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예수라 칭송, 양림동과 함께한 선교사들을 찾아서"...양림동 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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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예수라 칭송, 양림동과 함께한 선교사들을 찾아서"...양림동 역사문화이야기
  • 정성환 전문기자
  • 승인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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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역사가 어우러진 광주의 명소...'양림동 역사문화마을'
45명의 선교사와 850여 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눈물, 아픔, 고통 곳곳에...
"학교와 병원 등 세워 교육과 의료, 빈민구제, 나눔과 사랑을 실천...작은 예수" 칭송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2]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울분과 좌절 속에 한 줄기 희망을 찾고자 몸부림쳤던 광주 청년들의 혼(魂)과 예술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이야기' 마지막 편이다.

이번 편에선 '양림동과 함께한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아서'로 머나먼 타향인 광주에 건너와 복음을 전하고,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교육과 의료, 빈민구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작은 예수들의 이야기다.

유진벨 선교기념관/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유진벨 선교기념관/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 양림동과 함께한 선교사들의 흔적

1904년 유진벨 등 기독교 선교사들이 광주에 처음으로 들어와 양림동 양림산 자락에 북문 안 교회,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제중병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이 거처하는 사택이 들어서면서 양림동은 현대문명과 기독교의 출발지로써 광주의 예루살렘 또는 서양 촌으로 불리게 된다.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에 항거했고,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도 겪었지만, 가난하고 병든 자, 고아들을 가슴에 품으며 사랑으로 헌신했다.

오늘날 양림동에는 유진벨 선교기념관, 윌슨 선교사 사택, 커티스 메모리얼홀(배유지 기념예배당), 오웬 기념관, 광주기독병원(제중병원), 수피아 홀, 어비슨 기념관, 선교기념비 등 선교사들의 흔적이 골목 곳곳에 남아있으며, 호남대학 뒷산(양림동산)에는 희생과 나눔, 사랑을 실천하며 한센병과 결핵 치유, 빈민구제에 앞장서며 자신들의 청춘을 복음과 사랑으로 헌신한 선교사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유진벨 선교사의 첫 번째 부인 ‘로티 위더스푼 벨’ 묘비석/전시실/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유진벨 선교사의 첫 번째 부인 ‘로티 위더스푼 벨’ 묘비석/전시실/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좌. 유진벨(1868~1925) / 우. 오웬(1867~1909). /정성환 기자
좌. 유진벨(1868~1925) / 우. 오웬(1867~1909). /정성환 기자

 

△ 유진 벨 선교기념관

<유진벨 선교기념관>은 ‘광주·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진벨 선교사의 사랑과 은혜를 기리기 위해 2016년 개관했다. 외관은 유진벨 선교사 가족이 생활했던 사택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1층에는 선교사들의 사진과 유품,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 1층 영상실에서는 선교사들의 활동 모습을 시청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진벨(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은 미국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센트럴대학교와 켄터기신학교를 졸업하고 1895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인과 함께 한국에 건너와 서울 정동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우고 선교사역을 시작한다.

1896년 서울에서 아들 헨리를 낳고, 선교를 위해 나주 지역으로 왔으나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나주를 떠나 목포로 건너간다. 목포에 도착한 유진 벨은 목포 선교부를 조직해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고, 전남 최초로 양동교회를 설립한다.

1899년 목포에서 딸 샬롯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1901년, 유진벨은 부인(로티 위더스푼 벨)이 선교 중에 심장병(풍토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사랑하는 부인을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한 유진 벨은 1901년 미국으로 건너가 두 아이를 누이에게 맡기고 190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1904년 12월 호남지역 선교를 위해 광주 양림동에 정착한 유진벨과 오웬은 그해 12월 25일 그의 자택에서 주민과 함께 성탄절 예배를 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

1905년 배유지는 그의 사택에서 놀란(Nolan) 선교사가 9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계기로 광주에서 최초 근대종합병원인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을 세웠으며, 자신의 사택에서 2명의 남학생과 3명의 여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1908년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해 청소년을 위한 교육진흥에 헌신한다.

