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아서....'남도의 사회와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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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아서....'남도의 사회와 문화이야기'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2.0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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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 역사의 현장
신증동국여지승람, 홍어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백성들이 즐겨 먹어...
전라도의 어업·시장·예술 등 둘러싼 문화역사이야기 다채...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3] 정성환기자 = 이번 이야기는 광주전남 민속문화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광주역사민속박물관 민속전시실의 '전라도의 사회와 문화' 이야기다.

광주 역사민속박물관 이야기는 △1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생활환경) △2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사회문화) △3편 근·현대 역사전시실(광주읍성) △4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조선시대 사회문화) △5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일제강점기 충장로와 금남로)로 연재 중이다.

다섯편의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이야기는 △1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생활환경) △2편 민속전시실(전라도의 사회문화) △3편 근·현대 역사전시실(광주읍성) △4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조선시대 사회문화) △5편 근·현대 역사전시실(일제강점기 충장로와 금남로)로 구성된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광주광역시 용봉동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두번째, 광주역사민속박물관 민속전시실, 전라도의 사회문화편

△남도의 어업
전라도는 해안선의 길이가 약 7300km로 한반도 전체 해안선의 절반이 넘고 2000여 개의 섬이 모여 있는 다도해(多島海)라는 특징 때문에 예로부터 자염(소금) 생산이 활발했고, 어업이 발달하여 전라도 맛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뜰망배 [사진=정성환 기자]
뜰망배 [사진=정성환 기자]

‘뜰망배’는 배꼬리에 지렛대를 세우고 그 끝에 그물을 달아매 지렛대를 기울여 그물을 물에 잠기게 해서 물고기를 가뒀다가 지렛대를 높여 그물을 들어 올려 고기를 잡은 원시적인 고깃배로써 1970년대 장흥에서 어부들이 실제 사용했다고 한다. ‘뜰망배’는 지렛대가 활처럼 휘었다고 해서 궁선(弓船) 또는 ‘활배’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 백성들이 가장 즐겨 먹었던 생선은 숭어와 청어였다고 한다.
청어를 ‘벽어’ 라고도 하며 과메기를 만드는데 사용한 물고기였는데 요즘은 주로 꽁치를 사용한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수군들이 청어를 잡아서 군량미를 조달했다는 기록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걸 보면 청어는 전국에서 많이 잡혔고, 전라도에서도 많이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라도 음식 하면 떠오르는 홍어는 많은 사람이 전라도 전통음식으로 생각하지만, 16C에 기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잡힌 물고기가 숭어와 홍어였다는 기록이 있어 전라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백성들이 즐겨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라도 백성들이 다른 지방에 비해 계속해서 홍어를 즐겨 먹다 보니 전라도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추측한다.
과거나 현재 전라도 지방의 모든 애경사 상차림의 단골 메뉴는 홍어였다고 하며 ‘홍어 빠진 잔치는 잔치도 아니다’는 말이 있듯이 전라도 사람들에게 홍어는 특별한 음식이며 특히 삭힌 홍어의 본고장은 영산포라고 한다.

영산포에서 삭힌 홍어가 유명해진 데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흑산도에서 뱃길로 10분 거리에 ‘영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영산도 사람들이 처음으로 홍어를 잡았다고 한다.
과거 영산도 사람들은 왜구의 침략을 피해 나주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영산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포구라 하여 ‘영산포’라 불렸다고 한다.
이때 영산도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홍어를 잡으면 열흘씩 걸리는 뱃길을 따라 영산포로 가져와 팔았는데 보관이 되지 않아 부패했음에도 그 맛이 독특해 영산포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이것이 영산포의 삭힌 홍어의 유래라고 전한다.
이처럼 삭힌 홍어는 발효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 태어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어구/반두실, 작살 [사진=정성환 기자]
어구/세우조리, 가리, 반두, 통발 등 [사진=정성환 기자]
어구/세우조리, 가리, 반두, 통발 등 [사진=정성환 기자]

