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이야기⑨]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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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이야기⑨]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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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6. 26 극우세력 사주 육군 소위 안두희 흉탄에 일흔넷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 마감
그의 마지막 길 하늘도 울고 땅도 울며, 100만여 명이 넘는 조문객이 눈물을 뿌리며 뒤따라
자주독립과 민족을 지키려 했던 백범 김구...겨레의 큰 스승이자 위대한 지도자로 기록
백범 김구/백범기념관 [출처=네이버]
백범 김구/백범기념관 [출처=네이버]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 54] 정성환 전문기자 =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마지막인 「제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中 -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에 선 김구/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에 선 김구/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김구의 남·북 협상

미국은 1·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 후 한반도 문제를 UN 총회에 넘겨 해결하고자 했다.

1947년 UN은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정부수립을 결정하고 UN 선거관리 임시위원단을 파견하기로 한다.

이 소식에 전해지자 이승만과 한국민주당(한민당) 송진우·김성수 등은 환호성을 질렀으나 소련과 북한은 크게 반발했다.

북한은 이미 1946년부터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해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인구 비례로 선거를 치른다 해도 인구가 남한보다 2대 1로 열세여서 의석수를 확보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8년 1월 UN은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 ‘UN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지만, 소련과 김일성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절한다.

소련과 북한의 반대로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지 못하자, UN은 한국의 문제를 UN 소총회에 넘기게 되고, UN 소총회는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하라는 것이었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남과 북의 분단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민한당은 남·북분단과는 상관없다는 듯 UN 소총회 결정을 지지했고, 이것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이어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현실로 다가온다.

이에 김구는 UN 소총회 결정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남이 그어놓은 북위 38도 선을 국경선으로 정하고 남과 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면, 우리의 국토와 민족은 분단되고, 남과 북의 형제자매가 서로 총을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구는 1948년 1월 미·소 양군 철수와 남·북 회담을 통한 통일 정부수립을 주장하고 나선다. 평생을 독립투쟁에 헌신한 민족주의자 김구로서는 민족 분단의 시작점이 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피를 토한 심정으로 「삼 천만 동포에게 울면서 고함(泣告)」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의한 단독정부 수립 방침을 비판하고 나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그의 절규는 분단을 막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통일 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자며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 38도 선을 넘어 북으로 갈 것을 결정한다.

 

김구 평양연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 평양연설/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1984년 4월 19일 김구가 북한에 김일성을 만나러 간다는 소식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교장으로 몰려들었고, 김구는 나라가 분단되는 것을 두 손 놓고 볼 수 없었기에 첩보작전을 하듯 경교장을 빠져나와 38도 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 김두봉 등 남북의 인사들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막고 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결정서와 공동성명 등을 채택하지만, 협상 과정은 어려웠다. 김구가 평생을 간절히 원했던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었으나 단독선거를 저지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짧았고 역부족이었다.

이미 정권 수립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낸 북한은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남북협상을 이용하려 했을 뿐 민족 통일 정부수립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구 일행은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김구가 그토록 원했던 남북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사회주의 세력과 일부 주민이 미군철수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5·10 총선거반대 투쟁에 나선다.

이것이 해방 후 동족상잔의 첫 번째 비극인 제주 4·3항쟁이다.

4·3항쟁은 미 군정과 대한민국의 경찰, 서북 청년당 등 우익세력의 잔혹한 진압으로 제주 인구의 10~30%에 이르는 3~8만여 명이 학살되는 대참사였다.

이 같은 민족의 아픔 속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총선거에 불참한 가운데 남한에서는 5월 10일 총선거가 치러진다.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이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해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남한에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북한의 김일성 역시 기다렸다는 듯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로써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으며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결국, 남북분단의 배경엔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 있었고, 이승만의 정읍 선언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가져왔으며,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한반도 분단의 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38선/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출처=네이버]
38선/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출처=네이버]

 

◆ 남·북 분단

한국의 분단과정은 마치 짜진 각본처럼 진행되었다.

첫 번째 과정은 1945년 미·영·소 얄타회담에 있었다. 회담의 주요 내용은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전하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된 한반도를 전후 처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고 통치한 것은 한반도가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의 전리품으로 전락했음을 뜻하며, 또한 38도 선의 경계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과정은 1947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대 공산세력에 대한 외교정책(트루먼 독트린)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분단’이다. 남한에서는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했고,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으로 산업국유화 등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되면서, 남과 북이 이념적·체제적 분단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과정은 ‘정부수립에 의한 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과 북한이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수립을 하자”라는 유엔결의안을 거부하자, 남한의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의 의지를 가시화했다.

결국, 이승만과 김일성이 개별적으로 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은 소련과 미국 중심의 UN이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UN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북한의 불법적인 정부수립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남·북 분단은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의 이권, 이승만과 김일성의 권력욕이 빚어낸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 된 세계 유일의 분단국 한반도는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아픔 속에서도 백범 김구 선생이 그토록 갖고 싶었던 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꿈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처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되면 남·북한 국토가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라는 김구의 예언이 현실로 다가온 가슴 아픈 역사였다.

 

경교장/강북삼성병원 내 소재[사진 출처 네이버]
경교장/강북삼성병원 내 소재 [출처=네이버]

 

남한과 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이후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진 경교장에서 김구는 자신을 향해, 그리고 후세를 향해 다짐을 써 내려간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踏雪夜中去, 답설야중거)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不순胡亂行, 불순호란행)

오늘 나의 발자국은(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뒤에 올 사람의 길이 된다(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백범 김구-

 

서거 직후 모습/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서거 직후 모습/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경교장에 차려진 빈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경교장에 차려진 빈소/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장례행렬/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장례행렬/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 묘소/효창공원 소재 [출처=네이버]
김구 선생 묘소/효창공원 소재 [출처=네이버]

 

◆ 겨레의 큰 별 지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4발의 총성이 울리며 민족의 큰 별 백범 김구는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극우세력의 사주를 받은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우리 민족의 아픔을 뒤로하고 일흔넷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백범 김구, 그가 떠나는 마지막 길을 하늘도 울고 땅도 울며, 100만여 명이 넘는 조문객이 눈물을 뿌리며 뒤를 따랐다.

김구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 선생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위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스스로 자신을 ‘백정범부(白丁凡夫)’로 낮추고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에 스러져가는 임시정부를 일으켜 세우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했던 백범 김구, 그 거대한 몸짓과 거목 같은 존재감으로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뤄 민족을 지키려 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은 큰 감동이었고 겨레의 큰 스승이었으며 위대한 지도자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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