유진벨은 성품이 느긋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친화력을 바탕으로 25개 군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1910년 세례교인이 1,500여 명으로 늘어나 ‘광주·전남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1919년은 배유지 선교사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준 한해였다.
양림 교회 교인들과 수피아 여학교, 숭일 학교 학생들이 3‧1운동에 가담해 많은 교인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고 그가 세웠던 ‘북문안 교회’는 일제에 빼앗기게 된다.
설상가상 유진벨은 그의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와 함께 3·1운동 당시 일본군에게 집단 학살당한 수원 제암리교회 현장을 다녀오다가, 자신이 운전한 승용차와 열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그의 부인이 목숨을 잃은 아픔을 겪게 된다.

1904년 광주에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 57세의 나이로 갑자기 생을 마감한 유진벨은 그의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와 함께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유진벨이 사망한 이후 1901년 어머니(로티 위더스푼 벨)가 세상을 떠날 당시 미국으로 보내져 성장한 그의 딸 샬롯 벨(Charlotte Bell, 한국명 인사래)이 한국으로 돌아와 군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윌리엄 린튼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그의 후손들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복음을 전파한다.
1960년대 순천지역에 결핵이 창궐하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건립해 결핵 퇴치에 헌신했으며, 유진벨의 한국 선교사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외 증손인 스티브 린튼(Stephen W. Linton)이 1995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고, 유진 벨의 뜻을 이어 한국에서의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북한에 식량과 보건의료를 지원하며 대북 민간외교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선교기념비/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선교기념비/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 선교기념비

1904년 12월 25일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언덕에서 유진벨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남 장로교 광주 선교부가 지역민과 함께 광주에서 첫 예배를 드린 곳을 기념하기 위해 1982년 12월 6일 <선교기념비>를 세웠다.

선교기념비에는 “이곳은 하나님의 보내심 받아 1904년 12월 25일 미국 선교사 배유지 목사가 광주에서는 처음 예배드린 곳으로, 그 거룩한 뜻을 길이 기리어 여기 돌비 하나를 세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선교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유진벨 선교사의 사택이 있었던 곳으로, 크리스마스 날 하얀 옷을 입은 200여 명의 마을 주민이 찾아와 첫 예배를 드렸던 광주의 첫 복음 장소였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정신을 심어준 근거지였으며, 조선의 첫 근대교육과 근대 의료의 출발점이었다.

클레멘트 오웬기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클레멘트 오웬기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 클레멘트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각>은 배유지 목사와 함께 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지어진 건축물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건축물이 세워진 곳은 ‘오웬’이 생전에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추모하는 병원이나 기념관을 지으려 했던 자리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미국 가족과 친지들이 성금을 보내와 ‘클레멘트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념하기 위해 <오웬기념각>을 세우게 된다.

1920년대 광주 최초의 음악회인 ‘김필례 음악회’와 광주 YMCA가 창립총회가 열린 이곳은 호남 최초의 문화예술회관으로써의 역할을 했던 곳이고, 2012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각시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은 버지니아대학에서 의사가 된 뒤 1904년 12월 배유지(유진 벨)와 함께 처음으로 광주에 들어와 광주 선교부를 만들어 광주진료소를 세우고 의료봉사와 선교에 헌신했다.

13개 군의 4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200여 명에게 세례를 준 ‘전남선교의 개척자’로 불린 오웬은 1909년 전남 장흥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과로로 급성폐렴을 앓다가 43세의 일기로 타계해 선교사 중 최초로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좌. 윌슨(1880~1963) / 우. 쉐핑(1880~1934). 정성환 기자
좌. 윌슨(1880~1963) / 우. 쉐핑(1880~1934). 정성환 기자
윌슨 선교사 사택/광주광역시 지정기념물 제15호/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윌슨 선교사 사택/광주광역시 지정기념물 제15호/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 윌슨 선교사 사택

<윌슨 선교사 사택>은 양림산 기슭에 세워진 2층의 회색 벽돌로 지어진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1989년 광주광역시 지정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1908년 윌슨은 이 사택에서 장애아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최초로 운영하고 어린이 주일학교를 부흥시켰으며,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철수한 후 박순이 선생은 이 사택에 충현영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들의 보금자리로 사용했다.

