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리학적 이상사회 꿈꿨던 '정암 조광조' 선생을 찾아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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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리학적 이상사회 꿈꿨던 '정암 조광조' 선생을 찾아서[1]"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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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기묘사화로 유배, 38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
"경연을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추진했던 개혁가"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3]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시대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꾸며, 개혁을 추진했던 '정암 조광조' 선생을 찾아서다. 1편은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를 살펴보고, 2편에선 '중종의 배신과 기묘사화 그리고 미완의 개혁가 조광조'가 다뤄진다.

조광조 선생 영정/화순 능주면 소재. /정성환 기자
조광조 선생 영정/화순 능주면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전남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전남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전남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전남 화순군 능주면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전남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에는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조광조 선생의 ‘적려유허지’가 세워져 있다.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6품 사간원 정언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1518년(중종 13년)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을 지낼 때까지 중종의 총애를 받아 파격적인 승진을 하며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꿨던 개혁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반정 공신들의 반발과 중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미완의 개혁가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 사후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파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는 개혁의 아이콘, 사림파의 전설로 거듭나게 된다.

사림파들은 세조 때 사육신의 후계자로서 벼슬을 버리고 향촌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종 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일파의 사림세력이 조정에 출사하게 되고 이들은 훈구파와 균형을 이루며 왕권을 안정시키고 사림 정치의 기반을 만들어 간다.

16세기 조선 시대는 훈구파와 척신세력으로부터 사림파가 참혹한 화를 당했던 네 번의 사화(士禍)가 있었는데 그 중심엔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이 있었다.

무오사화로 시작 된(1498, 연산군 4) 연산군의 폭압 정치는 갑자사화(1504, 연산군 10)로 이어져 많은 신진 사림파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연산군은 궁궐 주변 민가 터를 헐어서 사냥터로 만들고, 경연을 폐지해 학문을 멀리했다. 사간원을 없애 언로를 막고,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기생과 술, 가무가 난무하는 유락장소로 만들었으며, 내관들에게는 입과 혀를 잘못 놀리면 죽는다는 “입은 화의 문이고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신언패’를 목에 차고 다니게 할 정도로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이처럼 독재정치의 전형을 보여줬던 연산군은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에 의해 폐위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조선의 11대 왕으로 추대되는데 역사는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 기록하고 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여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지만, 반정 공신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기에 그의 영향력은 극히 미약했고 또한, 그를 뒷받침해 줄 세력이 없어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조선시대 반정 공신은 초기에는 태조 때 개국공신, 세조 때 계유정난의 정난공신, 중종 때 중종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신들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백성들을 핍박하여 부를 채우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중종실록에는 “중종은 조회가 끝나면 반정 공신들이 먼저 자리를 떠야 중종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권세에 눌려있었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반정 공신들의 위세에 눌린 너무나 힘없는 왕이었다고 한다.

중종은 반정의 3대 공신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의 횡포와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간힘을 써보지만 반정 공신들의 힘이 왕보다 훨씬 더 컸기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 공신 3인방이 중종 재위 8년을 전후로 사망하자, 중종은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신진 사림의 개혁적 성향을 수용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고 반정 세력과 대립했던 사림파를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로 생각하게 된다.

사림세력은 훈구파 세력에 의해 혼탁해진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이었다.
이러한 시점에 중종의 눈에 들어온 선비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정암 조광조였고, 이러한 중종의 관심 속에 조광조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영정각/사당/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영정각/사당/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영정/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영정/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조광조는 감찰이던 아버지 조원강의 3형제 중 둘째로 한성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정암(靜庵), 조선의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학문에 대한 욕심이 컸으며 아버지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17세 되던 해에 평안도 어천(현, 영변)의 찰방(察訪, 종6품)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성리학자 김굉필(1454~1504)을 만나게 된다.

김굉필은 ‘소학동자’로 불리며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계보를 이어온 김종직의 제자로 영남 사림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아버지의 권유로 김굉필의 문하로 들어가 김굉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일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되고,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의 거두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선비들은 성리학에 몰두해 있는 조광조를 화태(禍胎, 화를 안고 있는 존재)라 하여 멀리했으며 사화의 영향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광조는 실천을 강조한 김굉필의 도학 정치론에 감화를 받아 성리학연구에 전념하며 혼탁한 사회를 개혁해 요순시대의 이상 정치인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려는 야망을 품게 된다.

