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①]···밀양 의열기념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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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①]···밀양 의열기념관을 찾아서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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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기념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애용되고 있어

1909년 10월 26일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향한 안중근 의사의 총성으로 항일 의열 투쟁 시작

김원봉의 의열단, 1920년대 만주에서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 국내에서는 일제의 심장부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해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1898~ 1958) [정성환 기자]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1898~ 1958)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4) =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로 ▲1편 경남 밀양 의열 기념관을 찾아서 ▲2편 의열단 ▲3편 조선혁명선언 ▲4편 조선의용대  ▲5편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 순으로 연재한다.

의열 기념관/경남 밀양시 소재 [정성환 기자]
의열 기념관/경남 밀양시 소재 [정성환 기자]

◆ 의열 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에는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의열 활동으로 순국한 독립투사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의열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이곳에는 ‘의열 기념관’과 의열 체험관이 건립됐고 이곳엔 해천항일운동테마마거리, 의열기념탑, 밀양 3·13 만세운동 독립선언서 및 청동상 등이 설치돼 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향한 안중근 의사의 총성이 만주 하얼빈에 울려 퍼지며 항일 의열 투쟁은 시작된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19년 3월 1일 식민시대의 어둠을 뚫고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독립 만세 외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 만주에서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 국내에서는 일제의 심장부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중심엔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이 있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의 생가 밀집 지역 [정성환 기자]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의 생가 밀집 지역 [정성환 기자]

◆ 애국심에 불타는 소년 김원봉

약산 김원봉(1898 ~ 미상)은 1898년 8월 13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감천리에서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역사적으로 밀양은 조선 시대 유학자 김종직을 배출한 의로운 선비의 고장이며,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일본군을 무찔렀던 사명대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1905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압에 무릎을 끊고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는 해산되었다.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의병들이 일어나고, 1909년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총살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이 무렵 애국심이 강한 밀양에서 자란 소년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어린 나이임에도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올랐다.

그에게 항일사상을 북돋워 준 사람은 고모부 황상규였다.

황상규는 마산에 창신학교, 밀양에 고명학교를 세워 애국계몽 운동을 실천한 선각자로서 훗날 김원봉의 의열단 결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독립운동가였다.

소년 김원봉은 1905년 서당에 입학하고 1908년(11세) 밀양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해 공부하다가 1910년(13세) 동화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해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해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친척 대갓집에서 묶으며 지내려 했다. 그러나 뜻있는 이들은 모두 고생하면서 빼앗긴 국토와 잃어버린 주권을 도로 찾으려고 밤낮으로 애쓰는데, 대갓집 사람들은 크고 좋은 집에서 수많은 종을 거느리고 날마다 잘 입고 잘 먹으며 잘도 지내고 있었다.

김원봉은 그 대갓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와 집에 머무르지 않고 표충사에서 1여 년을 생활하게 된다.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절이다. 김원봉은 표충사에서 생활하며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정신을 깨우쳤다. 소년 김원봉은 <손자병서>와 <오자병서>를 읽으며 “일본의 총칼에는 총칼로 맞서서 싸우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며, 강력한 무기와 강한 군대만이 이 나라를 되찾는 데 필요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강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그의 다짐은 훗날 독립군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태극기 변천사/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정성환 기자]
태극기 변천사/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정성환 기자]

◆ 중국 톈진 망명

1915년(18세) 김원봉은 원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서울의 중앙학교에 입학한다.