윌슨(Dr. Robert M. Wilson,1880~1963, 한국이름. 우월순, 우일선)은 미국에서 태어나 워싱턴 의과대학과 뉴욕 신학대를 졸업하고 1908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희생과 봉사의 삶을 실천한 인물로 제중병원 2대 원장을 지냈으며, 고아의 아버지, 사랑의 실천가로 불린다.
1911년 수술실 등 현대 의료시설을 갖춘 3층 건물의 광주 제중병원을 건축하고 한세병 치료 등 의료 사역에 일생을 바치게 된다.

1912년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봉선리 땅에 한센인 전문병원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해 한센병 환자치료를 위해 헌신했으며, 완치된 환자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적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광주 ‘나 병원’이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이 심해지자 총독부의 이전 명령에 따라 1926년 여수시 율촌면에 애양원을 건립해 이주하게 되자 ‘윌슨’은 제중병원 원장직을 사임하고 애양원으로 이주해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어린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컸던 윌슨 선교사는 1945년 고아 45명을 사택에서 보살폈는데, 그때 윌슨 선교사 사택에서 직접 재봉질을 해 고아들의 옷을 만들어 입힌 사람이 충현원을 세운 박순이의 어머니 박애신이다.

어머니 박애신의 의 영향을 받은 딸 박순이는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전쟁고아를 가슴으로 품었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아 지금의 충현원을 세우게 된다.

지금도 여수‘애양원’과 양림동 ‘충현원’에는 윌슨 선교사의 헌신적인 사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요한나 쉐핑(서서평)/유진벨 선교 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요한나 쉐핑(서서평)/유진벨 선교 기념관/ 전시실. /정성환 기자

 

△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s Johanna Shepping)한국명, 서서평)

쉐핑(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은 독일에서 태어나 한 살 때 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후 평생을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9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선교사로 선발되어 1912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으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로서, 사회의 그늘진 곳에 희망을 전하는 사랑의 사도로 헌신하며 일생을 보내게 된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간호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3·1운동 때 투옥된 기독교인을 돕다가 광주로 내려와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의 간호사 겸 선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매사를 서서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갑내기인 최흥종 목사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서서평’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과 따스한 품속을 그리워했던 그녀는 한국에서 고아 13명을 수양딸로 삼고, 미망인 38명이 자립하도록 도움을 주고 보살폈으며, 특히 천대받던 한센병 환자와 가난한 자들을 가슴으로 보듬었다. 특히 ‘요셉’을 포함 고아 14명을 입양하여 친자식처럼 돌보게 되는데, 요셉은 한센병 환자였던 아버지가 개천에 버리려 한 것을 데려온 아이였다고 전한다.

이처럼 그녀는 거리에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와 목욕시키고 밥을 먹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옷을 나눠 입히기도 해 자신은 평생 두벌뿐인 누렇게 바랜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를 입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1932년 서서평은 총독부의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수호를 위해 최흥종 목사와 200여 명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총독부의 한센병 환자의 정관 수술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걸어서 서울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서서평의 이러한 노력으로 한센병 환자의 정관 수술 정책은 폐기되었고, 소록도에는 한센병 환자 갱생원이 세워지면서 서서평은 ‘한센병 환자들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서서평은 자비로 3년제 학교인 ‘이일학교’를 설립해 지역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앞장섰으며 ‘조선간호협회’ 결성을 주도해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고 <간호교과서>, <실용간호학>, <간호요강>, <간이위생법> 등의 저서를 출간해 간호학 교육에 힘썼다.