△남도의 시장
옛 시장은 경제적 교환의 장소이자 동시에 정치·사회·문화정보를 공유하고 민심을 읽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으며 사교 공간이었다고 한다.
1470년 지방 최초로 전라도 무안에서 장문(場門)이란 이름으로 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 당시 가뭄으로 전라도에 큰 기근이 들자 지역민을 위해 전라 관찰사 ‘고태필’과 나주목사 ‘이영견’은 시장개설을 허용하여 곡식과 생필품의 교환을 도왔다고 하는데 과거 봇짐장수에 의존하던 상거래 방식과 비교하면 큰 변화였다.
새로 설립된 장은 “난장을 튼다”고 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풍각쟁이, 도박꾼, 씨름꾼, 구경꾼 등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전라도에서는 56개 고을 중 53개의 고을에서 장이 열려 경상도와 함께 장시 규모가 가장 높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광주에서도 크고 작은 6개의 장이 있어 쌀, 곡물, 면화 등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장터 풍경 [사진=정성환 기자]
장터 풍경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시대 전라도에서는 목화와 무명베가 많이 생산되었으나 명태는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함경도에서는 명태는 많이 잡히지만, 목화 재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함경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에게 명태를 팔아 목화와 무명베를 사서 이불을 만들고 옷을 지어 추위를 이겨 냈으며, 전라도 지방의 사람들은 목화와 무명베를 팔아 함경도에서 잡힌 명태를 사서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산지는 달라도 장을 통해 명태와 무명베의 교역이 이뤄지면서 ‘장’이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화폐사용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시장의 이용이 편리했으며 그 당시 상평통보는 대표적인 화폐로 동전 1개는 ‘한 닢’, 100개는 ‘한 냥’으로 유통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교역망은 비단 국내로 한정되지 않았고 은과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했고 한약재나 염료는 중국을 통해 들여왔다고 한다.

△남도의 예술
조상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활용품에도 예술성을 불어넣었는데, 이것을 공예라고 했다. 공예는 생활용품을 멋스럽게 만든다는 소박한 의미를 지닌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직물과 가구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한 공예는 각 지방의 지역 특색을 반영한 여러 가지 공예품들이 있는데, 전라도 지방은 지역의 특산물인 대나무 등을 활용하여 부채와 채상, 낙죽 등 대나무 공예품을 시작으로 나뭇결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겸비한 곡성 장, 영광 반닫이, 나주 반 등이 골고루 발달했다고 한다.

강진 김해 김씨가 상여/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4호 [사진=정성환 기자]
강진 김해 김씨가 상여/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4호 [사진=정성환 기자]

‘상여’는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안내하고, 남은 자들을 위로하는 장례에서 사용되는 도구이다.
전시된 상여는 강진의 3천석 부호 집에서 1920년대에 사용한 상여로써 국화무늬와 격자무늬 등을 조각하여 못을 사용하지 않고 짜임으로 만든 누각 형태의 상여이다.
상여 앞뒤에는 주검을 순조롭게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용두판(龍頭板)이 1개씩 달려있고, 네 모서리에는 대봉유소(大鳳流蘇, 매듭 술)가 2개씩 달려있다.
이 상여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의례를 더욱 엄숙하게 하고 삶과 죽음은 긴밀히 연결되었다는 전통 생사관을 반영한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이다.

