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이야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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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광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이야기 [2편]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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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문화역사가 어우러진 광주의 명소
광주의 예루살렘’ 또는 ‘서양촌’ 명명
이번 편, 3·1 만세 운동길, 수피아 홀, 조아라 기념관, 이장우·최승효 가옥 등 살펴볼 것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30] 정성환 전문기자 = 이번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울분과 좌절 속에 한 줄기 희망을 찾고자 몸부림쳤던 광주 청년들의 혼(魂)과 예술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네번째 중 두번째 이야기다. 이번편엔 3·1 만세 운동길, 소피아 홀, 조아라 기념관, 이장우·최승효 가옥 등이 양림동 곳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다.
3·1 만세운동길/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3·1 만세운동길/광주 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수피아홀/국가등록문화재 제158호/광주 수피아여고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수피아홀/국가등록문화재 제158호/광주 수피아여고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3·1만세 운동 기념비/광주 수피아여고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광주 3·1만세 운동 기념비/광주 수피아여고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운동가 윤형숙 열사(좌). 독립운동가 박애순(우)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운동가 윤형숙 열사(좌). 독립운동가 박애순(우) [사진=정성환 기자]


△ 3·1만세 운동길

3·1만세 운동길은 독립운동가 오방 최흥종 선생, 여성 독립운동가 윤형숙 선생, 박애순 선생의 인물 사진을 담아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19년 3월 10일, 양림동 수피아여학교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한 많은 학생과 주민들은 오웬기념각을 거쳐 양림 윗 교회를 향하던 중 이곳 작은 언덕길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아리랑 노래를 불렀으며, 그날 이후 이곳을 아리랑 고개로 불려오다 2014년 아리랑 고개를 3·1 만세운동길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지역 3·1만세 운동은 남궁혁 목사의 사택에서 비밀리에 계획되어 1919년 3월 10일 작은 장터가 열리는 광주천 부동교 밑의 백사장에 1천여 명의 인파가 모여 시가행진을 벌이며 시작된 만세운동은 큰 장날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체포되고 교회당(현, 광주양림교회)이 몰수당한 아픔을 겪었다. 특히 윤형숙 열사의 숭고한 애국심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 독립운동가 윤형숙(1900~1950) 열사

윤형숙 열사는 윤혈녀(尹血女)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남도의 유관순 열사란 평가를 받고 있다.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나 순천 매산학교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수피아여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1919년 3월 10일에 거행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군도에 왼팔이 잘려나간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다시 오른팔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다 체포된다.

일제 경찰은 심문과정에서 이름을 묻자 “나는 윤혈녀다. 피를 흘리는 윤혈녀다”라고 대답하며 일제에 항거한 그녀는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오른쪽 시력마저 잃은 불행을 겪게 된다.
감옥에서 풀려나 전도사로 활동하며 문맹 퇴치와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장선 그녀는 고향 여수에서는 “외팔이 외눈박이 선생님”이라 불렸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손양원 목사와 함께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북한군에 붙잡혀 50세의 일기로 총살당해 생을 마감한다. 정부는 2004년 건국 포장을 추서했다.


△ 독립운동가 박애순(1896~1969)

전라남도 무안군 양동에서 태어나 목포 정명여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항일운동에 앞장선 투철한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광주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요인물이었다.

1919년 3월 6일 개신교 신자 김복현, 광주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 등과 함께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결행할 것을 결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수피아홀’ 지하실에서 학생들과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독립 만세시위의 일선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3월 10일 독립 만세운동 시위 때 학생들을 대거 참가시켰으며, 독립선언문을 시위군중에게 배포하다 붙잡혔다.

