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스승 백범(白凡) 김구 이야기①] 광주 백범기념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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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스승 백범(白凡) 김구 이야기①] 광주 백범기념관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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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고향으로 가던 중 일본군 살해...'김구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 시작'
1898년 감옥살이 중 탈옥, 광주 천변 학동마을에 머물면서 광주와 인연 시작
광주시, 김구 선생과 학동 백화마을 인연...학동에 역사공원 조성 및 ‘백범기념관’ 개관
백범 김구(1876~1949) [사진=정선환 기자]
백범 김구(1876~1949)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6] 정성환 기자 = 이번 이야기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외치고,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 김구 선생이야기 중 「제1편 광주 백범기념관을 찾아서」다.

이야기는 총 9편으로 1편 광주 백범기념관, 2편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 3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편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 5편 김구의 한인 애국단, 6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과 대한광복군 창설, 7편 광복과 김구의 환국, 8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의 분열, 9편 남·북분단과 겨레의 큰 별 지다 순으로 매주 월요일 연재된다.

◆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 이야기 「제1편 광주 백범기념관을 찾아서」

광주 백범기념관/광주광역시 학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백범기념관/광주광역시 학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의 정치후원금으로 세워진 광주 학동 전재민 촌(백화마을)/사진 제공 안현주/전시실
김구의 정치후원금으로 세워진 광주 학동 전재민 촌(백화마을)/사진 제공 안현주/전시실
김구 선생과 광주지역 유지들(1946)/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김구 선생과 광주지역 유지들(1946)/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애국부인회 회원/1줄 왼쪽에서 두 번째 조아라 여사(1946)/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애국부인회 회원/1줄 왼쪽에서 두 번째 조아라 여사(1946)/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백범 김구와 백화마을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평생을 조국의 자주독립과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 김구 선생이다.

백범 선생이 광주에 처음 온 것은 1898년이었다.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수가 되었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고종 황제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감옥살이를 하던 중 탈옥해 광주 천변 학동마을에 잠시 머물면서 광주와의 인연은 시작되고, 1946년 ‘김구 선생 환영 기념강연회’가 광주 대성초등학교에서 열린다.

이때 독립운동가인 ‘서민호’ 광주 부윤(현 광주시장)으로부터 전재(戰災)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김구는 동포들을 위해 후원금을 기부한다.

당시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1013번지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고국을 떠나 일본·중국 등지에서 살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광주로 돌아온 동포들이 천막을 치고 힘든 생활을 하던 삶의 터전이었다.

이 터전 위에 김구의 후원금으로 전재(戰災) 동포들을 위한 백화마을이 조성된다.

당시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딸린 4~5평의 판잣집 100여 가구의 보금자리가 들어서고, 김구 선생은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기 바란다“는 뜻의 ‘백화(百和)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백화마을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했고,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옆집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으며, 사람들은 백화마을이 한 지붕 마구간처럼 나란히 이어졌다며 ‘말 집’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2011년 환경정비사업으로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백화마을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백범기념관이 건립되어 김구 선생의 애민정신을 기리고 있다.

◆ 광주 백범기념관

광주광역시에서는 백범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후세에 남겨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옛 백화마을 있던 곳에 학동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백범문화재단에서 재원을 마련해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6주년 기념일인 2015년 10월 26일 ‘광주 백범기념관’을 개관한다.

학동 역사공원은 김구 선생의 애국심과 광주 백화마을을 기념하고 기록하는 테마공원으로 건립되었으며, 김구 선생의 동상과 일대기, 휘호 기록판, ‘말 집’처럼 집 구조가 한 지붕 아래 6가구가 나란히 이어진 마구간 모양의 가옥형태인 말 집을 상징화한 ‘말 집 쉼터’ 등의 자료를 전시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를 열망했던 김구 선생의 염원을 담아냈으며, 학동 역사공원, 전시실, 교육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김구 선생이 두 아들(인, 신)과 민족에게 남긴 백범일지(白凡逸志), 북한의 김두봉에게 보냈던 납북협상 서신, 광주 최흥종 목사에게 써준 화광동진(和光同塵) 휘호 등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자료(복제본)들과 김구 선생의 생전의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 등을 감상할 수 있으며, ‘광주백범기념관’은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백범 김구의 가족/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백범 김구의 가족/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김구의 출생과 성장