직물공예/마세준 창의 [사진=정성환 기자]
직물공예/마세준 창의 [사진=정성환 기자]

목화는 남도와 인연이 깊은 식물이다. 가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광주·전남에서 많이 재배했다.
우리 조상들은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 겨울은 명주나 무명옷을 입었다고 한다.
경주이씨 장옷(오른쪽)은 무명베로 지었는데 300년 전에 들인 쪽물 빛깔이 지금도 곱게 남아있다.
우리 지역에서 무명베 잘 짜기로 소문난 곳은 나주 ‘샛골나이’로 중요무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샛골’은 나주 다시면에 있는 동네 이름이고 베를 짜는 일을 ‘나이’라고 불린다. 곡성에는 ‘돌실나이’가 유명하며 중요무형문화재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세준 창의(왼쪽. 氅衣)는 ‘마세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옷감의 종류가 비단(명주)으로 밑에 명주실의 원료인 누에고치가 달려있다.
조선시대에는 ‘관’ 내부의 공간을 죽은 이의 옷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옷가지를 사용해 채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무덤에서 나온 옷들을 보면 평소 입었던 옷가지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 신분에 따라 옷의 소재와 규모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나무 공예/죽부인, 참빗, 낙죽장도, 백동연죽 [사진=정성환 기자]
대나무 공예/죽부인, 참빗, 낙죽장도, 백동연죽 [사진=정성환 기자]
대나무 공예/부체 [사진=정성환 기자]
대나무 공예/부체 [사진=정성환 기자]

전라도에는 유난히 대나무가 많다. 따뜻한 기후 환경에서 잘 자라는 대나무 때문에 우리 고장에서는 대나무 공예가 발달했으며 특히 전라도 담양의 대나무 공예는 명성이 높다.
죽부인은 노비나 애첩, 하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르신이 쓰다가 돌아가시면 태웠기 때문에 실제 사용한 옛날 것은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낙죽’은 인두를 달구어 대나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하고, 인두를 달구어 종이에 그리는 것을 ‘낙화’라고 한다.
‘채상’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뒤에 가늘게 떠내 염색을 해서 문양을 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고 부잣집에서 예단을 보낼 때, 시집을 갈 때, 또는 조정에 토산물을 바칠 때 사용했다고 한다.
공예품을 옛날의 것과 현대에 만든 것을 함께 전시해 놓은 이유는 서로 비교하면서 우리 공예품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나무 공예/벼룻집, 빗집, 관모함 [사진=정성환 기자]
나무 공예/벼룻집, 빗집, 관모함 [사진=정성환 기자]
나무공예/머릿장 [사진=정성환 기자]
나무공예/머릿장 [사진=정성환 기자]
나무공예/12각 나주반(위), 4각 나주반(아래)/김춘식 作 [사진=정성환 기자]
나무공예/12각 나주반(위), 4각 나주반(아래)/김춘식 作 [사진=정성환 기자]

일찍이 전라도 부안의 변산, 고창의 소요산, 장흥의 천관산, 고흥의 천둥산의 소나무는 그 규모와 질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 지역의 목공예품의 우수성은 이러한 질 좋은 나무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최소한의 금구장식(金具裝飾)으로 나무 그대로의 소박한 멋과 독특한 나뭇결의 아름다움을 살린 장, 반닫이, 소반 등 여러 상(床) 종류의 민속공예 작품들이 있다.
장(欌)은 나주, 화순, 동복이 유명하고 반닫이는 전주, 고흥, 영광, 남원에서 생산된 것이 우수했으며, 소반은 나주반을 최상품으로 여겼다고 한다.

‘전안 상’(奠雁床 신령에게 바친 상)이란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기러기를 올려신부 어머니에게 올리는 상이라고 한다.
기러기는 홀로 되어도 다른 짝을 구하지 않는다고 속성 때문에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

호작도, 유자상서도, 삼강행실도 상서도, 문자도(孝·弟·忠) [사진=정성환 기자]
호작도, 유자상서도, 삼강행실도 상서도, 문자도(孝·弟·忠) [사진=정성환 기자]

△민화
민화는 읽는 그림이다. 민화에는 기교가 없다. 높은 예술성과 창의력을 보여줄 목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민화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는 그림으로써 선비들이나 솜씨 좋은 화원들이 그린 그림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림에 재주가 있는 이름 모를 화공들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렸던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민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까닭에 민화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건강・행운・출세 등 세속적인 바람을 담아 집안을 꾸밀 목적으로 실생활에 널리 쓰인 실용성이 강한 그림이라고 한다.