32세에 한국에 들어와 병자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서서평은 1934년 54세로 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시신마저도 의학 해부용을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녀의 사망원인은 영양실조로 판명되었고 그녀가 남긴 전 재산은 담요 반 장과 쌀 두 홉, 현금 27전이 전부였다고 전한다.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 양 서거’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죽음을 ‘재생한 예수’ 의 순교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사회장(12일장)으로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 거행되었다. 수백의 걸인과 한센병 환자들의 상여를 메고 뒤따르며 ‘어머니’라 부르면 오열했고, 모든 것을 나눠주고 이 땅을 다녀간 그녀는 우리들의 ‘작은 예수’가 되어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있다.

한국에 간호선교사로 파견되어 평생을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 헌신한 그녀에게 미국 장로회는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하나로 서서평을 선정하게 된다. 

좌. 포사이드(1873~1918) / 우. 후로렌스 룻(1893~1995). /정성환 기자
좌. 포사이드(1873~1918) / 우. 후로렌스 룻(1893~1995). /정성환 기자

 

△ 포사이드(Wiliam Hamilton Forsythe)

포사이드는 ‘광주의 선한 사마리아인’이라 불린다.

그는 미국 켄터키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4년 한국에 들어와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고아원을 운영했다.

1905년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귀가 잘리고 머리를 다쳐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목포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1909년 오웬 선교사가 급성폐렴으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포사이드가 급히 광주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효천에 이르러 마중 나온 최흥종 등과 광주로 오는 도중 길가에 쓰러져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신음하는 한센병 여인을 발견하고 그가 입고 있던 털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입혀주고 자신의 말에 태워 광주로 와서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 소문이 퍼지자 한센병 환자들이 양림동으로 모이게 되고, 선교사들은 양림동에 세 칸짜리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한센병 환자를 본격적으로 치료하게 된다. 이처럼 포사이드의 한센병 환자에 대한 헌신은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1912년 제중원 원장 윌슨과 최흥종의 노력으로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 나병원’이 탄생하게 된다.

1918년 포사이드가 풍토병으로 귀국하여 45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한센병 환자들이 ‘광주 나병원’에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고, ‘광주 나병원’이 여수로 이전하게 되자 나환자들은 광주에서 여수까지 비석을 짊어지고 보름이나 걸려 옮겼다고 전해진다.

 

△후로렌스 룻(florence e. root. 한국명, 유화례)

유화례 선교사는 1927년 광주에 들어와 수피아 여학교의 음악 교사가 된 이후, 1933년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학생과 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폐교를 결정하게 된다.

일제가 선교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려 미국 선교사들이 대다수 떠났을 때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한국에 남아 손양원 목사가 있는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헌신했다.

1942년 또다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강제추방 당하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78년까지 이 땅에 머물며 2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며 ‘전라도 선교의 어머니’로 불렸다.

51년간의 헌신적인 사역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버지니아의 선교사 양로원에 머물며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한국을 위한 기도를 하며, 10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선생은 ‘유화례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때는 신사참배 반대로 고통을 겪었고, 6.25 전쟁 때는 교회를 지키느라 어려움을 당했다’라며 “유화례 선교사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딸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고든 어비슨(1891~1967). /정성환 기자
고든 어비슨(1891~1967). /정성환 기자
어비슨 기념관/광주광역시 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어비슨 기념관/광주광역시 양림동 소재. /정성환 기자

△ 고든 어비슨(Gordon Wilberforce Avison) 기념관

2010년 광주 YMCA와 광주 ‘양림교회’가 광주 남구 양림 교회 맞은편에 어비슨 기념관을 짓고 동상을 세워 고든 어비슨 부부의 희생적 발자취를 기리고 있다.

기념관에는 어비슨 기념 홀 사무실과 학습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념 홀에는 양림동 문화지도와 어비슨의 행적을 담은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과 동상 건립을 주도한 송인동 호남신학대학 교수는 “어비슨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호남 농촌과 농업을 살리는 활동과 함께 식민지 청소년들에게 호연지기를 길러주는 사회체육 지원 등 헌신적인 활동을 벌인 은인”이라며 늦게나마 그분을 기억하는 기념공간을 마련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고든 어비슨(Gordon Wilberforce Avison)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 올리버 어비슨(O.R.Avison, 1860~1956)은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어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고 고종황제 어의를 지냈고, 한국 근대 의료와 의학교육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다.

