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양민학살사건의 기억 (6) ...생존자 노병량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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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양민학살사건의 기억 (6) ...생존자 노병량씨
  • 글 / 백은하 (소설가)
  • 승인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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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홉 살 여섯 살 여동생 둘을 잃었어요.”
함평양민학살사건 월야 생존자 노병량씨


[투데이광주] 노병량씨는 1939년생이다. 1950년 당시 전남 함평군 월야면 계림리 죽림마을에 살고 있었다. 죽림마을은 장성군과 경계에 있었다. 노병량씨는 당시 12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35세로 지서에 다니고 있었다.

그 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멀리서 총소리가 났다. 부모님께서 피난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침에 옷을 입고 아버지, 어머니, 아홉 살, 여섯 살 난 여동생 둘과 함께 전남 보성군 삼서면 생골이라는 마을로 피난을 갔다. 피난을 가는데 쉭쉭하고 총알이 떨어졌다.

생골로 피난을 갔다가 되돌아와보니 죽림마을의 집과 나락벼늘 등이 전부 다 불타버리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함평군 월야면 계림리 죽림마을에서 당숙 형님이 돌아가시고 형님 두 분도 돌아가셨다. 집이 모두 불타버려서 입을 옷도 먹을 식량도 없었다.

함평군 해보면 상보리 모평마을이 어머니 친정이었다. 다시 아버지, 어머니, 노병량씨 그리고 여동생 둘이 해보면 모평마을로 피난을 떠났다. 거기도 식량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둘이서 식량을 얻으러 나갔다. 심하게 눈보라가 쳤다. 추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가 끝까지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11사단 5중대 군인들이 문장으로 가면 산다고 유도를 해서 모평마을 쌍굴에 모인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쏘아서 집단학살했다. 모평마을에서 아버지와 아홉 살, 여섯 살 여동생 둘이 그 곳에서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어머니와 노병량씨 둘이 살아남았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 여동생 둘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목재와 함께 태워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11사단 5중대가 그렇게 했다. 5중대는 너무도 잔인했다. 1951년 여동생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때 태어난 여동생이 이제 70세다.

노병량씨는 월야초등학교 4학년 1학기까지 다녔다. 고무신 장사, 막걸리 배달 등을 하면서 살림을 일구었다. 거짓없이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70년이 흘러갔다. 그는 1993년부터 함평사건유족회 활동을 시작해서 2006년 유족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농협장도 했다.

노병량씨는 언론 매체에서 함평양민학살사건에 관해서 정확하게 기사를 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가 진상규명과 사과, 그리고 법적보상을 해 주어서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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