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직공원 이야기②]..."시비(詩碑)에 새겨진 문화역사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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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직공원 이야기②]..."시비(詩碑)에 새겨진 문화역사 흔적을 찾아서"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3.0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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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곳곳 시비엔 문화역사 흔적들 고스란히
충장공 김덕령의 춘산곡,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면암정 송순의 황국화가
충무공 이순신, 백호 임제, 금남공 정충신의 시조, 이수복·박봉우 시인의 봄비와 조선의 창호지 등
사직공원 표지석 [정성환 기자]
사직공원 표지석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57) =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소재한 사직공원(社稷公圓)에는 광주의 정신적인 뿌리인 눌재 박상, 조선 시조의 대가 고산 윤선도, 우국충정의 대명사 충무공 이순신 등의 문화역사 흔적들이 시비(詩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번 이야기는 "사직공원 곳곳에 산재된 시비(詩碑)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다.

 

◆공원 곳곳에 산재된 시비(詩碑)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광주 사직공원 산책로를 걷다 보면 충장로의 주인공 충장공 김덕령 의병장의 한(恨) 서린 ‘춘산곡’과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우국충정이 새겨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등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10여 개의 시비(詩碑)를 만나볼 수 있다.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춘산곡」 시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춘산곡」 시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춘산곡 -

이 시조는 호남의 영웅 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한탄하며 유언을 쓰듯 써 내려간 의병장 김덕령의 한(恨) 서린 춘산곡(春山曲)이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의병장 김덕령은 선조 임금의 시기와 질투, 조정 대신들의 음모 속에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의병장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죽음을 앞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의연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어머니 삼년상의 슬픔을 잊고 모자간의 정을 끊은 채 상복으로 바꿔 입고 칼을 차고 종군하였지만,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 충성도 펴지 못하고 불효만 하였습니다. 죄가 이러하니 신은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충효(忠孝)만을 생각했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민중의 영웅이었으며 ‘춘산곡’에 담긴 충장공의 애통한 심정은 만백성의 슬픔이기도 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명명한 광주의 심장 충장로는 일제강점기 광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 타도와 차별 교육 철폐를 요구하며 일제에 항거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현장이었고, 전두환 군부 쿠데타세력의 권력침탈에 피를 뿌리며 항거했던 ‘5.18민주화운동’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젊음과 낭만, 한(恨)이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눌재 박상의 시비(詩碑)/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눌재 박상의 시비(詩碑)/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雖遁深山晦姓名(수둔심산회성명) 깊은 산에 묻혀 이름 없이 산다 한들

有時天變亦關情(유시천변역관정) 천기 변할 때는 가슴이 조일래라

夜來風雨知多少(야래풍우지다소) 밤사이 비바람이 얼마나 휘몰아쳤는지

揮淚佳花落滿庭(휘루가화낙만정) 낙화는 뜰에 가득 눈물겹구나.

이 시비는 두 개의 산봉우리에 구름이 떠가고, 한 사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에 새겨진 눌재 박상(1474~15300)의 시(詩) ‘깊은 산에 묻혀’이다.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영천자 ‘신잠’이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파직되고, 1521년 신사무옥으로 강진에 유배되자, 눌재 박상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애통해하며 이 시를 썼다고 한다.

눌재 박상(1474~1530)은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출신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義)로운 선비였다. 그의 의(義)로운 정신은 ‘우부리 장살 사건’과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에서 찾을 수 있다.

<우부리 장살사건>이 일어난 때는 연산군이 전국에 채홍사를 파견해 미모의 여인을 색출해 흥청망청하며 폭정이 심할 때였다. 이때 나주에 사는 ‘우부리’라는 천민의 딸이 궁에 들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발탁되자, 그의 아비인 ‘우부리’는 딸의 권세를 업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아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나주 목사와 전라도 관찰사는 ‘우부리’의 딸이 연산군의 후궁이라는 위세에 눌려 그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눌재 박상은 전라도 도사를 자청해 부임한 후 ‘우부리’를 잡아들여 국법을 어긴 죄를 물어 곤장을 쳐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사건은 박상에게 크나큰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우부리’를 장살 한 이유를 밝히고 연산군의 처분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는 데, 그 사이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고 박상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게 된다.

또한, 박상은 중종반정으로 억울하게 폐위된 단경왕후 신 씨를 복위시키자는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를 올린다. 당시 이러한 박상의 행위는 반정 공신들의 무소불위한 권력에 속에서도 목숨을 건 의(義)로움이었으나 결국, 박상은 반정 공신들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당하고 유배형에 처해 진다.