백범 김구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해인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김구의 조상은 대대로 한양에 살았는데 조선 효종 때 ‘김자점’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 숨어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학식은 없었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 대했고, 양반들의 횡포에는 굴하지 않는 성정으로 해주 감영에 자주 불려가는 등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면서 빈곤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김구는 이렇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김구의 어릴 때 이름은 ‘창암’이다. ‘창암’은 어릴 적 아버지의 멀쩡한 수저를 부러뜨려 엿을 사 먹거나 아랫목에 숨겨둔 돈을 들고 떡 사 먹으러 가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지람을 많이 듣고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마냥 해맑기만 했던 김구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다.

집안에 혼인할 친척이 있었는데 그 친척 할아버지가 사돈을 만나기 위해 갓을 쓰고 나갔다가 이웃 동네 양반들에게 ‘상민인 주제에 갓을 쓰고 다닌다’라며 갓을 찢기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본 어린 김구는 계급사회의 모순된 현실의 벽에 큰 충격을 받게 되고, 과거에 급제해 양반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서당을 다니게 된다.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아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고 우리는 상놈이 되었는지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강 씨나 이 씨의 조상은 우리보다 못하지만, 현재 진사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느냐’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는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백범일기 中-

신분 차별의 아픔을 극복하려면 과거에 합격해 양반이 돼야 한다고 다짐한 김구는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9살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워 책을 읽을 수 있었고, 12살이 되어 아버지를 졸라 서당에 다니며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학문 실력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구는 17세가 되던 해에 황해도에서 치르는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만다.

당시 과거시험은 돈으로 급제하고,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대였기에 처음부터 합격은 불가능했다.

결국,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고자 했던 김구는 과거제도의 타락상을 보고 양반이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관상학과 풍수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관상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된 김구는 더욱더 깊은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김구는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라는 관상서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결심한다.

그러나 김구는 이처럼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돌파구를 찾아보지만, 신분 차별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조선 말기는 꿈많은 그에겐 너무나 숨 막히는 시대였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 내 얼굴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런데 어는 한 군데도 귀(貴)와 부(富)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빈격·흉격만 있었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 벗어나기 위해서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 버렸다.” -백범일지 中-

◆ 동학농민운동과 김구

김구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건 만민이 평등하다는 동학사상을 접하면서부터 시작된다.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한 김구는 어린 시절 이름 ‘창암’을 버리고 ‘창수’로 이름을 바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상놈 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조선의 운세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 나는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백범일지 中-

김구는 18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수많은 사람을 동학교도로 이끌었으며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팔봉접주’로 임명된다.

1894년(19세) 반봉건적 외세 척결을 주장하는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김구는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에 저항할 겨를도 없이 대패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행스럽게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당시 안태훈은 동학군을 토벌하던 양반 출신 관군이었으나 김구의 명성과 인물됨을 높이 평가해 그를 돕게 된 것이라고 한다.

김구는 안태훈의 집에 기거하면서 평생의 스승인 성리학자 ‘고능선’선생을 만나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김구의 스승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성리학자였으며 특히 그의 과단성과 결단성의 가르침은 김구가 민족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당시 국제정세는 청나라가 쇠퇴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부상하는 시기였다.

김구는 스승의 권유로 세계정세의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 청나라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잠시 ‘김이언’ 의병부대에 합류해 고산리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이후 김구는 반일 인사들과 만나 일제에 항거하는 계획을 수립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귀향하게 된다.

김구는 1896년 3월 9일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일본군 츠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김구의 파란만장한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제2편 치하포 사건과 보성 은거가(隱居家)>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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