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무등산 당산나무, 추억의 보리밥집...故 노무현 대통령도 다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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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무등산 당산나무, 추억의 보리밥집...故 노무현 대통령도 다녀가
  • 신종천 선임기자
  • 승인 2022.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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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쉼터, 故 노무현 대통령도 다녀간 곳
멸치 젓갈 곁들여 먹는 보리밥의 맛! 신의 한 수!
보리밥집 주인의 후한 인심, 아직도 못잊어...
당산나무 쉼터. 2007년 5월 19일 故 노무현 대통령도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무등산에 오르면서 산행 중인 시민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며 쉬었던 곳이다./신종천 선임기자
" 당산나무 쉼터 "   2007년 5월 19일 故 노무현 대통령도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무등산에 오르면서 산행 중인 시민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며 쉬었던 곳이다./신종천 선임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신종천 선임기자 = 무등산은 어머니의 품과 같이 포근하고 아름다운 산이다. 70년대만 해도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등산객들에게는 중머리재까지만 발길을 허용했다. 그러던 무등산이 2024년이면 천왕봉이 있는 정상부위의 방공포대가 완전히 철수하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것으로 전망돼 기대가 매우 크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등산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에도 산을 다니던 사람들은 주로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산악부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은 암벽등반 훈련을 하며 오르내리는 길목이 바로 무등산 당산나무가 있는 성촌마을(성거리)이다. 지금은 성촌마을이 신림마을이라 불리고 있으며 어떤 경로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무등산 당산나무

이곳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화순 동복(동북형)·이서면 주민들이 도원마을에서부터 긴 골짜기(장골제)를 넘어 성촌마을(성거리)을 지나 광주읍성으로 이어지는 나들목 길이어서 느티나무 아래엔 길손들이 솔바람과 함께 쉬어 가는 곳이었다. 당산나무를 가기 위해서는 무등산의 대표 사찰인 증심사 일주문을 지나 우측으로 중머리재 이정표를 따라 약 20여 분을 오르면 십자가를 단 조그만 교회가 보인다. 이곳엔 '신림교회 오방수련원'이라 적혀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광주 최초의 장로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이곳 신림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50년 4월에 설립한 교회라 한다. 지금 이곳은 형태만 갖추고 보존을 하고 있다.

'신림교회 오방수련원'. 광주 최초의 장로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이곳 신림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50년 4월에 설립한 교회.
'신림교회 오방수련원'. 광주 최초의 장로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이곳 신림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50년 4월에 설립한 교회.
'신림교회 오방수련원'. 광주 최초의 장로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이곳 신림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50년 4월에 설립한 교회.
'신림교회 오방수련원'. 광주 최초의 장로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가 이곳 신림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1950년 4월에 설립한 교회.

그리고 교회를 지나 대숲 사이로 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당산나무가 우뚝 서있고, ‘송풍전’(松風亭)이라 쓰여있는 쉼터가 있다.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서 등산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쉬고 있다. 수령이 약 5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는 마을 지킴이로써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동네 사람들은 매년 당산제를 지냈을 것이다. 노란 멍석이 깔리고 잘 다듬어진 데 그 길을 성큼성큼 지난다. 이 길은 2007년 5월 19일 故 노무현 대통령께서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무등산에 오르면서 산행 중인 시민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며 쉬었던 곳이다. 지금 이 길은 노무현 길이라 명명하고 있다.

 

1970년대 당시 고등학교때부터 산악부 활동을 했던 사진가 박종호 씨는 동료인 김요한, 김영식 씨와 함께 보리밥집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당시 무등산을 자주 찾던 박 씨는 상점 주인의 후한 인심에 줄곧 외상으로 끼니를 때우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당산나무 보리밥집이 처음에는 담배와 라면을 파는 상점이었는데 등산객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줄 보리밥집이 생겼으며, 멸치 젓갈과 곁들여 먹는 보리밥의 맛은 신의 한 수였고, 파전에 막걸리 한 잔 들이켜며 원기를 충전하고,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던 곳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또한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군인들이 종종 민가에 내려와 허기를 달랬으며, 마을 처녀들이 군인들과 조혼을 하는 경향도 많았다고 전한다.

1970년대 당산나무 보리밥집 가는길, 그리고 보리밥집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건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1970년대 당산나무 보리밥집 가는길, 그리고 보리밥집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건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1970년대 당산나무 보리밥집 가는길, 그리고 보리밥집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건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1970년대 당산나무 보리밥집 가는길, 그리고 보리밥집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건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1970년대 당산나무 보리밥집 가는길, 그리고 보리밥집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건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1970년대 당산나무 보리밥집 가는길, 그리고 보리밥집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건물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 보리밥집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얼추 30여 년 전으로 추정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보리밥집이 무허가로 건축물을 지어 대면서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광역시는 식당을 집단시설지구로 이전하는 것을 추진하여 주민들과 합의하였고, 옛 모습으로 복원한 후에는 눈에 띌 정도로 쾌적하고 깨끗해졌다. 지금 국립공원 무등산 사무소는 쾌적한 시민들의 산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는 보리밥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무허가로 건축물을 지어 대면서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철거 되고, 집단시설지구로 모두 이전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는 보리밥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무허가로 건축물을 지어 대면서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철거 되고, 집단시설지구로 모두 이전했다./국립공원 무등산관리사무소 제공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동쪽과 담양군, 화순군에 걸쳐 우뚝 솟아있다.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으로 동서남북 어디에서 조망을 하여도 산줄기와 골짜기가 뚜렷하지 않은 둥근 모습을 하고 있다. 광주의 옛 이름을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라 해서 이 고을의 진산인 무등산도 일찍이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불렸다. 산정상은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등 3개의 암봉으로 이뤄져 있어서 이를 '정상 3대'라고도 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규봉, 입석대, 서석대 등의 이름난 기암괴석과 증심사, 원효사, 약사사 등의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1972년에는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고, 2013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21번째 국립공원이 되었다. 최근에는 생태적 가치와 지질학적 가치까지 인정받아 2018년에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받은 호남의 명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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