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의 장군'의 충의 정신이 깃든 '충민사'(2)...유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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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의 장군'의 충의 정신이 깃든 '충민사'(2)...유적을 찾아서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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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3충신, 정묘호란때 순절
한때 5·18 학살자 전두환 조상으로 오해
광주시민들에게 억울하게 외면받았던 전상의 장군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 = 광주의 3충신, 전상의 장군의 충의 정신이 깃든 '충민사'(2)...[유적을 찾아서]

이번 이야기는 한때 5·18 학살자 전두환 조상으로 오해를 받아 광주시민들로부터 억울하게 외면받았던 전상의 장군의 유적을 찾아서다.

전상의 장군은 정묘호란때 후금과의 전투에서 순절했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정려를 받아 고경명·김덕령 장군과 함께 광주의 3충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상의 장군(1575~1627)의 [유적을 찾아서]

전상의 장군 영정 [정성환 기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신흥강국 후금을 오랑캐의 나라라며 무시했다. 또한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고, 후금의 요동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평안도 앞바다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지원하여 후금을 자극했다. 인조의 이 같은 정책은 후금에게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었으며, 조선은 아무런 대책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결국, 1627년 1월 후금의 태종(홍타이지)의 사촌 형 ‘아민’의 3만여 명의 후금군은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후금의 군사들에게 파죽지세로 밀려 안주성 전투에서 전상의 장군이 순절했으며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다. 강화교섭이 시작되고 조선은 후금과 명 사이에 중립을 지킬 것과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제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오랑캐의 나라라며 무시한 후금군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며 전쟁은 끝났다.

 충민사(사당) [정성환 기자]

전쟁이 끝난 후 ‘인조’는 안주성 백상루에서 순절한 전상의 장군을 정2품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안주에서 광주로 시신을 옮겨 평두산에 예장 하였다. 예장(禮葬)이란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는 국가장을 말하며, 예장 묘는 왕릉 다음가는 무덤이라고 한다. 682년(숙종 8) 그의 충절을 기려 안주의 충민사에 배향하고 숙종 10년 충신 정려(旌閭)를 내려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화산마을에 정려각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6·25 한국전쟁으로 정려각이 훼손되자 그 자리에 ‘정려유허비’를 세웠으며, 1849년(헌종 15)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후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85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충민사를 건립하여 그가 순절한 지 358년 만에 단독배향하고 있다.

정려각(旌閭閣) [정성환 기자]

정려각(旌閭閣) = 광주광역시 지원동에 세웠으나 6.25 전쟁으로 훼손되었다. 현재 충민사 경내에 복원하여 충신정려를 명한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충신정려 현판 [정성환 기자]

충신정려 현판 =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밀고 있는 모습으로 '충신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행통훈대부구성도호부사전상의지려(忠臣贈資憲大夫兵曺判書兼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龜城都護府使全尙毅支閭)' 라고 새겨져 있다.

유물관=갑옷 외 26종 51점의 모조품이 전시됐다. 진품은 국립민속발물관에 전시됐다. [정성환 기자]

1985년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무등산 자락에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의 노력과 전남도민의 혈세로 충민사를 건립하였다. 사당인 충민사에 전상의 장군의 영정과 위폐가 배향되어 있으며 경내에 정려각을 복원하여 편액을 보관하고 있다. 사우 주변에는 창절문, 수의문, 정려각, 유물관 등이 있다. 전상의 장군의 유물 등 진품은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있으며, 교지, 완문, 기록화, 갑옷, 투구, 칼, 활, 관복 등 유적보존회와 박병삼 씨가 기증한 유품(모조품) 26종 51점이 충민사 유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유물관 전시실 내부 전경 [정성환 기자]