조광조는 학문적 능력 이외에 풍채도 좋고 용모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조광조는 용모와 안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는데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이 얼굴이 어찌 남자의 길상(吉相)이겠는가! 라며 탄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조광조는 뛰어난 외모와 성리학자로서 올바른 모습을 갖춘 선비로 성장하게 된다.

1499년(18세) 한산 이씨와 혼인했으며, 19세에 부친을 여의고, 1510년(29세)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진사가 되어 1515년(중종 10, 34세) 성균관에 입교해 학문에 전념한 조광조는 여러 유생 중에 학문이 뛰어나 중종 앞에서 성균관 유생을 대표해 「중용」을 강의하면서 중종과의 극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1515년(중종 10, 34세)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 사지(造紙署 司紙)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조정에 출사하게 된다.

그는 이미 뛰어난 수준의 학문을 익힌 유생이었으나 항상 선비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로 어린 나이에 읽었던 <소학(小學)>을 늘 손에 쥐고 다녔으며, 조지서 사지로 특채된 데 만족하지 않고 조정에 출사한 지 2달 만에 성균관 유생에게만 시행되는 알성시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한다.

중종은 알성시(謁聖試)에서 성균관 유생에게 논술시험인 책문(策問)을 낸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에 옛 성인들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조광조는 다음과 같은 대책문(對策文)을 쓴다.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해야 한다. 왕은 성실하게 천지의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자세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아야 하며, 유교적 도덕 정치를 실현했던 요·순 시대의 정치를 본받는 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실천해야 할 과제이다”라는 답안지를 제출한 것이다.

이 답안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34세의 젊은 조광조는 알성시 문과에 급제해 언관직인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된다. 이후 조광조는 중종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사림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문제를 청산하기 위해 사림파가 조정에 들어와 왕권의 지지 기반이 되어주기를 원했고, 조광조는 중종이 왕도정치를 실현해 태평성대를 이루길 원했다.

1513년(중종 8)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천둥 번개가 치는 등 많은 재해가 발생해 민심은 흉흉했다. 또한, 중종의 부인 장경왕후의 사망으로 조정에서는 왕비 책봉 문제가 거론되었고, 이때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은 “죄 없는 왕비를 내쫓는 것은 유교적 윤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신하가 임금을 위협해 왕비를 강제로 쫓아낸 사건은 있을 수 없으니 신 씨를 다시 왕비로 삼아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신비복위소’를 올리게 된다.

‘신비복위소’는 중종의 첫 왕비였던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반정 세력의 도덕성과 왕의 무능을 질타하고 왕비 신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반정 공신들의 잘못을 비판한 것으로 죽음을 각오한 의로운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박상과 김정은 반정공신과 양사(사간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한다.

이때 조광조는 이제 갓 출사한 사간원 정언으로서 박상과 김정을 탄핵한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 동료 대간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올려 박상과 김정을 변호하며 나선다.

“박상과 김정은 왕의 구언(求言)에 따라 진언(進言)한 것인데 언로(言路)를 열어야 할 대간이 나서서 처벌을 주장한 것은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언로를 막은 것이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전원 파직하고 언로를 다시 열기 바란다”란 내용으로 조광조가 사간원 정언에 취임하자마자 동료인 삼사 대간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조광조의 상소로 삼사 대간은 전원 교체되었으나 결국, ‘신비복위’는 무산되고 박상과 김정은 중형을 면하고 유배형에 처해 진다.

이 사건 이후 조광조는 일약 개혁의 중심인물로 등장하며 중종의 정치적인 파트너로 부상하지만, 반정 공신과 신진 사림의 대립은 격화되어 이후 기묘사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애우당(강당)/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애우당(강당)/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애우당/절명시 편액. /정성환 기자
애우당/절명시 편액. /정성환 기자

중종 즉위 4년이 흐른 후 반정 공신 3인방(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모두 사망하자 중종은 공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다. 그는 조광조로 대표되는 신진 사림을 중용하게 되고, 훈구파 일색이었던 중종 초기 정치세력의 판도는 중종의 친정체제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조광조의 목적은 왕권 강화가 아니라 지치정치(至治政治), 즉,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정치(道學政治)에 있었다.