고든 어비슨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수탈로 피폐한 한국의 농민과 농촌을 돕기 위해 미국 YMCA의 농업 전문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어 호남지역의 농촌계몽과 농업혁명, 사회체육 운동에 헌신했다.

간호사 출신인 부인(프란세스)과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온 어비슨은 광주 YMCA와 전남 교인들의 협조를 받아 쌀농사와 토양을 좋게 하는 법, 우량 종자 보급, 온실 농업, 축산, 양계, 목공 등을 가르쳤으며, 농촌 지역 곳곳에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 힘썼다.

그는 신용협동조합과 ‘농후회’를 결성하여 생활 개선과 문화보급에도 앞장섰으며, 한국 청소년들의 체력과 호연지기 함양을 위해 유도, 권투, 축구단과 마을 체육대회 등 다양한 사회체육 활동에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광주지역 사회체육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헌신했다.

어비슨은 오방 최흥종과 협력하여 광주 YMCA 농업실습학교(어비슨 농업학교)를 세우고 농사와 성경 교육을 지도하여 많은 농촌 지도자를 배출했다.

어비슨 농업학교 교육은 ‘주님을 사랑하라, 땅을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라는 삼애(三愛)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삼애 정신은 해방 후 최흥종과 허백련이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삼애(三愛) 학원에 계승된다.

광복 후 1955년, 어비슨 농업학교 자리에 호남 농어촌지역 목회자 양성을 위한 성경학교가 설립되고, 지금의 호남신학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간호사인 그의 부인 어비슨 여사는 당시 생산량이 적었던 우유 대신, 콩을 젖산으로 발효시킨 후 포도당을 첨가해 만든 콩 우유를 보급해 영·유아 사망률을 크게 낮추어 ‘뉴욕타임즈’에 보도되었고, 결핵 환자들을 극진히 간호해 주민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기독교계의 농촌 지도자들의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일본인 자본가에게 대항하게 되자, 1939년 일제는 이를 독립운동으로 간주하여 호남지역 농촌운동을 위해 헌신한 ‘어비슨’ 선교사 가족을 강제 출국시킨다.

미국에 도착한 어비슨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와 가족들을 위한 센터를 운영하면서 1967년 숨질 때까지 한국과 YMCA 운동을 그리워하며 바깥 현관문에 커다란 태극 문양과 YMCA 휘장 모형을 걸어두고 살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의 외아들은 한국인 2세와 결혼한 뒤 보병으로 6·25전쟁에 참여했고, 그의 아내도 한국군 간호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간호 인력을 양성하고 전쟁고아들과 피난민을 위해 봉사했다고 전한다.

제중원 굴뚝/광주기독병원 역사 소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제중원 굴뚝/광주기독병원 역사 소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 제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

제중병원은 놀란(Dr.J.W.Nolan) 선교사가 1905년 11월 20일 오후에 배유지 선교사 임시 사택에서 9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광주기독병원의 117여 년의 역사와 광주에서의 최초 서양식 현대의료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비과학적인 각종 민간요법과 무당에 의해 행해지는 미신적 치료에 의존했던 환자들에게 수술을 통한 근본적이고 과학적인 치료가 시행되었으며, 질병 치료의 수준을 넘어 효과적인 복음전파와 지역민들의 사고방식을 과학적 사고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제중병원(광주기독병원)은 1909년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한 사업(구라사업), 광주 나병원 설립(1911), 결핵 진료(1930) 등 광주 근대 의료발전의 산실이자 나눔 정신의 장으로써 광주 민주항쟁의 아픔을 치료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으나 광복 후 1951년 재개원했으며, 광주기독병원 역사 소공원에는 윌슨과 포사이드 선교사의 기념비와 굴뚝이 보존되어 제중병원 변천사를 증언하고 있다.

