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광주공원이 품고 있는 광주의 정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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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광주공원이 품고 있는 광주의 정신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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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서울 마산과 더불어 4·19혁명 전국 3대 발상지 중 하나
광주공원이 품은 광주 정신은 "불의에 항거한 학생들의 의로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4·19 혁명으로 또 5·18민주화운동으로 계승..."민주·인권의 광주 정신"으로 승화
광주공원 입구. /정성환 기자
광주공원 입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6]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광주광역시 최초의 공원인 '광주공원의 문화역사이야기 2편 중 마지막 편인 '광주공원이 품고 있는 광주의 정신을 찾아서'이다. 광주공원에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으며, 전두환 쿠데타세력의 권력 찬탈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항거한 광주 5·18 시민군의 한(恨)이 서린 곳이다.

 

◆ 아픈 역사 속에 탄생한 광주공원
광주의 비보림(裨補林) 역할을 하며 사랑받았던 성거산은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고난을 겪으며 광주공원으로 탈바꿈한다.
1908년 일제는 한·말 호남 의병과의 전투에서 중에 사망한 일본 군인과 경찰들의 명복을 빈다고 거북이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성거사지오층석탑’ 부근에 ‘전남충혼탑’을 세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1913년 일제는 광주~남평 간 신작로를 내기 위해 성거산을 파헤쳐 두 동강 냈으며, 토종 나무를 베어내 일본 국화인 벚꽃 나무를 심어 공원을 만들어 구강공원(광주공원) 이라고 했다.
이것도 모자라 일제는 1924년 일본 왕태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사직산을 파헤치고 벚꽃 나무를 심어 사직공원을 만들고, 구강공원을 구 공원, 사직공원을 신 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1917년 일제는 성거산 정상(지금의 현충탑 자리)에 자신들의 시조(천조 대신)를 받드는 신사를 건립하고 1924년 신사 입구에 5.5 미터 높이의 ‘도리이’를 세운다.
신사란 일본 천황을 신처럼 숭배하고 순종하겠다는 의미로 의식을 행하는 장소이다. 일제는 전국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조선인에게 강제로 참배하게 하는 등 고통을 주고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정책에 이용했다.

조선인은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는 고통을 겪었고, 특히 수많은 기독교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숭일학교, 수피아학교는 문을 닫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1929년 11월 3일은 일제가 조선인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날이기도 하다.

이처럼 천 년 동안 평화롭게 광주를 지켜왔다고 믿었던 성거산의 거북 형상은 제모습을 잃은 체 서서히 흔적없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이한 광주 시민들은 ‘전남충혼탑’을 산산조각내고 그 자리에 ‘해방기념탑’이 세워지고 1961년 전국 최초로 안중근 의사 숭모비가 건립된다. 이후 안중근 의사 ‘숭모비’는 1987년 중외 공원으로 옮겨진다.

◆ 광주공원에서 사라진 흔적들
1913년 광주공원이 건립된 이후 역사의 흐름 속에 사라진 흔적들도 많다.
1963년 광주신사 자리에 <우리위한 영(靈)의탑>을 세우면서 우리 지역 최초 ‘전남도립광주박물관’이 건립되어 20여 년간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개관되면서 1984년 문을 닫고 헐리게 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00년대에 광주의 3대 갑부 ‘지응현’은 ‘성거사지5층석탑’ 옆에 시민의 휴식을 위해 붕남정(鵬南亭)을 지어 광주시에 기증했는데 안타깝게도 1965년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구동체육관을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고 한다.

농구, 배구, 복싱, 체조 등 체육행사와 미인선발대회가 열러 광주 시민의 함성이 가득했던 구동체육관은 2008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시민들의 복합문화커뮤니티센터인 ‘빛고을 시민문화관’이 2010년 건립되어 문화와 낭만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1970~80년대 인기를 끌었던 구동체육관 주변 국밥집들은 평소 광주 시민의 애환이 서린 장소였는데 지금은 남광주 시장이나 대인시장 등으로 흩어지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일제 잔재물/광주신사 계단/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일제 잔재물/광주신사 계단/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광주신사 계단
광주공원 광장에서 현충탑을 오르는 계단은 일제강점기에 신사로 올라가기 위해 세워진 계단이다.
이 계단 사이사이에는 “일제 식민통치 잔재물인 광주신사 계단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문구는 2019년 8월 8일 광주공원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 잔재물을 알리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이 계단은 신사를 짓기 위해 성거산 거북의 등허리를 파헤치고 발을 끊어 돌계단을 만들었으며, 계단 주변의 토종 나무들을 베어내고 벚나무를 심어 성거산의 원형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현충탑(영원의 빛)/2015년 건립/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현충탑(영원의 빛)/2015년 건립/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우리위한 영의 탑’의 흔적/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우리위한 영의 탑’의 흔적/광주공원 소재/1963년 5월 29일 “우리위한 영의 탑”으로 건립되었던 현충탑의 독수리 브론즈 및 부조 벽을 재설치하여 그 역사성을 보존하고 있다./정성환 기자

