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양민학살사건의 기억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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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양민학살사건의 기억 (12)
  • 글/백은하 소설가
  • 승인 201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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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합니다.”
함평양민학살사건 생존자 정근한씨.
함평양민학살사건 생존자 정근한씨


[투데이광주] 정근한씨는 광주서중을 졸업했다.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평생 영어선생님으로 교직에 재직하다 평교사로 정년했다.

1950년 당시 정근한씨는 광주수창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6·25가 일어난다고 해서 함평 월야 고향집에 돌아와 있었다. 12월이 다 되도록 학교를 못 다니고 집에 있었다. 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작은아버지, 당숙, 6남매가 같이 지내고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금융조합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집에 와 있었다.

국군은 1950년 9월 광주에 입성했다. 함평은 국군 통치가 안 됐다. 그 당시 밤에는 좌익 계열 사람들이 낮에는 국군들이 통치를 했다. 밤손님이라고 했던 빨치산들이 낮에는 철수를 했다가 밤에는 다시 마을로 들어왔다. 그 때 좌익 계열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서 노래도 가르치고 연극도 가르치고 했다. 정근한씨의 작은아버지는 절대 안 나갔다.

1950년 12월 6일 국군과 빨치산들의 교전으로 국군 2명이 전사했다. 그날 밤 빨치산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노랑개들 도망간다. 도망간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외치재에서 봉화를 올렸다. 그것이 군인들을 자극했다. 정근한씨는 그런 점도 고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12월 7일 군인들이 나오라고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갔다. 그의 작은아버지도 군인들이 나오라고 하니까 나갔다. 작은아버지가 군인들에게 항의하자, 군인들이 권총으로 작은아버지를 쏘아서 죽였다고 한다. 당숙은 학생증이 있어서 안 죽이고 군인들이 데려갔다.

군인들이 어린아이들은 모두 내려가라고 해서 그는 내려왔다. 전부 마을을 떠나라고 했다. 광주에 삼촌이 계셨다. 열 살 먹은 여동생과 함께 광주로 가려다가 차를 타지 못해서 광주로 가지 못하고 석양녘에 다시 집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마을을 모두 불 태워버려서 마을에는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그 때 좌익 계열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가버리고 양민들만 학살을 당했다.

정근한씨는 “나는 그것이 너무도 억울하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같은 민족끼리 무엇 때문에 싸우고 학살을 하고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한민국이 잘 되려면 잘못된 것은 인정을 하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야 한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토양에서 어떻게 새싹이 나겠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해서 새로운 싹이 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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