수피아홀/국가등록문화재 제158호/광주 수피아여고 소재. /정성환 기자
수피아홀/국가등록문화재 제158호/광주 수피아여고 소재. /정성환 기자

△ 수피아 홀

수피아 홀은 미국인 스턴스 여사가 세상을 떠난 친여동생 ‘제니 스피어’를 추모하기 위해 기증한 5천 달러로 1911년 ‘수피아홀’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스피어홀’은 수피아 여학교로 불리며 광주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 교육의 요람인 수피아 홀(현, 수피아여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꿈많은 학생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하고, 1937년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8년간 폐교되었지만, 광복 이후 다시 개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커티스메모리얼홀/광주광역시 등록문화재 제159호/양림동 수피아여고 소재. /정성환 기자
커티스메모리얼홀/광주광역시 등록문화재 제159호/양림동 수피아여고 소재. /정성환 기자

<커티스메모리얼홀>은 커티스 씨가 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보내온 헌금과 선교사들의 모금으로 1921년 건축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25년 광주·전남 선교의 아버지 유진벨 목사가 별세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유진벨기념예배당’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예배당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맞배지붕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곳곳에 원형 창과 아치 형상의 창문을 조화롭게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작지만, 장식으로 구성된 우수한 건축물로 교육·종교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는 ‘예수피아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피터스 목사 사택(현,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정성환 기자
피터스 목사 사택(현,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정성환 기자

 

△ 피터슨 목사 사택(현, 호랑가시나무 창작소)

피터슨 목사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계엄군의 무장헬기가 광주도청 상공에서 광주시민을 향해 기총사격을 가한 것을 목격하고 그 진실을 국내외에 증언한 광주 5월의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린다.

당시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등은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불의해 대한 지속적인 설교와 기도, 청문회 증언, 선교사를 통한 해외 증언을 했고, 교회 지도자들은 신군부로부터 많은 어려움과 탄압을 받았다.

충현원/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 동상. /정성환 기자
충현원/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 동상. /정성환 기자
좌. 희망의 왕좌 조각상/충현원 소재 / 우. 평화의 대사 조각상/충현원 소재. /정성환 기자
좌. 희망의 왕좌 조각상/충현원 소재 / 우. 평화의 대사 조각상/충현원 소재. /정성환 기자

 

△ 충현원(忠峴院)

‘충현원’의 역사는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박순이(1921~1995) 여사가 윌슨(우월순) 사택에서 ‘충현영아원’을 설립해 고아들을 돌보면서 시작된다.

1953년 박순이 여사가 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설립한 ‘충현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육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충현원’에는 한국전쟁 당시 1,059명의 고아를 구출한 미 공군사령부 목사 ‘러셀 블레이즈델(1910~2007) 대령’ 동상과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고아들을 추모하는 <희망의 왕좌>, 해외에 입양된 한인들을 상징하는 <평화의 대사>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미국 공군사령부 군목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1950년 6·25전쟁 당시 길거리에 버려진 1,059명의 전쟁고아를 구출한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다.

북한군과 중공군이 서울을 재침공할 즈음인 12월 20일, 러셀 중령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어린이 비행기 수송 작전’이란 이름으로 군 수송기 15대를 동원해 고아 1,059명을 김포에서 제주도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고 한다.

2009년 한국전쟁 속에 버려진 젖먹이 고아들을 계속 돌보아온 충현원에 군목 ‘블레이즈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동상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선교사 묘역/호남신학대학교 양림동산 소재. /정성환 기자
선교사 묘역/호남신학대학교 양림동산 소재. /정성환 기자

△ 선교사 묘역

선교사 묘역을 오르다 보면 양림 동산 고난의 길에 65개의 디딤돌이 있다.

이 디딤돌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한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45명의 선교사와 850여 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눈물, 아픔, 고통을 느끼는 발걸음이라고 한다.

1909년 과로로 타계한 ‘오웬’ 선교사가 이곳에 묻히면서 선교사 묘역’이 조성되었고 ‘서서평’을 포함해 유진 벨, 오웬, 포사이드 등 초기 선교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머나먼 타향인 광주에 건어와 복음을 전하고,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교육과 의료, 빈민구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작은 예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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