“나는 독립을 절실히 희망했기에 그 운동에 참여했다”라고 공판과정에서 당당히 말했고, 만세시위를 자신이 주도한 것이라고 시인했던 독립운동가 박애순 선생은 1919년 4월 30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서울 안동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게 된다.
정부는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수피아 홀

미국인 스턴스 여사가 세상을 떠난 친여동생 ‘제니 스피어’를 추모하기 위해 기증한 5천 달러로 1911년 ‘수피아홀’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스피어홀’은 수피아 여학교로 불리며 광주지역 개신교 선교의 근거지이자 여성 교육의 요람인 수피아 홀(현, 수피아여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꿈많은 학생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하고 1937년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8년간 폐교되었지만, 광복 이후 다시 개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아라 기념관/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아라 기념관/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아라 기념관/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아라 기념관/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아라 기념비/수피아여고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아라 기념비/수피아여고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아라 기념관

소심당(素心堂) 조아라(1912~2003) 기념관은 조아라 선생의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 및 여성복지향상을 통한 사랑·정의·평화·봉사 정신을 계승 선양하기 위해 설립했다.

조아라 여사는 일제강점기때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백청단’ 사건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렀고, 광복 이후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박정희 유신 독제와 전두환 군부 쿠데타세력에 맞섰다.

암울한 시대 사회복지 사업의 선구자, 여성 운동가, 진실한 신앙인이었던 소심당 조아라 선생은 평생을 힘없는 약자와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의했던 조아라 선생은 광주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광주의 어머니, 민주화의 대모로 불리고 있다.

조아라 여사는 일제강점기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소심당(素心堂)이다. 남종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 선생은 속옷을 기워입을 정도로 검소했던 그녀에게 “티 없이 결백하다”라는 뜻인 소심당((素心堂)이란 호를 지어줬다고 한다.

민족계몽운동가이며 성직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 조아라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자질이 특출하여 성경 관련 서적인 「초등문답」이란 책의 내용을 모두 외우는 등 유년시절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특한 딸의 교육을 위해 광주 최초 여성학교인 ‘수피아여학교’에 진학시킨다.

‘수피아여학교’ 진학은 그녀의 인생에 대전환점이 된다. YWCA 창설을 주도한 깨어있는 여성 교육의 선각자 김필례(1891~1983) 선생을 운명처럼 만났기 때문이다.

김필례 선생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조아라는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 서서평(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이 운영하는 ‘이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과부나 이혼녀 등 소외되고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을 가르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며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그녀의 교직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3년 그녀가 교사로 근무한 지 1년 10개월이 되던 날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비밀결사조직인 ‘백청단’ 사건이 뒤늦게 발각된 것이다.
‘백청단’은 언제 창립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0년대 초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생 10여 명이 학교 지하실에 모여 독서를 목표로 조직한 학생 비밀 결사 조직이다.
조아라는 ‘백청단’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1개월 후 석방되었으나 교직에서 강제 해직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청년회 활동을 하며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하여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한다. 이에 그녀의 모교 수피아여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다.

이 사건으로 스승인 김필례는 수감 되고, 그녀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한 달간 옥고를 치른다. 이후 해방되기까지 조아라는 일제 경찰의 감시와 조사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광복 후 그녀는 김필례의 영향을 받아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던 광주 YWCA 재건에 참여하고 총무로 활동하면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37년 그녀는 산사 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수피아여학교를 재건에 힘써 1945년 수피아여학교를 부활시킨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피난민과 고아들을 보살폈고 전쟁이 끝난 이후 생계가 어려운 여성과 고아들을 위해 1952년 YWCA 복지사업기관인‘성빈여사’를 건립하여 갓난아이와 고아들의 보호자가 되어 헐벗고 버림받은 이들을 품어주고 아이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교육에도 힘썼다. 불우소녀 가장을 돕기 위해 3년제 야간 중학교인 ‘호남여숙’을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에도 힘썼다.

