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의 제사를 모시는 제향 기능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 = 이번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혼과 유생들의 꿈과 열정이 깃든 '광주향교'의 이야기를 다뤄본다.
향교는 고려 시대 말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각 지방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인재들을 교육하는 것이 시초였다.
1392년 조선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교육개혁 정책을 표방하고 각 지방에 향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조선 성종 때 모든 지방에 향교 세움으로써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향교는 유학을 공부하며 공자 등 성현의 제사를 모시고 성현의 가르침을 전하는 관학 교육기관으로서 교육 기능뿐만 아니라 제향 기능도 있었다.
조선 초기 향교는 서당교육을 받은 16살 이상 40세 미만의 평민 이상의 자제들은 누구나 추천과 시험을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립중·고등학교, 지방국립대학쯤 된다고 할 수 있으며,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향교에 입학만 하면 무료로 공부하며 기숙사 생활까지 할 수 있었으며 군역도 면제받았다. 향교에서는 유교의 기본 이념인 ‘사서오경’을 배웠으며, 향교에서 일정 기간 출석하여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소과’에 응시할 자격을 가졌고, 초시와 복시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되어 지방의 하급관리가 되거나 성균관에 입학해 문과 시험을 거쳐 중앙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향교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향교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관리·감독하였으며 지방 수령의 근무성적을 평가할 때 향교의 관리능력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군현은 약 330여 개소에 달했다. 수령을 파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교수(종6품), 훈도(종9품) 충원에 어려움이 있어 생원과 진사 중에서 선발하여 충원했다. 또 한 그 고을에서 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시키기 위해 향교는 물론 수령까지 나서서 힘을 썼다고 하니 향교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건물 등이 파손되어 큰 타격을 받았고, 사림이 세운 사립학교인 서원이 등장하면서 위축되기 시작하여 점점 쇠퇴해 나갔다. 국가는 향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향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안도 추진해 보지만 서원에 밀리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결국, 영조 때에는 향교의 모든 교관이 없어지게 되면서 교육기관의 기능은 상실되고 유능한 학생들은 강학 능력을 상실한 향교를 떠나 사림의 사학기관인 서원을 찾게 되었다. 이후 향교는 문묘에 제사를 지내는 관학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고 지방 양민들의 군역을 피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문묘에 제사하는 기능만 유지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에 반해 서원(書院)은 사림세력의 양반들이 주축이 돼 세운 사학(私學)으로서 지금의 사립 중·고등학교, 지방 사립대학쯤 된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은 사액서원이 등장하면서 유능한 유학자가 유생들을 지도함으로써 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 혈연과 지연, 학벌, 당파 등에 의한 폐단이 심해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서원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650개 서원 중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했다.
그러나 그 이후 향교와 서원을 복원하여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또 하나의 역사이기에 그 유적을 보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향교가 처음 설립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398년(태조 7)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장원봉은 광주향교 학생들이 장원급제를 많이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원봉은 무등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학생들의 피해가 심하자, 성의 동문안(현, 대인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향교의 자리가 지대가 낮고 홍수가 잦아 무너지려 하자 당시 현감이었던 권수평이 1448년(세종 29) 현재의 자리에 향교를 옮겼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건립했는데 화재가 발생하여 광주 목사 조철영을 비롯하여 호남 유생들의 노력으로 다시 광주향교를 짓고 그 이후 수리와 재건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외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인륜을 밝히는 집’이란 뜻의 이곳은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강당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가 있고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낸다. ‘서재’ 뒤에는 생원과 진사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던 문회재(文會齋)와 영재들만을 모아 특별교육을 했다는 양사재(養士齋)도 있다.
지금은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사라진 쓸쓸한 학당이지만 백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우리 지역 학문의 전당으로서 청소년들이 꿈을 키우며 열정을 불태웠던 곳이며, 나라가 위기에 처한 일제강점기 때는 장성 출신 기우만을 중심으로 수백 명의 유생이 호남 항일의병을 결성하면서 본부로 사용된 항일의병의 집결지이기도 하다.
광주 향교의 <사마재>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사마재가 향교 안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79년 발간된 『광주읍지』에는 사마제가 “향교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마제는 향교에서 분가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폐쇄되었고 그 터는 광주공원에 편입되었다는 것이 1952년에 발간된 『광주향교지』에 기록되어 전한다.
1895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와 ‘소학교령’이 반포되자 광주향교의 ‘사마재’를 빌려 1896년 11월 남도 최초의 근대 공립학교인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를 세웠다.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지금의 광주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이며, ’어린이헌장탑‘이 서 있는 자리가 ‘사마재’ 터라고 한다.
양사제(養士齋)는 선비를 양성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육영재’ 라고도 부른다.
진학의 선비가 늘어남에 따라 ‘명륜당’만으로는 유생 수용이 부족하여 설치했다.
영재 40명을 선발하여 과거시험을 준비시키던 일종의 입시학원이었다. 현재는 서예실과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문묘인 대성전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동무’와 ‘서무’는 대성전보다 격이 낮은 건물로 동쪽과 서쪽의 행랑채라는 뜻이며, 1951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그러나 “대성전에는 중국 유학자만 모시고 우리나라 유학자는 격이 낮은 ‘동무’와 ‘서무’에 모시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다”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지금은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있다.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자, 자사, 서쪽에 증자, 맹자를 모시고 있으며, 송나라 2현인 정호, 주희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은 제향을 위한 공간으로 문묘로 불린다.
건물의 특징은 기둥이 네 개이고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심포 계통의 맞배지붕이다.
대성전에는 25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일 년에 두 번 음력 2월과 8월 중에서 정(丁) 일이 첫 번째 오는 날 제사를 지내는데 석전대제(釋奠大祭)라고 한다.
석전대제의‘석(釋)’은 차려놓는다는 뜻이고, ‘전(奠)’은 상형문자로서 추(酋)는 술병에 술을 담아놓고 덮개를 얹어두는 형상으로 빚은 지 오래된 술을 의미하며, 대(大)는 물건을 얹어두는 받침대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釋奠)은 정성스레 빚어 잘 익을 술을 받들어 올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말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 ‘단’을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을 행단(杏壇)이라 했다. 그러나 ‘행(杏)’을 살구나무 또는 은행나무로 해석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 주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광주향교 입구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본래 종묘와 궐문 앞에 세웠는데 점차 문묘와 지방 관부 등에도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마비 앞에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말에서 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광주향교 하마비는 입구 오른편에 있다.
공자님이 계신 곳이니 오만함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가라는 뜻이 담겨있다.
하마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를 줄인 말인데 광주향교 앞 하마비는 개(皆)자가 없는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라고 적혀있다.
이 비각은 1854년(철종 5)에 문묘를 중수하면서 7기의 비석을 비각 안에 세웠으나, 세월이 흘러 비각이 훼손되어 1935년 지방의 유림이 성금을 모아 새로 비각을 만들었다.
이 비각은 향교의 건립과 이전, 건물의 신축과 보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과 중수비와 중건비 등 비석 9기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으며, 이 비석은 광주향교의 소중한 역사이기도 하다.
비석 1호는 1563년에 세워진 ‘광주향교중신기’로 본문은 고봉 기대승이 쓰고, 음기는 회재 박광옥이 썼다. 비석 3호 ‘광주향교중신기’는 1855년 노사 기정진이 썼고, 비석 7호 ‘광주향교집강권군일제위성비’는 1843년 광주 목사 조철영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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