중앙학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김원봉은 학창시절 웅변을 잘 했다. 김원봉이 열변을 토하면 학생들은 정신을 그에게 빼앗기곤 했다고 한다. 이 무렵 김원봉의 주의에는 민족 해방 운동에 뛰어든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청년단을 조직하고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교육계몽 운동에 정열을 쏟기도 했다. 그리고 김원봉에겐 힘이 솟아나는 소식이 전해진다. 국내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대한광복회는 총사령관 박상진과 김좌진,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진이 창설한 비밀 무장독립투쟁 단체였다. 대한광복회는 독립을 위해서는 암살, 폭동 등 모든 수단을 강구 해 친일파를 처단하고 독립자금을 확보해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대한광복군의 실체가 발각돼 총사령관 박상진이 대구감옥에서 순직하자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는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이때 김원봉도 고모부를 졸라 중국으로 가고자 했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고모부 황상규와 작별을 했다. 김원봉은 19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몇 명의 친일 지주들을 암살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조국광복을 바랄 수 없다. 오직 무력 투쟁만이 강도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한 조국광복을 이끌 수 있다”라며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1916년 10월 19세의 청년 김원봉은 드디어 고국을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모를 망명길에 올라 중국 톈진으로 향했다. 김원봉의 원대한 꿈은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김원봉은 국경을 넘으면서 다짐했다.

톈진에 도착한 김원봉은 독일인이 경영한 덕화학당에 들어가 독일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덕화학당은 독일인이 경영하는 학교였다.

김원봉은 생각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로 가서 군사학을 배워 하루빨리 훌륭한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덕화학당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는 길뿐이었다. 또한, 중국을 무대로 일본 경찰이나 헌병들을 속여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어도 배워야 했다.

독립선언서 및 청동상/의열 기념탑/밀양시 소재 [정성환 기자]
독립선언서 및 청동상/의열 기념탑/밀양시 소재 [정성환 기자]

◆ 귀향

1917년 20세의 김원봉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향에 잠시 내려와 머무른 사이 이화학당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중국이 연합국에 가입해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에 중국과 독일은 적이 되었고, 독일인이 경영한 덕화학당도 문을 닫아 독일인도 모두 추방되었다고 한다.

김원봉은 할 수 없이 1여 년을 고향에서 지내며 김두전, 이명건 등 동지 3명을 사귀게 된다. 세 사람은 모여서 산, 물, 병 등 자연의 이름을 넣어 서로 부르기 좋은 호를 만들게 되는데, 김원봉은 ‘약산’, 김두전은 ‘낙수’, 이명건은 ‘여성’으로 호를 지었다.

1918년 김원봉은 두 친구와 함께 난징으로 건너가 진링대학 영어과에 입학했다. 진링대학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써 애국지사요 독립투사인 몽향 여운형도 이 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김원봉은 진링대학에서 공부하면서도 독일 유학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김원봉은 군대의 신기술과 신무기 제조법을 알아야 무장투쟁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끝이 났다. 전쟁의 끝남은 약소민족에겐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 때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신한청년단)는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김원봉은 나라의 흥망을 외국인에게 호소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조국의 독립을 얻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고 군대를 조직하겠다는 결심으로 김두전, 이명건과 함께 서간도로 향했다.

그러던 중 김원봉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벅찬 감격에 휩싸였다. 국내에서 동포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며 3·1만세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19년 3·1만세 독립운동은 3월부터 5월까지 1천500회 200만여 명이 참가해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의 국가임을 전 세계에 알린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3·1만세 독립운동을 전해들은 김두전과 이명건은 “국내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라고 김원봉에게 제안하지만, 김원봉은 “평화시위는 동포들의 목숨만 잃을 뿐이다. 우리의 독립은 무력 투쟁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다”라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그들은 서로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김두전과 이명건은 국내로 돌아가고 만다.

우리 민족의 독립은 일본과 대적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어야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눈 것이 김원봉의 신념이었다. 김원봉은 독립투사가 되기 위해 ‘대한독립의근부’가 있는 만주 길림성으로 향했다.

길림성에 도착한 김원봉은 이범윤과 김좌진, 조선독립군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를 만나 무력 투쟁을 하기 위한 군대 양성을 역설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원봉은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군대육성 계획을 포기하고, 소수의 결사를 조직해 암살·파괴 활동을 통한 무장 독립투쟁노선을 택한다.

태항산 전투의 영웅 석정 윤세주의 집터/밀양시 소재 [정성환 기자]
태항산 전투의 영웅 석정 윤세주의 집터/밀양시 소재 [정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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