1962년 청소년 야학인 별빛학원과 윤락여성들의 직업훈련을 위한 ‘계명여사’를 설립해 여성들의 기술교육을 선도해 사회진출을 도왔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자 구속자 석방을 위한 목요기도회를 광주 YWCA에서 매주 열었고, 대중강좌 <민중논단>을 통해 시민의식 운동을 펼쳐나간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YWCA를 개방하여 시민항쟁의 근거지로 사용케 하고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당시 법정에서 “5·18을 발생하게 한 사람은 따로 있고 우리는 피해자일 뿐이다”라고 열변을 토해낸다. 그녀의 나이 68세 때의 일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소심당은 부상자와 사망자 처리, 피해 가족들을 돕는 일에 전념해 이때부터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1980년대 가족법 개정 운동에 앞장섰고 1992년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참석해 통일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열변을 토하고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선다.
평생을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헌신한 조아라 선생은 자신의 마지막 간절한 소망은 ‘조국의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남긴 채 2003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정부는 조아라 선생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광주 시민은 ‘광주의 어머니’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해 추모했다. 2015년 양림동에 <소심당 조아라기념관>을 건립해 조아라 선생의 소중한 애민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양림 역사문화 마을을 상징하는 종(좌). 광주 현대사를 겪은 종(우) [사진=정성환 기자]


△ 역사의 증인 양림교회 종

양림 교회 앞에는 양림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두 개의 종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으로 만든 종은 양림 역사문화 마을을 상징하는 종이고, 녹이 슨 종은 광주의 아픈 현대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종이라고 한다.

1997년 양림교회 관계자와 양림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양림동 좋은 동네 만들기(양림 역사 문화마을 만들기) 운동을 시작으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아름다운 흔적을 간직한 ‘종’이라고 하며 지금도 양림 역사의 흔적을 찾아 연합활동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안고 1960~70년대의 격동기를 넘어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아픈 역사를 겪으며 양림 교회에 매달린 이 ‘종’은 광주의 현대사의 아픔을 품은 종이라고 한다.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에 의해 양림 교회 교인 중 2명이 사망하고 10명의 부상자와 고문 피해자가 발생하고 교회 성도들은 희생자 구호와 수습에 힘쓰며 5·18 학살에 관한 중요한 증언을 남긴다.

계엄군들의 학살과 만행을 지켜보면서 녹이 슨 이 종은 광주선교 100주년인 2004년, 몸체에 금이 간 이 종은 종탑에서 내려와 오가는 시민들에게 처참했던 1980년 5월 그 날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양림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이장우 가옥

광주광역시 남구 양촌길 21 골목길엔 근대 한옥의 역사 이장우 가옥과 최승효 고택이 있다.

이장우 가옥은 양림산을 뒤로하고 하고 광주천을 앞에 둔 배산임수의 형태의 전통적인 조선시대 양반 가옥 양식이며 솟을대문(1935년 건립)을 가진 3칸의 문간채를 지나 곳간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배치된 상류 주택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 상량문에 ‘광무삼년을해이월십일축시(光武三年乙亥二月十日丑時)’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99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보통 남부지방 가옥형태인 (一)자 형이 아니라 중부지방의 (ㄱ)자 형태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며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 자유로이 볼 수 없다는 것이 좀 아쉽다.

건립 당시의 소유자는 정병호(그의 부친은 정낙교)인데 1965년에 이장우가 매입했다고 한다.
1899년 정병호가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하고, 1959년 이장우가 매입한 후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채까지 완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장우는 호남 지역 교육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동강 학원과 나주 동신대학교의 창립자이다.
 

△ 최승효 고택

최승효 고택은 1921년 1,000여 평의 대지 위에 정면 8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전통한옥으로 광주천을 앞에 두고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는 멋진 고택이다.

한·말 전통가옥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사적 의의가 큰 집으로 독립가 최상현의 집이었다고 한다.

최상현은 중국과 무역을 하며 막대한 자산을 쌓은 재력가로 독립자금 지원과 사회봉사 사업에 힘썼다고 하며 다락방에는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집의 건축자재는 백두산과 압록강 부근의 질 좋은 목재를 사용했다고 하며 특히 대문의 목재는 3년이나 바닷물에 잠긴 후 사용했다고 하니 그 단단함과 은은함이 웅장하다.

최승효의 부친인 최명구는 광주 구 시청 부근에 ‘흥학관’을 건립해 일제강점기 광주 청년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운 도장으로 사용케 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유지였다고 한다.

현재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돼 있으나 상시 개방한 것이 아니기에 자유로이 살펴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다음엔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이야기 네번째 중 세번째 이야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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