전상의 장군을 배향한 충민사에는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쓸쓸하기만 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의 열사인데 왜 찾는 사람이 없을까? 그 까닭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82년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무등산 자락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를 세우고 충민사를 건립할 당시 12·12 군사반란의 주모자이자 5·18 광주학살의 원흉인 전두환이가 자기 조상의 사당을 무등산 자락에 호화롭게 짓는다는 소문이 광주 시내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충민사는 전두환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전두환이가 정권을 잡기 전인 1979년부터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에서 사당 건립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전시실의 갑옷·투구·금관 [정성환 기자]

이 무렵 서울 인사동 골동품 상가에 장군의 유품이 매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전두환과 전상의 장군이 같은 집안인 줄 알고 이 유품을 매입하여 전두환 동생 전경환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이에 전경환 측에서 족보를 확인해보니 전상의 장군은 천안 전씨이고, 전두환은 완산 전씨였다. 시조는 같지만, 문중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전상의 장군은 전두환과 같은 집안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 후 전경환은 선물로 받은 유품을 국립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광주군수 병조판서 교지/어모장군 교지/칼, 등체, 죽도, 병부, 전대등
완문/장군의 후손에게 완문을 내려 호세와 일반잡역을 일체 면제한 문서/1904년, 광주군수
완약/장군의 후손에게 완약을 내려 잡역 일체를 영구히 면제한 문서/1906, 광주군수 [정성환 기자]
 

1985년 충민사가 준공되어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유물을 전시했는데 전상의 장군의 유품 중 일부가 전경환의 이름으로 충민사 유물관에 기증이 되었고, 충민사 입구에 세운 공적비에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다. 그 당시 전두환은 광주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주범이었기에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충민사를 건립하고 공적비에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것은 광주시민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참을 수 없는 분노였기에 전상의 장군이 전두환의 조상이라는 소문만을 믿고 공적비를 부숴 버린 것이다.

공적비 =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는 한때 광주시민에 의해 파괴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정성환 기자]

전상의 장군은 전두환 일가와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전두환의 조상이라는 오해를 받아 광주시민들의 무관심과 외면을 받은 것이다. 전상의 장군은 김덕령 장군, 고경명 장군과 더불어 광주의 3 충신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광주시민의 가슴속에 그 오해가 풀리지 않는 걸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하여 광주대교를 거쳐 월산동 로터리까지 약 1.3km의 구성로(龜城路)는 정묘호란 때 안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구성공(龜城公) 전상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도로명이다. 이제는 광주시민들이 충민사를 자주 찾아가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전상의 장군의 예장석 묘/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평두산)/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 [정성환 기자]

‘예장석묘’는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무등산 충민사 인근 평두산에 있는 전상의(1575~1672)장군의 묘소이다. ‘애장석묘’의 예장(禮葬)은 국가에서 공신에게 베푸는 장례로 오늘날 국장과 같은 성격이다. 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와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있다. 묘 앞에는 1857년(철종 8)에 세운 묘비가 서 있다.

전상의 장군은 1684년(숙종 10) 정려(旌閭)를 받아 광주시 동구 지원동 화산마을 앞에 정려각을 건립하였으나 6·25전쟁으로 훼손되어 그 자리에 1983년 유허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곳이 순환도로가 나면서 ‘정려각유허비’는 ‘신도비’처럼 전상의 장군의 묘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정려각 현판은 현재 충민사 경내 정려각에 보존되어있다.

충민공 전상의 장군 묘소 입구 =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와 ‘정려유허비이설내역’을 새긴 비와 ‘충민공전상의장군묘소입구’ 석비가 세워져 있다. [정성환 기자]

광주는 예향(禮鄕)의 도시이며 또한 의향(義鄕)의 도시이다. 충효의 정신이 깃든 광주는 나라가 위급할 때는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많은 유생과 백성들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붓이나 호미 대신 칼과 창을 들고 의병을 모집해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 대표적 인물이 고경명과 김덕령 장군이이며, 전상의 장군은 비록 의병은 아니었지만, 조선 관군의 장수로서 백상루에 홀로 남아 후금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한 자랑스러운 광주의 3 충신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희생으로 자유를 누리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은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한 선조들의 의로운 순절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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