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근대 민주주의 기원 동학농민혁명③...'혁명의 시작, 무장 기포(起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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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근대 민주주의 기원 동학농민혁명③...'혁명의 시작, 무장 기포(起包)'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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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전봉준과 뜻을 같이한 고창·정읍·태인·고부·무장현 농민군 모여...농민군 1만여 명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 내걸고 동학 농민 전쟁 돌입

1894. 1. 10 고부 봉기→3. 20 전봉준·손화중 봉기→3. 25 백산 집회→4. 7 황토현 전투→4. 23 황룡촌 전투→4. 27 전주성 입성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전라도의 점령이자 조선조정에 대한 도전...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큰 민란의 성공으로 평가
무장포고문을 움켜쥐고 있는 전봉준 장군 /고창군청 앞 소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무장포고문을 움켜쥐고 있는 전봉준 장군 /고창군청 앞 소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91)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반봉건·반외세를 주창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학(西學)과 반대되는 새로운 종교를 지향한 것이 동학(東學)이다. 이번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 '동학농민혁명' 중 '제3편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무장 기포(起包)이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1855~1895)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1855~1895)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1861~1895)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1861~1895)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1853~1894)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김개남(1853~1894)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과 12인 군상/2024년 1월 10일 고창군청 앞 회전교차로 소공원에 세워졌다. ‘의(義)의 깃발 아래’라는 주제로 세워진 12인의 조형물은 국경호·강관욱 두 조각가가 공동제작한 것으로 이 조형물은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기치였던 ‘보국안민·제폭구민·척왜양창의’가 새겨진 깃발 아래 전봉준 장군이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공포하고 혁명의 대장정에 오른 순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진=정성한 기자]
전봉준 장군과 12인 군상/2024년 1월 10일 고창군청 앞 회전교차로 소공원에 세워졌다. ‘의(義)의 깃발 아래’라는 주제로 세워진 12인의 조형물은 국경호·강관욱 두 조각가가 공동제작한 것으로 이 조형물은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기치였던 ‘보국안민·제폭구민·척왜양창의’가 새겨진 깃발 아래 전봉준 장군이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공포하고 혁명의 대장정에 오른 순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진=정성환 기자]
고창·무장 동학농민혁명 발상지/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사진=정성환 기자]
고창·무장 동학농민혁명 발상지/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 농민군 훈련장/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 농민군 훈련장/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석비/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곳/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석비/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곳/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사진=정성환 기자]
제1차 동학농민혁명 전개도 [사진=정성환 기자]
제1차 동학농민혁명 전개도 [사진=정성환 기자]

◆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무장 기포(起包)

고부의 인근 무장 현에 피신해 있던 전봉준은 고부 민란보다 더 큰 봉기가 필요함을 결심하고 손화중을 찾아가 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니 함께 봉기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손화중(1861~1895)은 무장지역에서 동학의 지도자로 성장해 동학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정읍포의 대접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고부 봉기 당시 최시형의 비폭력주의와 전략상의 어려움을 근거로 참여를 거부했었으나 1894년 고부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판견 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을 탄압하자 전봉준과 함께 봉기를 결심한 것이다.

마침내 1894년 3월 16일부터 무장 현 일대에서 전봉준과 뜻을 같이한 고창· 정읍·태인·고부·무장현의 농민군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3일 동안 죽창을 만들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보한 뒤 대오를 정리했다. 이제 진격만을 남겨둔 사기충천한 동학 농민군 1만여 명이 3월 20일 무장현 당산에 모여 창의문을 발표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본격적인 동학 농민 전쟁에 돌입했다. 이것을 무장 기포(起包 : 동학의 조직인 포를 주임으로 일으킨 무력투쟁) 또는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소규모 단위의 농민 봉기였다면, 이제부터 역사적인 동학 농민혁명군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의 동학 농민혁명군은 고창, 흥덕, 부안을 거쳐 고부군을 점령한 후 인근 지역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태인 현의 대접주 김개남을 만나 의기투합해 백산(白山)으로 진을 옮겼다. 김개남(1853~1894)은 어렸을 때부터 두 살 아래인 전봉준과는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인물이다. 2차 동학혁명 당시 전봉준은 공주로, 손화중은 나주로 진격할 때 그는 청주 병영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한 후 태인에 은거 중 관군에 체포돼 참수되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전봉준·손화중과 함께 동학 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성(白山城) [사진 출처=네이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성(白山城) [사진 출처=네이버]
동학혁명백산창의비(東學革命白山倡義碑)/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성(白山城)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혁명백산창의비(東學革命白山倡義碑)/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성(白山城) [사진=정성환 기자]
백산(白山) 봉기 기록화/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백산에 진을 친 뒤, 죽창을 손에 쥔 수많은 농민군이 몰려들었다. 앉으면 죽창만 드러나고, 일어서면 흰옷만 하얗게 보여 “앉으면 죽창,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진=정성환 기자]
백산(白山) 봉기 기록화/동학농민혁명 기념관. 백산에 진을 친 뒤, 죽창을 손에 쥔 수많은 농민군이 몰려들었다. 앉으면 죽창만 드러나고, 일어서면 흰옷만 하얗게 보여 “앉으면 죽창,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진=정성환 기자]

