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전통 놀이...광주 칠석동 '고싸움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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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전통 놀이...광주 칠석동 '고싸움 놀이'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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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민속놀이 중요 무형문화재 제33호 지정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추진 중
고싸움놀이 영상체험관/광주광역시 칠석동 소재.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 이야기 20]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 광주 칠석동 '고싸움 놀이'편이다.

고대 농경문화에서 달은 ‘음’인 여성을 상징했다. 첫 보름달이 뜨는 밤에 ‘줄다리기’ 하는 것은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례로 암줄(서부, 여자편)과 숫줄(동부, 남자편)의 고리를 걸고 하는데,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마을 뒤 죽령산에 옻돌이라 부르는 까만 돌이 많아 칠석(漆石)이라 부르는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은 고싸움놀이 풍속으로 유명하다.

△고싸움의 유래

예로부터 내려오는 칠석동 고싸움놀이의 유래를 살펴보면 칠석마을은 황소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와우상’모양이라 해서 이러한 지형은 터가 무척 거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황소가 뛰어다니면서 사람을 해치고 논과 밭이 망가지고 농작물도 피해가 생기자 이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해 소의 입에 해당하는 곳에 구유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놓고, 소가 일어서지 못하도록 고삐를 메어 할머니 당산인 은행나무에 묶어 놓고 꼬리는 일곱 개의 돌로 눌러 놓았다고 한다.

정월 보름이면 고싸움놀이를 해서 많은 사람이 마을의 터를 밟아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해 고싸움놀이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고싸움 명칭

‘고싸움’이란 명칭은 ‘고’라는 낱말과 ‘싸움’이라는 낱말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두 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서 싸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고’라는 말은 옷고름이나 노끈을 가지고 멜 때 한 가닥을 길게 빼서 둥그런 모양을 만들어 맺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싸움이라는 명칭은 고싸움을 벌이는 놀이기구인 ‘고’가 마치 옷고름이나 노끈으로 맨 ‘고’와 비슷하다는 데서 연유하여 유래한 것이다.

‘고’는 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도마뱀이나 용의 형상과 같다고 한다.

고싸움놀이는 용신을 모시고 다니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로 해석하기도 한다. 머리는 용머리를 의미하고 ‘고’의 줄은 용의 형상이라 생각했다.

신성한 용의 기운이 마을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줄’은 비를 내려주는 ‘용신’이라 생각했기에 ‘용신’을 모시고 다니면서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대보름에 고싸움놀이를 한다.

고싸움 놀이는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진행한다.

고싸움을 할 때 상 촌인 동부는 남자를 상징하고 하 촌인 서부는 여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여성을 상징하는 서부 팀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는 속설이 전하고 있으며 아마도 여성이 풍요의 신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고 머리는 용머리를 의미하고 줄은 용의 형상이라 생각했다.

신성한 용의 기운이 마을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 주고 줄은 비를 내려주는 ‘용신’이라 생각했기에 고싸움놀이는 ‘용신’을 모시고 다니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로 해석되기도 한다.

과거 농사일에 관한 중요 사항은 고싸움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농경지는 넓은데 물이 부족한 칠석마을은 고싸움을 통해서 이긴 쪽이 물 관리권을 고싸움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고싸움에서 승리한 쪽이 물 관리권을 가져가기 때문에 고싸움은 매우 치열하고 과격했다고 한다. 고싸움은 정월 보름에 행하던 집단놀이로 마을이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라 할 수 있다.

△칠석마을 신앙인 당산제

칠석동 당산제는 토속적인 마을 신앙으로 매년 정월 14일 밤 자시에 연례적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제당은 상 칠석에 있는 윗 당산과 하 칠석에 있는 아랫 당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에 있는 당산은 소나무가 신체 역할을 하고 할머니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고 있고, 아래에 있는 당산은 은행나무가 신체 역할을 하고 할아버지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마을의 지세가 청장년들에게 해가 되는 거센 터였기에 이 거센 터를 누르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고싸움놀이 준비과정

고싸움놀이를 하기 전에 정월 14일 당산제를 지내고 정월 15일부터 상 칠석마을과 하 칠석마을 사람들 간에 고싸움을 하기로 합의한다.

젊은이들이 집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볏짚을 모아서 통대, 통나무, Y자형 나무 등을 사용하여 고를 제작한다.

고싸움놀이는 음력 정월 열흘 무렵 10세 아이들의 5~6m의 조그만 고를 만들어 상대편 마을 앞에서 시위하며 승전가를 부르며 시비를 걸면서 싸움 놀이가 시작되고 15~16세 아이들이 합세하여 싸움판은 점점 커진다.

풍물패는 대보름날 아침부터 고를 맨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돌면서 흥을 북돋운다.

20세의 청년들은 10m 크기의 고를 만들어 온 동네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본격적으로 고싸움놀이가 시작된다.

고싸움 디오라마/전시실
고싸움 디오라마/전시실

△고싸움놀이 전개

고 위에 올라간 줄패장은 전체를 지휘한다.

장정 7~80명이 어깨에 가랫장을 메고, 양쪽으로 갈라진 꼬리는 부녀자 수십 명이 잡고 따르며, 깃대와 횃불을 든 사람과 풍물패도 함께 어우러진다. 고싸움은 대규모 인력이 함께 하는 만큼 협동심이 요구되며, 풍속 중에 싸움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남성적이고 격렬하다.

고싸움은 힘보다 주도면밀한 지략이 필요하며, 상대방의 고를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짓눌러 땅에 닿게 하면 승리한다.

위에서 아래로 눌러야 이기는 고싸움은 정면보다는 측면 공격이 유리하기에 방향을 틀기 위해 용트림을 거듭한다. 낮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밤까지 계속되며, 하루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다음 날까지 고싸움은 이어진다. 그래도 승패가 나지 않을 때는 2월 초하루에 고를 풀어 줄을 만들고 줄다리기로 최후 승패를 가린다.

고싸움과 줄다리기 등의 민속놀이에서 보는 매듭은 반드시 풀릴 것을 전제로 한다.

고싸움의 고는 가슴속에 쌓인 ‘고’, 즉 맺힘의 가시적 형상으로 고싸움이라는 진취적이고 강렬한 몸싸움의 한풀이로 이행되기도 한다.

따라서 승리한 팀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억눌림, 갈등, 좌절 등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풀어내는 일종의 해방감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삼한 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 시대 말까지 천오백 년 이상 이어져 온 고싸움놀이는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의 단합을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금지되었고, 또한 식민지 시대의 어려움 속에 고싸움놀이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고싸움놀이 기념비
고싸움놀이 기념비

△칠석동 고싸움놀이 전승

해방 이후에 고싸움놀이는 작은 규모로 행해지기는 하였으나, 옛날의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1960년대 중반, 칠석마을 유지들과 향우회, 학계의 도움으로 고싸움놀이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1969년 전남대학교 지춘상 교수에 의해 복원이 되었다. 1969년 제1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3년 제1회 고싸움놀이 축제를 시작으로 매년 고싸움놀이 축제 행사가 전수관 앞 민속놀이 체험마당에서 이틀간 진행되고 있으며, 칠석동 고싸움놀이는 88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시연되었다. 칠석동 고싸움놀이는 싸움 놀이지만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로서 중요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고싸움 놀이 축제/ 김숙희 작
고싸움 놀이 축제/ 김숙희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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