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공원에 스며있는 문화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상태바
'광주공원에 스며있는 문화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7.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공원, 1913년 성거산(聖居山)에 조성된 광주 최초의 공원
성거산, 거북이가 사는 신성한 산 성구산(聖龜山)이라고도 지칭...이 연유로 광주공원을 구동 공원, 광주공원 옆 동네를 구동(龜洞)이라 함
성거사지 5층 석탑(보물 제109호), 4·19의거 영령 추모비, 용아 박용철·영랑 김윤식 시비 등 문화유적지 공원 내 산재...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5]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광주광역시 최초의 공원인 '광주공원의 문화역사와 광주의 정신'을 살펴보기로 하자. 1편은 광주공원 내에 산재해 있는 문화역사의 흔적을 살펴보고 2편에서는 광주공원에 새겨진 광주의 정신을 알아본다.

광주공원 입구. /정성환 기자
광주공원 입구. /정성환 기자

 

◆ 광주공원과 성거산

<광주공원>은 1913년 성거산(聖居山)에 조성된 광주 최초의 공원이다.

성거산은 중생대 백악기에 땅이 솟으면서 만들어진 구릉 형태의 낮은 산으로 이 산의 형태가 사람에게 복을 주는 성스러운 거북의 형상을 닮아 성거산이라 불렸다.

성거산의 모양을 보면, 성거사지 부근은 거북의 머리 부분이고, 성거사지 5층 석탑의 자리는 거북의 목이며, 현충탑이 있는 자리는 거북의 등에 해당하고 광주향교 부근이 거북의 꼬리 부분이라고 한다.

광주 옛사람들은 광주를 지켜준 진산을 무등산이라 했고, 또 다른 진산을 광주공원이 있는 성거산이라고 믿었으며, 성거산을 거북이가 사는 신성한 산이라 하여 성구산(聖龜山), 구강(龜岡)이라고도 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1980년대까지 광주공원을 구동 공원, 광주공원 옆 동네를 구동(龜洞)이라고 불린다.

예로부터 성거산 아래는 광주천이 흐르면서 상류에서 흘러온 흙과 모래가 쌓여 드넓은 백사장이 만들어졌는데 이 백사장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줄다리기, 씨름, 제기차기 등을 즐기는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흔적없이 사라진 백사장은 주차장과 온갖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광주공원에는 광주 성거사지 5층 석탑(보물 제109호), 4·19의거 영령 추모비,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 용아 박용철·영랑 김윤식 시비, 현충탑과 위패봉안소, 광주 사적 비석 군, 5·18 사적지 표지석, 일제강점기 잔재물인 광주신사 돌계단 등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성거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9호/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성거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9호/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성거사지 오층석탑(광주서 오층석탑)

고려 시대 성거산(聖居山)에는 ‘성거사’라는 절과 오층석탑이 세워졌는데 1천여 년이 지난 지금은 성거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석탑만이 홀로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우뚝 서 있다. 이 석탑이 보물 제109호인 광주 성거사지 5층 석탑(광주서5층석탑)이다.

<성거사지 오층석탑>은 성거산에 건립된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서 이 부근은 성거사(聖居寺) 터였다고 한다.

이 탑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2단 기단 양식에서 고려 시대 1단 기단 양식의 변천사를 알 수 있다.

또한, 지붕돌 추녀와 몸돌의 알맞은 비례감과 위로 오르면서 줄어드는 비율로 인해 탑의 모양이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안정감을 더해준다.

1층 전체의 몸돌이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 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한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아래위 모두 약간씩 치켜 올려진 모양이며, 1층 몸돌과 3층 몸돌은 보수할 때 새로 보충해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1961년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석탑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리갖춤’은 통일신라 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이 탑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거사지오층석탑>이 세워진 성거산(聖居山)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는데 거북이 등에 해당하는 위치에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5층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성거사와 오층석탑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예로부터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로 상서로운 동물로 장수와 복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거산의 거북이가 광주천을 향해 북쪽으로 떠나려 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광주의 복이 빠져나가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거북이가 떠나버리면 광주 고을이 발전할 수 없다’라고 믿었던 옛 광주사람들은 거북이가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에 해당하는 위치에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절을 지을 때마다 무너져내려 절을 지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마침 어떤 도승이 나타나 거북의 목 부분에 탑을 세우면 절이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주자 고을 주민들은 거북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무거운 오층석탑을 세워 거북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 성거사(聖居寺)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 년 동안 평화롭게 광주를 지켜왔던 성거산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모습을 잃어버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해방 직후 8만여 명이던 광주가 인구 150만여 명의 거대도시로 발전한 것은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을 붙잡고 있는 석탑이 아직도 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광주사적비군/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광주사적비군/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일제 국권 피탈 협력자 선정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일제 국권 피탈 협력자 선정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광주사적비군

향교에서 광주공원으로 오르는 길목에 <광주사적비군>이 있다.