◆ 백산(白山) 봉기

백산에 모인 동학 농민군들은 전봉준이 격문을 읽고 동학 농민군 4대 강령을 발표할 때마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구호를 외치며 일어서니 갑자기 산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래서 산 이름을 백산이라 불렀다. 당시 백산의 모습이 “앉으면 죽산이요, 일어서면 백산이다”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많은 민중이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들고 모였다고 한다.

동학교도들은 제폭구민(除暴救民)·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군대의 모습으로 전열을 정비했다.

동학 농민군의 구호는 부정부패로 붕괴한 조선을 동학의 힘으로 구해내겠다는 동학 농민군의 결의였다. 드디어 동학농민혁명의 서막이 울린 것이다.

이후 동학 농민군의 세력은 점차 불어나 부안, 고창, 태안 등을 장악하며 장성으로 향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도 단위로 확대된 것이다.

 

〔전봉준의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은 민중과 방백,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은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서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동학 농민군 4대 강령〕

사람을 죽이거나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구민사(救民祠)/정읍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295호). 황토현 전적지는 1894년 황토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동학 농민혁명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곳으로, 구민사는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 지도자와 다수의 동학 농민군의 위폐를 봉안하고 기리는 사당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구민사(救民祠)/정읍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295호). 황토현 전적지는 1894년 황토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동학 농민혁명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곳으로, 구민사는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 지도자와 다수의 동학 농민군의 위폐를 봉안하고 기리는 사당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 영정/구민사(救民祠)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 영정/구민사(救民祠) [사진=정성환 기자]
황토현 전적지 정화 기념비/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황토현 전적지) [사진=정성환 기자]
황토현 전적지 정화 기념비/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황토현 전적지) [사진=정성환 기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정읍 동학혁명기념공원 [사진=정성환 기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정읍 동학혁명기념공원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혁명기념탑/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1963년 건립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혁명기념탑/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1963년 건립 [사진=정성환 기자]

◆ 황토현 전투

동학 농민군에 의해 관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부 농민을 약탈하고 살해한 안핵사 이용태를 귀양보내고, 홍계훈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독일제 소총과 미국제 야포. 게틀링건 기관총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의 중앙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급한 마음에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 관아의 군졸들과 보부상을 모아 전라 감영군 2500명을 백산으로 출정시켜 동학 농민군을 기습공격 했다. 이에 전봉준은 패한 척 유인작전을 펼치며 황토현으로 퇴각했다. 결국, 전봉준의 유인작전에 걸려든 전라 감영군은 미리 매복해 있던 황토현에서 관군의 대장 이경호가 체포돼 처단되고 동학 농민군에게 대패했다. 이 전투가 1894년 5월 11일(음력 4월 7일) 관군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황토현 전투로,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으며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전주로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는 동학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최초로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5월 11일을 ‘국가기념일(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지정했다.