이처럼 중종과 조광조는 반정 세력의 힘을 없애야 한다는 뜻은 같았지만,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달랐기에 훗날 중종과 조광조가 서로 대립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중종과 새롭게 조정에 진출한 사림세력의 뒷받침을 받은 조광조는 경연을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깊숙이 관여하면서 그가 꿈꾸었던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해 개혁을 펼쳐나간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건국된 조선의 왕들은 임금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학문과 교양을 갈고닦아 성군이 되어 왕도정치를 펼칠 것을 요구받았으며 하루에 조강·주강·석강·야대 등 4번의 경연에 참석해 학문과 국가의 중요 현안을 논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중요한 의무였다. 그러기에 조광조는 경연을 통해 중종을 압박하면서까지 강도 높은 제왕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광조가 경연을 강조한 이유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중종은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지 못하고 반정으로 추대된 왕이기 때문에 연산군처럼 폭군이 되지 않고 성군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임금보다 더 많은 강도 높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조광조의 신념이었다. 경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강도가 세졌고, 오가는 대화에도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경영관들은 왕에 대한 조언뿐만 아니라 정치적 잘잘못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왕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잘못을 반성하고 덕을 쌓은 일에 더욱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조선은 연산군 대의 폭정을 겪은 터라 개혁해야 할 것이 무척 많은 사회였다.

중종임금이 성군이 되어야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고, 그 바탕 위에 자신이 구상했던 개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왕이 변하지 않고서는 그 모든 개혁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위로는 훈구세력을 아래로는 지방의 수령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한 개혁을 펼쳐나간다.

조광조는 전국에 향약을 보급하고, 성리학의 도학 사상을 향촌 사회에서 실천하기 위해 성리학 지침서인 <소학>을 전국에 유포했다.

향촌 자치규약인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을 실시해 좋은 일은 권장하고, 잘못은 고쳐주며, 예를 지켜 사귀고,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향약의 4가지 덕목을 구현하여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또한, 향약 시행은 마을의 공동체 문화를 정착시키는 목적도 있었지만, 향촌 사회 주민들이 자치조직을 강화해 훈구세력과 결탁한 수령들의 수탈과 횡포를 막으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신진 사림이 중심이 되어 정권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개혁정치를 함께할 수 있는 지원세력이 필요했으나 관직에 출사한 조광조의 정치세력은 훈구파 세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훈구파에게 유리했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신진 사림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과거제도인 현량과 시행이 필요했다.

현량과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면접을 통해 채용하는 제도로써 중국 한나라 때의 ‘현량방정과’를 인용해 만든 시험제도라고 한다.

조광조가 현량과를 시행하려고 한 목적은 개혁정치를 함께할 수 있는 지원세력을 선발하기 위함이었으나 사림세력을 확충하는 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때 선발된 관리는 모두 28명으로 대부분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는 개혁성향의 젊은 사림 출신의 인재들이었다. 그들은 삼사를 비롯한 요직에 등용되어 조정의 여론을 장악하고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과거제도 개혁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훈구파에게는 기득권을 박탈당하는 위협으로 다가와 본격적으로 신진 사림과 훈구파가 대립하게 된다.

당시 향약의 보급과 과거제도 개혁 등 일련의 개혁작업은 관료와 백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중종실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광조 등이 탄핵과 논박을 크게 행하여 조정의 고관들이 주현을 범할 수가 없었고 주현(州縣)의 관리도 스스로 조심하니 백성들 사이에 근심이 없어지고 조정에도 뇌물을 쓰는 자가 없어졌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적려유허비각/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적려유허비각/화순 능주 소재. /정성환 기자

반정 공신들에 눌려있던 중종은 조광조의 등장이 신선한 충격이었고 왕권 강화를 위해 그를 적극적으로 신임하고 총애하게 된다.

조광조는 출사한 지 3년만인 1518년 36세로 대사헌(종2품)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고속승진을 하게 된다. 오늘날 말단으로 들어온 9급 공무원이 3년 만에 검찰총장이 된 것으로 중종이 조광조를 얼마나 신임하고 총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18년(중종 13년) 대사헌 조광조는 성리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고 유학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소격서를 철폐할 것을 강력히 주청한다.

그러나 중종은 선대왕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소격서의 제사의식을 폐지한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었고, 또한 조광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왕권이 실추된 것이므로 소격서 철폐를 완강히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나 조광조는 “세종과 성종 때에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며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만약 이단을 택한다면 연산군과 같은 군주가 되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사직서를 제출하면서까지 그의 뜻을 굽히지 않고 왕에게 맞선다.

거의 2달 이상 이어진 논쟁 끝에 소격서는 폐지되고 조광조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지만, 왕의 권위가 실추된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중종과 조광조의 사이에 서서히 먹구름이 드리운다.

<2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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