호작도(虎鵲圖) [사진=정성환 기자]
호작도(虎鵲圖) [사진=정성환 기자]

조선시대에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그림을 선물로 주고받았는데 이런 그림을 ‘세화’라고 불렸다.
호작도(虎鵲圖) 속의 그림의 모양 세 가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호랑이는 1월을 뜻하며 호랑이 달이라고 불렀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상징한다.
십장생 중 하나인 소나무는 오랫동안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그림은 ‘한 해 내내 좋은 소식이 오랫동안 깃들기를 바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유자 상서도(有子尙書圖) [사진=정성환 기자]
유자 상서도(有子尙書圖) [사진=정성환 기자]

유자 상서도(有子尙書圖)에는 노란 열매, 책, 그릇이 그려져 있다.
노란 열매는 유자를 그린 것인데 유자가 ‘아들을 낳기를 바란다’라는 ‘유자(有子)’와 발음이 같다는 것에 착안해 그려 넣었다고 한다.
유자 아래에 놓인 그릇도 유자와 같은 의미로 득남을 상징한다.
책은 학문을 숭상하라는 뜻도 있지만 높은 벼슬을 의미한다.
이 그림은 “아들을 낳아서 그 아들이 출세하기를 바란다”라는 소원을 표현한 그림으로써 시집가기 전 딸이나 출산 전 산모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문자도/충(忠) [사진=정성환 기자]
문자도/충(忠) [사진=정성환 기자]

문자도(文字圖)는 관련된 문자를 그림 형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충(忠) 문자도는 대나무를 통해 충절의 의미를 뜻한다.
새우나 조개처럼 딱딱한 껍질을 그려 넣은 것은 충성스러운 신하의 절개(節槪)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새우와 물고기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의 정치가 굴원(屈原) 이란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굴원’은 모함을 받자 분을 삭이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숨진 충신이었다.
어부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할 때 새우와 물고기가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강에 음식을 뿌렸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새우와 물고기는 이 얘기를 생각해 그려 넣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자도’는 주로 어린이의 공부방에 병풍 그림으로 많이 쓰였다고 전한다.

문자도/효(孝) [사진=정성환 기자]
문자도/효(孝) [사진=정성환 기자]

효(孝) 문자도에는 잉어, 죽순, 거문고가 그려져 있다.
잉어는 중국 진나라 때 ‘왕상’이라는 사람이 계모가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강에 나가 잉어를 잡아다 계모에게 잉어요리를 해드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대나무와 죽순은 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맹종(孟宗)’이라는 사람이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계시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어머니 병은 죽순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한다.
‘맹종’은 한겨울에 죽순을 구할 수 없어 대나무밭에서 울고 있는데 눈물이 떨어진 곳에 죽순이 돋아나 어머니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다.
거문고는 ‘순’임금이 자신을 미워하던 계모에게 오히려 거문고를 켜 계모를 즐겁게 해드렸다는 효심이 지극함을 뜻하는 대순탄금(大舜彈琴) 일화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문자도/제(悌) [사진=정성환 기자]
문자도/제(悌) [사진=정성환 기자]

제(悌) 문자도는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아가라’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시경(詩經)’에 실린 시(詩)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그림 속 화병에 꽂은 나뭇가지는 아가위 나무(산사나무)를 그린 것이고 두 마리의 새는 ‘할미새’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시(詩)의 내용을 보면 아가위 나무는 형제만큼 가까운 사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할미새는 위험을 당하지 않을까 형제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사진=정성환 기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사진=정성환 기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조선 세종 때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윤리 그림책이다.
이 책은 왕과 신하,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덕목을 교육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글과 그림으로 소개한 것이다.

<세번째 이야기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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