동학 농민혁명군 승전기념탑/국가유산(사적) 제406호/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군 승전기념탑/국가유산(사적) 제406호/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일대에는 황룡촌 전투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탑을 세운 기념공원이 조성되어있다. 이곳은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동학 농민군들이 관군을 격파하고 제1차 동학농민혁명을 승리로 이끈 전승지로써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힘없는 백성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5월 27일 승전 기념식 행사가 거행된다. [사진=정성환 기자]
황룡촌 전투에서 사용한 죽창, 죽총, 장태를 재현한 것./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황룡촌 전투에서 사용한 죽창, 죽총, 장태를 재현한 것./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장성 황룡촌 전투 기록화/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장성 황룡촌 전투 기록화/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 장성 황룡촌 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 농민혁명군의 사기가 전국으로 확대되자 위기감에 휩싸인 조선 조정은 홍계훈의 정예부대 장위영 군 800여 명을 전주성으로 급파했다. 이에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전봉준은 화력이 강한 관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동학 농민군을 규합해 전선을 넓히면서 북상하지 않고 남쪽으로 향했다.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들이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나주를 장악하자 많은 농민이 동학군에 가담했고 그 인원은 무려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들이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전라도의 중심인 전주를 장악해야만 했다. 전봉준은 관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부대를 나누어 전주성을 향해 북상했다.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이 1894년 4월 23일 장성에 도착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때, 조선 최정예 관군을 이끈 홍계훈은 장위영 대관 이학승에게 병력 300여 명을 주어 장성으로 진격하게 했다. 이학승의 병력 300여 명은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정예군이었고 신식 무기인 소총과 회선포를 갖추고 청나라 용병 10여 명까지 보유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였다다. 장성에 도착한 이학승은 황룡강 근처에 진을 치고 동학군을 향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황룡촌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 관군이 동학 농민군을 향해 최신식 무기인 소총과 대포로 기습공격을 가하자 순식간에 동학 농민군 5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전봉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지로 올라가 학인진을 펼치며 관군의 신식 무기에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손재주가 좋은 농민들을 불러모아 방어용 무기를 제작하게 했다. 그 방어용 무기가 바로 장태, 지금의 장갑차였다.

장태는 대나무를 쪼개서 거대한 원형으로 엮어 만든 것으로 원래 병아리를 기르기 위한 일종의 둥지 같은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은 장태 안에 짚을 넣고, 겉에는 칼을 꽂아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위에서 아래로 굴렸다. 당황한 관군들은 총을 초며 진격했지만, 관군이 쏘는 총탄은 전부 장태에 박힐 뿐이었다. 적의 신식 무기를 무력화시킨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장태를 방패로 삼아 관군의 총격을 피하면서 죽창과 화승총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관군은 강을 건너 후퇴했고, 후방에 남은 관군의 지휘관 이학승은 백병전 중 전사했다.

이것이 조선 관군과의 두 번째 전투에서 장태를 이용해 승리한 장성 황룡촌 전투이다.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관군은 큰 손실을 당하고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다. 동학 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전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동학 혁명군의 전주성 점령 기록화 [사진 출처=네이버]
동학 혁명군의 전주성 점령 기록화 [사진 출처=네이버]

◆ 전주성 점령

1894년 4월 27일의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동학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할 무렵,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 18일 파면되어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후임 감사 김학진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 이 무렵 전주를 지키던 감영군은 전봉준의 계책에 빠져 초토사 홍계훈을 따라 영광 법성포 쪽으로 남하했기 때문에 전주성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이때 동학 농민군은 4월 25일 정읍과 태인, 원평을 거쳐 26일, 전주성 앞 삼천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1894년 4월 27일(음) 3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은 장성 황룡 전투에서 노획한 대포와 신무기로 무장하고 전봉준의 지휘 아래 전주성을 향해 돌진하고, 장사꾼으로 가장한 수많은 동학 농민군은 전주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전주성을 지키던 전라감사 김문현과 모든 관원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고 없었다. 드디어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이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을 접수한 것이다.

그 무렵 영광 법성포에 진을 치고 있던 홍계훈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선봉장 이학성이 패하고 동학 농민군이 정읍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영광 법성포를 출발해 뒤늦게 김제 금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였다.

홍계훈은 4월 28일, 전주천을 건너 완산 7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향해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전주성 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이에 화가 치민 동학 농민군 1천여 명이 완산 7봉을 공격했지만,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만 했다.

전봉준의 마음은 초조했다. 관군과의 대항도 어렵지만, 동학 농민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홍계훈 역시 전주성을 탈환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전주는 조선왕조의 본관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전라도의 점령이자 조선조정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전주성 함락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큰 민란의 성공이었고 전주가 본향인 조선의 국왕 고종으로서는 자존심 상한 일이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동학 농민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자는 결정을 내린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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