1744년 영조는 박상의 의(義)로움을 높이 평가하고 삼인대(三印臺)를 세워 그의 절의 정신을 기렸으며, 정조 임금은 박상의 제문을 직접 지으며 “삼인이 걸었던 그 누대는 만고에 닳지 않으리라”라며 그의 정의로움을 극찬했다고 한다.

눌재 박상은 성품이 너무나 결백하여 훈구대신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큰 뜻을 펴지 못했으나, 연산군 후궁의 아비가 횡포를 부리자 그 죄를 추궁하고 장살 한 정의로움과, 중종의 첫 부인 단경왕후 신 씨를 왕비로 복권해야 한다는 목숨을 건 의(義)로운 실천 정신은 광주정신의 뿌리가 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 검문소에서 칠석동 벽진교 사이의 ‘눌재로’는 광주정신의 뿌리 박상 선생의 의(義)로움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시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시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성 위 누각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근심과 걱정을 할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 곡조 피리 소리가

나의 마음을 애달프게 하는구나.

이 시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에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에 주둔하면서 지은 시조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통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남해안을 장악하며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을 저지했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원균의 시기와 질투, 서인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가까스로 참형을 면하고 풀려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한다. 그 무렵 이순신을 모함하고 선조의 신임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해 전사하고 조선 수군은 궤멸 된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돌아온 이순신은 必死則生 必生則死 , 一夫當逕 足懼千夫(필사즉생 필생즉사, 일부당경 족구천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일지라도 두렵게 한다”라는 각오로 궤멸 된 조선 수군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명량 해전에서 13척의 배를 이끌고 왜선 300여 척 중 130여 척을 격침 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지만,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국한다. 시호는 충무,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영 충렬사,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고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

면앙정 송순(1493~1583)의 시비/황국화가(黃菊花歌)/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면앙정 송순(1493~1583)의 시비/황국화가(黃菊花歌)/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운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꽃이온 양 말아 임의 뜻을 알 괘라.

이 시조는 명종 임금이 옥당에 황국을 보내면서 ‘송순’에게 가사를 지어 바치라는 어명을 내리자, 송순은 임금이 옥당의 신하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작품으로써 자상특사 황국옥당가(自上特賜 黃菊玉堂歌), 황국화가(黃菊花歌)라고 불린다.

이 작품은 봄에 잠시 화려한 자태를 뽐내다 이내 시들어 버리는 복사꽃과 오얏꽃의 속성을 소인 간신배에 비유하면서 당시 반정 공신 세력가들에게 임금의 총애를 과시하지 말라고 일갈하는 시조이다.

면앙정 송순(1493~1582)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에 제수되었다. 조선 시대 삼사의 하나인 홍문관을 옥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송순은 50여 년의 무난한 관료 생활을 했으나 중종 때 반정 공신 김안로가 득세하자 고향인 담양으로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풍류로 생을 보내면서 시조·가사·시가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성격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호남 유림의 좌장이자 면앙정 사단의 대부로 추앙받았다. 호남의 명사 하서 김인후·사암 박순·고봉 기대승·재봉 고경명·송강 정철·백호 임제 등이 그의 문인이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 시비/사직공원 [정성환 기자]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 시비/사직공원 [정성환 기자]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 할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이 시조는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살았던 임제 백호가 35세 되던 해에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에 들러 황진이의 묘소를 찾아가 읊은 시조이다.

그러나 36세에 예조 정랑에 부임한 백호는 개성에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간 사실이 빌미가 되어 파직되고, 술과 시를 벗 삼아 전국을 유람하다가 부친의 복상 중에 생을 마감한다. 백호 임제는 사대주의에 매몰된 현실을 맹렬히 비판하며 자주 의식을 주창하며 시대를 앞서간 조선 시대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무덤 앞 돌비석에는 “사회적 규범인 법도를 벗어난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가 태어난 나주 회진에는 그의 자취가 서려 있는 ‘영모정’ 과 ‘백호 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금남공 정충신(1576~1636)의 시비/ 사직공원 소재
금남공 정충신(1576~1636)의 시비/ 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공산(空山) 이 적막(寂寞)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杜鵑)아

촉국흥망(蜀國興亡) 이 어제오늘 아니 거든

지금(至今)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끓나니.

이 시비는 금남공 정충신 장군이 후금과의 단교를 위해 사신을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충남 당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와의 외교단절이 또 다른 화(禍)를 불러올 수 있음을 예견하며 쓴 시조로,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금남공 정충신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고려 시대 명장 정지 장군의 9세손이다. 어머니가 노비여서 노비의 신분으로 아전에서 잔심부름하며 성장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하다 이치 전투 승전보를 가지고 나병 환자 행세를 하며 왜군을 피해 2천여 길(800km)을 달려가 의주에 피난 중인 선조에게 승전보를 전달했다.