이 사적비는 광주 시내에 분산되어 세워진 비석들을 한군데로 모아 1965년 현 위치에 27기 비석 군을 조성한 곳이다.

이곳에는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와 <목사양공응천선정비> 및 목사·군수·찰방 등을 기리는 다수의 비가 세워져 있다.

선정비란 관찰사와 부사 등 고을의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이룩한 공적이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비로써 칭송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선정비, 영세불망비, 거사비, 유덕비 등 다양한 명칭의 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비석 군에는 일제 국권 피탈 협력자 선정비도 있다.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는 광주 목사를 지낸 권율의 선정비이다.

권율(1537~1599)은 강화도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그의 부친은 조선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며, ‘오성과 한음’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그의 사위이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0년 전인 1582년(선조 15)에 4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한양이 함락당하고 선조임금은 피난길에 오르며 한양을 수복할 것을 명한다. 이에 권율은 광주 목사로서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함께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이광의 작전실패로 용인 전투에서 대패한다.

그러나 권율은 휘하의 군사를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해 후일을 도모하다 1592년(선조 25) 7월 동복 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 왜적을 격퇴하여 대승을 거두고 호남을 지킨 공로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한다.

1592년 12월 권율은 수원 독산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1593년(선조 26) 2월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퇴하여 한양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이후 권율은 도원수로 승진하면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명장으로 추앙받게 된다.

<목사양공응천선정비>는 조선시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게 한 송천 양응정의 비이다.

송천 양응정(1519∼1581)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학포 양팽손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 7) 문과에 합격해 출사했으나 권신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김홍도와 함께 파직당하기도 했으나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이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 정철, 최경회 같은 석학을 배출하고 고경명·김천일 등과 교우했다.

그는 시문에 능했으며 훌륭한 자녀교육으로 자손들의 애국충절이 양씨 삼강문에 정려(旌閭)되어 전해지고 있다

<일제 국권 피탈 협력자 선정비>는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냈던 친일파 이근호· 윤웅렬·홍난유의 선정비로 이들은 모두 <친일임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이들은 일제 국권 피탈 협력자로서 자신들이 관직에 있을 때 자신들이 선정비를 직접 세워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항거했던 광주시민들은 이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들의 비석을 뽑아 눕혀 놓고 친일행적의 죄상을 밝히는 ‘단죄문’표지를 설치했다.

그들의 친일행적을 살펴보면, ‘이근호’는 일제강점기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일제의 요구에 따라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정리를 담당했다.

1907년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했고, 남작 작위를 받아 그의 아들 이동훈에게 작위를 물려준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윤웅렬’은 친일파 윤치호의 부친으로 전라남도 초대 관찰사를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때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공채 2만5,000원을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의 아들 윤치호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신 총동원령에 앞장서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홍난유’는 남한대토벌 작전 때 의병진압에 앞장섰으며 ‘한일병탄조약’ 체결에

협조한 공으로 ‘한국합병기념장’을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의병장 남일심공순절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의병장 남일심공순절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의병장 남일심공순절비

<의병장 남일심공순절비>는 ‘심남일’(1871~1910) 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심남일(본명, 심수택)은 전라남도 함평의 자그마한 서당에서 훈장으로 활동하던 시골 선비로서 정의감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킬 당시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南一)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7년 의병장 기삼연이 이끈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해 김태원·김율 형제 등과 함께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기삼연, 김태원, 김율 등의 의병장이 잇달아 순국하고 ‘호남창의회맹소’가 거의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심남일 선생은 김태원 의병장의 뒤를 이어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해 의병장이 되어 나주와 장성 등 호남지방에서 의병투쟁을 이어 갔다.

