 탄핵하자. 정철이 나서서 김개가 사림을 모함하고 있는 것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과 ‘심정’의 모함과 같다며 비난했다. 이 일로 정철이 삭탈관직 됐다. 정철의 파직을 지켜본 고봉은 귀향을 결심하고 김개를 탄핵하는 상소를 선조에게 올렸다. 목숨을 건 승부였다. ‘김개’는 ‘조광조’ 등 ‘기묘명현’을 비방했으며, 고봉이 ‘영의정을 탄핵 ‧ 파직해야 하고, 좌의정은 뺨을 쳐야 한다.’는 거짓말을 퍼트려 기묘년의 사화처럼 5~6명의 사림을 모함하여 일망타진하려는 속셈이라고 직언했다. 놀란 선조가 5~6명이 누구냐고 묻자 심의겸이 기대승, 윤두수, 윤근수, 정철, 박순 등이라고 고했으나 선조는 ‘김개’를 보호하고 나섰다. 선조의 마음을 알아차린 고봉은 문정왕후가 승하하신 뒤로 명종이 몸이 아팠는데 이때 김개가 상소를 올려 모든 정사를 윤원형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여 당시 모든 사람이 통분했다고 고하자 선조도 모든 것을 수긍하고 ‘김개’ 를 파직시킴으로써 고봉을 비롯한 신진 사림들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망천문(외삼문). 너브실(광곡)마을 앞을 흐른는 ‘황룡강을 바라보는 문’이라는 뜻의 ‘망천사’ 사당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전한다. [정성환 기자]
망천문(외삼문). 너브실(광곡)마을 앞을 흐른는 ‘황룡강을 바라보는 문’이라는 뜻의 ‘망천사’ 사당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전한다. [정성환 기자]

이처럼 고봉은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했으며 선비의 의리를 중요시했다. 고봉은 ‘의’를 벗어난 선비나 대신들을 보면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번 옳다고 여기는 길은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선비의 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명성재. 동재로 학생들의 기숙사다.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성의를 다하라라는 뜻으로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라는 의미다. [정성환 기자]
명성재. 동재로 학생들의 기숙사다.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성의를 다하라라는 뜻으로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라는 의미다. [정성환 기자]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척신 세력이 국정을 농단한 명종 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조정에 출사하여 의를 강조하며 인간의 착한 본성을 지키기 위해 왕도정치에 의한 민본정치를 추구했던 고봉 기대승은 부패한 훈구대신들과의 불화로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던 중 조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병이 깊어 ‘태인’에 있는 사돈 매당 김점 (고봉의 큰아들 장인)의 집에서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존성재. 서재로 학생들의 기숙사다. ‘자신을 성찰하라’는 뜻이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정성환 기자]
존성재. 서재로 학생들의 기숙사다. ‘자신을 성찰하라’는 뜻이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정성환 기자]

고봉은 가세가 너무나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선조 임금은 수의를 하사하고 장례를 주선해서 고봉 기대승을 숭상하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고봉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덕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헌’이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인간의 착한 본성을 지키기 위해 실천을 강조한 고봉 기대승은 광주가 낳은 최고의 성리학자이며 현실정치를 추구한 정치가였다. 고봉의 사상이 서려 있는 월봉서원 백우산 자락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고독한 철학자 고봉 기대승의 생애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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