정충신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선조의 어명으로 평민이 되고, 이항복의 총애를 받아 학문과 무예를 닦아 무과에 합격하고 양반으로 신분이 승격되었다.

광해군 때 인조반정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금남군에 봉해졌다. 인조의 친명 배금 정책을 비판하고 후금과의 단교를 반대하다 당진으로 유배되었다.

인조 때 광주 동명동에 ‘편방사’를 건립해 정지 장군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대원군 때 ‘편방사’가 철폐되고 1981년 광주에 ‘경렬사’를 복원해 동명동에서 가져온 유허비를 세우고 나주 노안면에 ‘경렬사’를 건립해 배향하고 있다.

광주의 중심지 금남로는 금남군 정충신의 충의(忠義) 정신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시비/오우가(五友歌)/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고산 윤선도(1587~1671)시비/오우가(五友歌)/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오우가(五友歌)는 조선시대 시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때 지은 연시조로 <고산유고>에 수록되어있다.

고산 윤선도가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보면서 물의 부단(不斷)함, 바위의 불변(不變)함, 소나무의 불굴(不屈), 대나무의 불욕(不慾), 달의 불언(不言) 등의 규범을 노래한 시조이다.

그는 좌절을 안겨준 현실에 무상함을 느끼고 변하지 않는 자연의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의 다섯 벗을 찬양했다. 이 작품은 자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사상이 잘 응축되어 있으며, 특히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서울출생으로 본관은 해남이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 유희분 등 당시 집권세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1628년(인조 6) 장원급제하여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자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에 잠시 머무르다 정착해 ‘부용동’과 ‘세연정’ 등을 짖고 풍류를 즐기다 해남 금쇄동에 은거했다.

71세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서인 송시열 일파의 모함으로 삭탈관직됐다.

1659년 효종이 죽고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효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효종을 서자 취급하자 격분해 상소를 올렸으나, 송시열 등 서인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남인으로서 왕권 강화를 위해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와 맞서며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 생활을 하다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함께 조선 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린다.

이수복 시비/봄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이수복 시비/봄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봄비 – 이수복(1924~1986)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 오르것다.

이 시비는 봄의 애상을 노래한 이수복의 대표적인 서정시 〈봄비〉이다.

한자어 대신 우리말을 감칠맛 있게 그려낸 작품 「봄비」는 어떠한 역사적 현실도 가미하지 않고, 순수하고 아름답게 정겨운 고향의 봄 풍경을 밝으면서도 애잔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1930년대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문학 파 순수시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수복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 여학교, 전남고교 등지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1954년 「동백꽃」, 「봄비」가를 발표해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서정주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수복 시인의 서정성은 김영랑 시인이 보여준 향토 언어 특유의 율동과 섬세한 감수성이 이수복에 이르러 시적 정서로 승화되었다고 평가했다.

1969년 그는 생전에 쓴 34편의 시를 한데 묶어 한 권의 시집인 〈봄비〉를 발간했다.

박봉우 시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박봉우 시비/사직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朝鮮의 창호지 – 박봉우(1934~1990)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하늘만큼 한 사연을...

눈물 흘리지 말고

웃으며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하늘만큼 한 밤을...

조선의 창호지에

눈물을 그릴 수 있다면.

박봉우 시인은 광주 출신으로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59년 전남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詩)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분단 조국의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4·19혁명 이후 타락한 현실에 대한 허무감과 비판의식을 담아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표현한다.

특히, 그의 시 「백두산」에서는 분단을 극복하는 의지로 통일의 염원을 노래한 것으로, 그는 분단 비극의 시인이자 통일지향의 시인으로서, 30년이 넘는 세월의 고통 속에서도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현실에 저항하며, 시로써 민중의 가슴을 울리고 사라져간 ‘신서정’을 탐구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박봉우 시인의 ‘신서정’이란 개인적인 열정과 저항, 고독 등을 초월하여 민중과 함께 민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감정으로 현실에 대한 저항 및 도전을 표현하는 시 정신을 뜻한다.

조선의 창호지엔 햇살을 통과시키는 투명성과 바람을 막아내는 불투명성이 동시에 존재한 것으로, 조선 민족의 한(恨)은 크고 크지만, 눈물로 창호지가 얼룩진 적은 없다. 한을 품고도 세월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웃으면서 서러워하는 한(恨)의 정서가 조선(朝鮮)의 창호지에 스며있는 것이다.

「朝鮮의 창호지」의 시인 박봉우가 창호지에 그리고 싶은 눈물은 바로 창호지에 배어있는 오랜 세월의 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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