1909년 일제가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칠 때 장성군 동치 전투에서 패하고, 화순 능주에 은거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체포되었다.

심남일 의병장은 형무소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고문을 받다가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1910년 7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07년 심남일 선생이 사랑하는 가족과 어린 학동들을 뒤로 한 채 처음 의병으로 출정하면서 지은 시가 전한다.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입고/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그의 유해는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며느님은 국가로부터 받은 연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광주향교에 기부하게 되고, 며느님의 효심에 감화된 향교와 광주 유지들은 심남일 의병장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공원에 순절비를 세운다.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심사 신동욱 선생 항일사적비

심사(心史) 신동욱 선생(1870~1942)은 전남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서 태어난 유학자로서 ‘남한대토벌작전’을 전후로 전라도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해임시정부독립자금과 1908년 호남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일제에 항거할 때, 의병장 김준‧심남일 등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의병 전쟁에 참전한 별호로 ‘재가의병장’이라고 불렸다.

1910년 이후 러시아 신무기 수입 계획에 따라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의병에서 이탈한 이봉래의 밀고로 체포되어 1911년 장성 헌병대에 3달 동안 투옥되어 고문을 당해 안짱다리가 되어 풀려난다.

1914년 임병찬이 독립의군부를 조직할 때 함평과 무안군의 책임자로 참가했으며 1925년에는 광복군단 함평군 책임을 맡았다.

일본의 감시 대상에 올라 외출을 할 때도 신고서를 작성해야 했지만 "자유를 어찌 남에게 맡기겠느냐"라며 이행하지 않아 체벌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위해 지역의 유지들에게 밀서를 보내 독립운동을 펼치다, 1942년 ‘절대로 ’창씨개명‘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2019년 제작된 그의 비문에는 평생 좌우명 ‘불기심(不欺心)’이 새겨져 있다.

불기심이란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2016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으며, 2019년 광주공원에서 ‘심사신동욱선생항일사적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용아·영랑 시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용아·영랑 시비/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용아·영랑 시비

광주공원에는 영랑 김윤식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용아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시비가 새겨져 친구처럼 나란히 세워져 있다.

두 시인은 아름다운 시어를 구사하며 시대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인물로서 1930년대 ‘시문학’파를 형성해 순수시를 지향한 시인이었다.

용아 박용철(1904~1938) 시인은 광주 송정 출신이다.

일본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그는 수리와 어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일본에서 김영랑과 친교를 맺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보였고,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김영랑과, 정지용, 정인보 등과 <시문학>을 창간하면서 경향파 문학에 맞서 문단 활동을 했으며 ‘시문학파’로 불렸다.

용아 박용철은 ‘임화’의 계급문학의 이데올로기와 ‘김기림’의 모더니즘 문학을 비판하며 김영랑 등의 시인과 어울리며 함께 1930년대 순수서정시 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해 시어의 조탁과 음악성, 서정성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문학의 순수성을 추구했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로 시작되는 용아 박용철 시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정박지를 찾아서 떠나가는 배에 자신의 인생을 비유한 작품으로, 고향을 그리는 현실과 삶 속에서 또 다른 정착지를 찾아 떠나가는 인간의 내적 감정을 그리고 있다.

1980년대 가수 김수철이 김용철 시인의 ‘떠나가는 배’ 에 곡을 붙여 ‘나두야 간다’라는 노래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영랑 김윤식(1908~1950)시인은 전남 강진 출신이다.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나 공부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한다.

1920년 일본에서 유학 중 박용철을 만나 우정을 쌓고,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귀국해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을 창간하고,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며 작품활동을 한다.

광복 후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으며 우익활동을 주도했고, 1948년 이승만 정권에 참여해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은신하던 중 9‧28 수복 당시 포탄 파편을 맞고 4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북도에 소월,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영랑은 우리나라 순수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1934년 「문학」지에 발표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대표적인 서정시에서 모란을 통해 ‘기다리는 정서’와 ‘잃어버린 설움’을 서로 대응시켜 잘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기다리는 봄의 상징적 의미는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가졌던 실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그들의 보람과 이상이 꽃피어나기를 몸부림치며 기다리는 날이라고도 한다.

영랑은 이 시에서 우리말이 갖는 율조를 가다듬어 서정시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광주공원은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 속에, 불의에 항거하며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광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2편에서 계속>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