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詩)의 등불 '용아 박용철'...'용아생가(龍兒生家)'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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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詩)의 등불 '용아 박용철'...'용아생가(龍兒生家)'를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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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문예 운동가이자 시인
시문학파 형성...순수서정시 문학 선구자
용아생가,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소재

[투데이광주전남/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16] 정성환 기자 = 이번 문화역사이야기는 한국 시문학파를 형성해 서정시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 시인의 흔적이 깃든 '용아생가(龍兒生家)'를 찾아서다.

그는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해 시어의 조탁과 음악성, 서정성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문학의 순수성을 추구했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언어예술로 승화시킨 참된 현대 순수서정시의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용아 생가(龍兒生家)/사랑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정성환 기자]
용아 생가(龍兒生家)/사랑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정성환 기자]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에 소재한 용아 생가는 일제강점기 1930년대 한국 현대 시의 시문학파를 형성하여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로 그의 고조부가 19세기 후반에 지었다고 하니 100년이 훨씬 넘은 고택이다.

이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된 가옥이다.

용아 박용철朴龍喆((1904~1938) [정성환 기자]
용아 박용철朴龍喆((1904~1938) [정성환 기자]

시인과 문학평론가, 번역가, 연극운동가로 활동했던 민족 문예연구가 용아 박용철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 아호는 용아(龍兒), 눌재 박상의 후손으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광주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의숙,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면서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 독립정신을 키웠다.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 다닐 때 김영랑과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졸업 후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자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시골집에 칩거하며 문학과 철학책을 읽으며 세월을 보냈으나 16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한 아내와의 가정생활이 원만치 않아 이혼한 뒤 누이의 친구였던 임정희와 재혼한다.

용아생가/행랑채 [정성환 기자]
용아생가/행랑채 [정성환 기자]

박용철은 이때부터 스스로 방황에서 벗어나 눈부신 문학 활동을 하게 된다.

1930년대 용아는 정인보, 변영로  등과 함께 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창간하고 <문예월간>, <문학>, <극예술> 등 문예 잡지와 시문학 동인이었던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김영랑의 <영랑 시집>을 간행한다.

이후부터 『시문학』 발간에 참여한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을 ‘시문학파’를 형성하여 순수시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된다.

시문학 창간 동인들(앞줄 왼쪽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뒷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정성환 기자]
시문학 창간 동인들(앞줄 왼쪽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뒷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정성환 기자]

1920년대 조선 문단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계급 노선을 추구하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했다.

용아 박용철은 ‘임화’의 계급문학의 이데올로기와 ‘김기림’의 모더니즘 문학을 비판하며 김영랑 등의 시인과 어울리며 함께 1930년대 순수 서정시 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해 시어의 조탁과 음악성, 서정성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문학의 순수성을 추구했다. 

사랑채(왼쪽)/안채(오른쪽) [정성환 기자]
사랑채(왼쪽)/안채(오른쪽) [정성환 기자]

그는 1930년대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다 인생을 비유한 작품으로, 고향을 회상하는 현실과 ‘삶’의 여정 속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또 다른 정박지를 향해 떠나는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행랑채 [정성환 기자]
안채로 들어가는 행랑채 [정성환 기자]

그는 1920년대의 감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서구문학사조에 편향된 문단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높은 차원의 시 창작으로 승화시켜 ‘민족 언어의 완성’이라는 과제를 제시했으며, 특히 <시문학>은 비록 통권 3호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창작시 76편, 번역시 31편이 발표됨으로써 그 문학사적 비중은 매우 컸다.

용아는 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사회주의 사상에 매몰된 경향파 문학을 비판했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언어예술로 승화시킨 참된 현대 순수서정시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용아생가/사당 [정성환 기자]
용아생가/사당 [정성환 기자]

1930년 용아 박용철은 <시문학> 창간호에 다음과 같은 편집후기를 쓴다.

“사람은 생활이 다르면 감정이 같지 않고, 교양이 같지 않으면 감수(感受)의 한계가 따라 다르다. 우리의 시를 알고 느껴줄 많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믿어 주저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조선말로 쓰인 시가 조선사람 전부를 독자로 삼지 못한다고 어리석게 불평을 말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자한계(自限界)를 아는 겸손이다. 한 민족의 언어발달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구어(口語)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 시키는 길이다.”

이처럼 그는 시간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말의 시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1931년 박용철은 시 창작보다는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해외문학파에 참여하여 번역과 평론 활동에 전념했으며,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문지 <극예술>을 창간했다.

그는 이 무렵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실러의 시 <핵토르의 이별>. 하이네의 시 <내 눈물에서는> 등 주옥같은 70여 편의 시와 미국과 영국의 영시 300여 편을 번역하는 등 그가 번역에 쏟는 열정은 지대했다.

또한 그는 비평가로서 <조선 문학의 과소평가>, <기교주의설의 허망>, <시적 변용에 대하여>, 그의 시론의 근원을 보여주는 <효과주의 비평 논강> 등을 발표하여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했다.

특히 1938년 <삼천리문학>에 발표된 <시적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란 평론에서 그는 ‘시’라는 것은 단순한 목적이나 기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피 속에 용해 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시문학파를 다른 유파와 구별 짓는 이론적 토대를 정립했다.

박용철 시비/떠나가는 배 [정성환 기자]
박용철 시비/떠나가는 배 [정성환 기자]

박용철의 시에는 우울, 비애, 원망의 감성이 드러나는데 고향을 떠나야 하는 설움이 시문학 창간호에 실린 시 <떠나가는 배>에 잘 표현되어있다.

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 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헤살 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간다.
나 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용아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는 일제강점기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의 슬픔을 담고 있다.

‘나두야’란 시어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일제 식민통지로 논과 밭을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비애를 담고 있다.

떠나는 서글픈 심정과 고향에 대한 미련, 떠나기는 하지만 갈 곳이 없는 서러운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나 두 야’와 같이 띄어쓰기를 통해 느리게 표현한 것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는 작가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용아시비(왼쪽), 영랑시비(오른쪽)/광주공원 소재
용아시비(왼쪽), 영랑시비(오른쪽)/광주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영랑과 용아 두 사람은 16세 때 조혼을 했는데 영랑은 사별하고 용아는 이혼했다.

영랑은 휘문의숙을 다녔고 용아는 배재고보를 다녔다.

두 사람은 1921년 일본 청산학원 중학부에서 만나 영랑은 영문학을 했고 용아는 독문학을 했다. 그리고 함께 시인을 길을 걸으면서 평생 친구가 된다.

박용철의 초기 시에는 ‘우울’, ‘비애’, ‘원망’의 감성이 드러나는데 고향을 떠나 방황하는 식민지 피지배자의 설움이 녹아있다.

1931년 아내 임정희에게 보낸 편지글에도 “이 모든 우울의 구름을 벗겨버리고 청천백일 같은 심사로 아무 불안 없이 일을 계획하고 부딪쳐서 해내는 지경, 나는 위대한 건강이 욕심나오”라고 토로했을 만큼 허약한 건강이 그를 괴롭혔다고 할 수 있다.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나는 네 것 아니다> 등 후반기의 시는 아내 임정희에 대한 애정을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한 시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문학 詩文學>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펼치며 우리나라 현대시의 등불이 된 용아 박용철은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후두결핵을 앓다가 생을 마감한다.

용아 박용철 시비/송정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용아 박용철 시비/송정공원 소재 [정성환 기자]

그는 1930년 <시문학> 창간부터  1938년  35세로 요절할 때까지의 문학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창작집을 내지 못하고, 사후 가족들과 동료들에 의해  <박용철 전집>이 출간되고 2001년 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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