 

◆ 현충탑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면서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 널브러진 광주공원의 상흔을 씻기 위해 광주 시민들은 30년 동안 성거산을 멍들게 한 ‘광주신사’를 불태우고, 1963년 신사 자리에는 6·25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순국한 광주·전남의 전몰 호국 용사 1마5867명을 기리 위한 충혼탑(우리위한 영(靈)의 탑(塔)을 세운다.
현재의 현충탑은 2015년 “영원의 빛”을 주제로 화강석과 스테인레스 재질로 조형미를 살려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현충탑의 탑신은 6·25 호국영령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6각형 기단과 25m 높이로 형상화해 6.25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현충탑 바로 옆에 위패봉안소가 마련돼 1만 5,800여 명의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있다.

4·19의거 영령추모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4·19의거 영령추모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광주 4·19 민주혁명 발상지/광주고등학교. /정성환 기자
광주 4·19 민주혁명 발상지/광주고등학교. /정성환 기자

 

4·19 민주혁명 역사관/광주고등학교 소재. /정성환 기자
4·19 민주혁명 역사관/광주고등학교 소재. /정성환 기자

 

◆ 4·19의거 영령추모비
광주는 서울 마산과 더불어 4·19혁명 전국 3대 발상지 중 하나다.
또한, 광주는 1960년 3월 15일 전국에서 최초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에 항거하며 전국 최초로 시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날 시위는 민주당원과 광주 시민 1200여 명이 낮 12시 45분 금남로에 모인 가운데 ‘민주주의 사망을 애도한다’라는 뜻의 “곡(哭) 민주주의” 장송이 금남로에 울려 퍼지면서 상복을 입고 시위는 시작되었다.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요구하며 전국 최초로 시위가 전개된 금남로 행진은 상복을 입은 시위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일어나면서 경찰의 무자비한 총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학생의 주검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광주와 전주, 부산과 마산, 서울 등 대도시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독재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한다.

광주의 4·19혁명은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 이홍길(광주고 3년)이 있었다.
이홍길은 고려대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친구 10여 명과 함께 시위를 모의하고 19일 1교시 종소리를 신호로 거리로 뛰어나와 시위를 주도했다.
오후 2시 금남로는 학생들로 가득 찼고 시민들도 합류해 시위대가 수천으로 불어나자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으로 가했고 광주 학동파출소 앞에서 시위하던 강정섭(17세)이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광주에서 4·19혁명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당시 학생 시위대의 최대의 격전지는 광주경찰서였다고 한다.
1천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경찰서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으로 맞섰으나 시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얼마후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고 시위대가 쓰러지면서 금남로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후퇴하는 시위대를 쫓아가면서 총격을 가했고 이귀봉(18세) 등 7명이 금남로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그리고 무장한 군인과 장갑차의 공격으로 시위대는 해산된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추모하고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2년 4월 19일 광주공원에 광주 4·19의거 희생 영령 추모비를 세우고, 우측에는 당시의 시위 모습을, 좌측에는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국문학자)의 시를 새겼다.

“자유여 영원한 소망이여.
피 흘리지 않곤 거둘 수 없는 고귀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맨가슴을 총탄 앞에 헤치고 달려왔더이다.
불의를 무찌르고 자유의 나무의 피거름 되어
우리는 여기 누워 있다.
잊지 말자, 사람들아.
뜨거운 손을 잡고 맹세하던
아 그날 4월 19일을.”
-조지훈 지음-

광주공원에 스며있는 광주 정신은 불의에 항거한 학생들의 의로움이다.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4·19 혁명의 정신은 전두환 쿠데타세력에 저항하는 518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어 민주·인권의 광주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어린이헌장 탑(옛 사마제 터)/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어린이헌장 탑(옛 사마제 터)/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어린이헌장 탑
‘어린이헌장 탑’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날 지정(1946년 5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 1959년에 5월 5일 광주공원 중앙광장에 설치한 것인데 19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곳은 광주향교의 부속건물인 ‘사마제’ 터로서 생원과 진사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친목을 다졌던 곳이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사마제’의 기능도 유명무실해졌고, 이후 광주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사마재’에서 문을 열었다.

5·18 시민군 김 군 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5·18 시민군 김 군 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제20호/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제20호/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광주공원 광장
광주공원 입구에는 5·18 시민군(김 군) 동상과 ‘5·18 사적 표지석’을 세워 1980년 5월 전두환 쿠데타세력의 권력 찬탈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 걸고 항거한 광주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광주 시민들은 내 가족과 시민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인근 시·군 지역의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이곳 광주공원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1980년 5월 이곳에 모인 광주의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조를 편성해 사격훈련을 하고 계엄군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 목숨 걸고 항전했다.
이때부터 광주 시민을 지키기 위해 계엄군에 맞서 항거한 시민의 군대란 뜻으로 ‘시민군’이라 불리게 된다.
광주 오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시민회관은 광주 시민이 안고 있는 한(恨)을 문화와 예술로 승화한 문화공간으로써 광주공원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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