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양민학살사건의 기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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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양민학살사건의 기억 (2)
  • 글/백은하 소설가
  • 승인 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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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학살의 시간들
“함평 월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정근욱 (사)함평사건유족회 회장

[투데이광주] 2월말 함평 들녘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봄농사를 시작하는 농부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월야(月也). ‘달’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함평군 월야면으로 향했다.
‘함평양민학살사건’은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6․25 전쟁 기간 중에 일어났다. 청산되지 않은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이 사건의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70여년 동안 숨죽인 채 살아야했다.

[H탐사]의 백은하, 정위상무, 윤석우는 2019년 2월 24일 오전 10시 월야종합사회복지관 2층에 있는 정근욱 (사)함평사건유족회 회장을 만나 가볍게 차 한잔을 마신 후 ‘함평양민학살사건’의 위령비와 표지석 답사를 시작했다. 학살이 일어났던 현장에 세워진 표지석에 국화꽃 한송이와 소주 한 잔을 올리려는 의도였다.

정근욱 회장님의 증언을 들으면서 위령비 답사를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막연하게 학살이 들판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학살의 많은 부분이 동네 한복판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남산뫼학살에서는 무려 한동네 사람 250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동네 살아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봐야한다. 대체 어떻게 마을 한복판에서 국군이 양민을 향해서 기관총을 발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사실이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 은폐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함평은 그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이렇게 평화로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표지석 하나, 하나를 돌면서 국화꽃을 바치고 소주를 올렸다. 지금 이 시점, 우리의 그런 행동이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 무슨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실천하기로 했다. 국화꽃을 바치고 소주를 올리고 그리고 영상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백은하의 소설 ‘귀향’ 속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하듯이 우리도 작은 실천을 하기로 했다.

월야면 외치리 외치재 희생 장소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에 소주 한 잔을 올리고, 월야면 월야리 남산뫼에 세워져 있는 ‘함평양민학살희생자합동위령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정근욱 유족회 회장님의 증언을 들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는 남산뫼는 과수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화나무는 꽃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학살의 시간들은 긴 망각의 강에 갖혀 있었다. 내전을 겪고 프랑코 독재를 겪었던 스페인은 실제로 ‘망각협정’이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보다 함께 잊고 침묵 속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은폐를 드러내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처럼 진실을 알고 난 후 처절한 고통의 시간들을 통과한다고 해도 은폐보다는 더 낫다. Still Life. 생은 계속된다. 우리는 지금 고통의 시간들, 상처를 드러내려고 한다. Open your eyes. 그 상처를 드러내야 더 나은 미래가 우리에게 열리기 때문이다.

 

 

함평양민학살사건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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