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의병장의 숨결을 찾아서...광주 '포충사'(1) 「인물편」

임진왜란 때 호국충절한 의병장 고경명(1533~1592) 선생을 기리는 사당 '포충사'

2021-07-02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2  = 이번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는 광주 '포충사' 시리즈로 제봉 고경명 선생의 호국충절을 기리는 「인물편」과 포충사 「공간 구성편」으로 나누어 연재한다. 

[인물편]

구사당(포충사/광주광역시

△고경명(1533~1592) 선생의 생애

고경명 선생은 1533년(중종 28) 광주 압보촌(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 본관은 제주이다.

1552년(명종 7) 20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 26세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출사했다. 고경명 선생은 청렴결백하고 평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며, 성리학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특히 시와 글씨, 그림, 풍류에도 뛰어나 임억령 · 김성원 · 정철과 더불어 식영정 4선이라 불린다.

그는 탁월한 문장력으로 명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부친 고맹영과 장인 김백균은 당시의 세도가인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출세 가도를 예견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그의 관직 생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문정왕후의 위세를 엎고 각종 비리를 일삼던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명종’은 ‘이량’을 중용하였으나 그도 역시 윤원형과 다를 바 없이 비리를 일삼았다

이에 신진 사림들이 이량의 비리를 비판하고 나서자, 그는 기대승과 윤두수 등을 모함하여 파직시켰다. 1563년(명종 18) 기대항 등이 이조판서 ‘이량’의 비리에 대해 탄핵을 논의할 때 제봉은 홍문관 교리로서 참여했는데, 그 탄핵 논의 사실을 장인 김백균을 통해 이량에게 알려준 것이 발각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부친과 장인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이량은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고경명 또한 울산 군수에서 파직되어 귀향 후 19년간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이량’ 사건으로 관직에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그는 학문에 전념하며 자연을 벗 삼아 산수를 유람하고 무등산 기행문인 『유서석록』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제봉은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더욱 낮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여러 사람을 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이런 그의 포용적 자세가 임진왜란 직후 최대 규모의 의병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를 시작으로 서산군수,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로 근무하던 중 1591년(선조 24)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서인이 실각할 때, 송강 정철과 친교가 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10여 년의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했다. 만약 이때 파직되지 않고 계속 동래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의 성품을 보아 송상현을 대신하여 순절했을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5.2)되고 선조는 한양(4.30)을 떠나 송도(개성 5.1)와 평양(5.7)을 거쳐 의주(5.22)로 파천하였다. 이러한 국란의 위기에 고경명은 전 나주 부사 김천일, 광주 박광옥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하고 30일 만에 6,0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담양 추성관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고경명은 유팽로, 안영,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아들 종후·인후와 함께 왜적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6월 1일 담양을 출발하여 의주를 향해 출정했다. 그는 60세의 나이에 출정 40일 동안 20여 편의 격문을 초안했으며 말을 타고 가면서 지었다는 “마상격문”은 제갈량의 “출사표”, 최치원의 “토황소격문”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 3대 격문이라고 전한다. 제봉은 선조가 있는 의주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왜군이 전주로 침략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키기 위해 왜적의 본진이 있는 금산성으로 향했다.

이 무렵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남해안을 장악하게 되자 일본군의 해상보급이 불가능해졌으며, 부산에서의 육상보급도 의병의 게릴라 전술에 막힘에 따라 일본군은 호남지방에서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전주성을 공격하려고 웅치와 이치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웅치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을 전주성 외각 ‘안덕원’에서 동복 현감 황진 장군이 격퇴함으로써 전주성을 방어할 수 있었으며 ‘이치 전투’에서 권율과 황진 장군이 왜군을 궤멸시켜 호남을 지킬 수 있었다.

7월 10일 7천여 명의 의병과 1천여 명의 관군이 연합하여 금산전투에 임했으나 왜군의 공격에 겁을 낸 관군이 싸움을 포기하고 패주한 관계로 사기가 떨어진 의병마저 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실상을 『선조수정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의병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관군이 약한 것을 알고 총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 영암군수 김성헌이 도망침에 따라 관군이 크게 패하여 무너지고, 그 소식이 진중에 펴져 의병들이 동요하고 대오도 무너져 흩어졌다>.

특히 고경명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전투에 협조하지 않았고, 방어사 곽영도 관전만 하고 응전하지 않아 고경명의 7천여 명의 의병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 고경명은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자는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의 의견을 뿌리치고 “패전 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밀려오는 적과 맞서 분전하다가 아들 고인후, 종사관 유팽로 ‧ 안영 등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으니 그의 나이 60세였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을 때 고경명의 거병 소식을 듣고 공조참의를 제수하고 교서를 내렸으나, 교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순절한 후여서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금산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관군이 연패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의병이 주축이 돼 일본군 주력부대를 상대로 싸운 최초의 전투였으며, 비록 패했으나 일본군 또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호남진출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금산전투는 어려운 전황 속에서 호남지방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고경명의 순절은 전국 선비들의 충의(忠義)를 일깨워 본격적인 의병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와 동생이 순절하자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는 복수 의병장이 되어 진주성에서 9일간의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에 패하고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으며, 고종후의 충노 봉이와 귀인도 이날 그의 뒤를 따라 순절했다.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선생의 노비로서 금산전투 의병으로 참전했다. 1592년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 선생과 둘째 아들 고인후 부자가 전사하자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고종후와 함께 순절했다.

고경명 의병장이 출정하려고 집을 나설 때 부인께서 특이한 무늬로 된 버선을 내주고 싸움터에 나가는 날은 반드시 이 버선을 신고서 싸우기를 당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훗날 수많은 시체 속에서 장군의 시신을 찾을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경명

아버지와 동생 인후의 비보를 전해 들은 제봉의 큰아들 고종후는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사에 임시로 안장했다. 40여 일 후 파묘를 했는데 여름비가 내렸는데도 시신이 썩지 않고 살 색이 산 사람 같아서 보는 자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전라도 화순의 흑토평에 장사지내고, 1609년 3월 사패지가 있는 장성 오동리(영천리)에 이장하였다. 광주 포충사, 금산의 종용사와 성곡서원,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조는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하였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제봉집』, 『유서석록』 등이 있다.

이 삼강문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경명(1533~1592)과 그의 가족 6명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844년에 건립한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이다. 1충(忠), 3효(孝), 2열(烈), 1절(節) 등 7명이 정려(旌閭) 되었다. 1충(忠)은 고경명, 3효(孝)는 그의 장남 고종후 · 차남 고인후 · 손자 고부금, 2열(㤠)은 그의 딸과 그의 조카며느리 광산 정씨, 1절(節)은 그의 동생 경형이다.

1595년(선조28)에 그의 집에 정문(旌門)을 내리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경명과 두 아들이 임금의 교지에 의해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다. 광주광역시는 의병장 제봉 고경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역부터 남광주역까지 3,230m의 거리를 제봉로라고 명명했으며, 충렬공 고경명, 충장공 김덕령, 구성공 전상의 장군은 나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아 광주의 3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금산전투에서의 고경명 부자의 순절은 전국적인 의병 결성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의 忠과 義의 정신을 이어받은 전라도 광주는 동학농민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5·18 민주화운동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분연히 일어나 ‘義’를 위해 항거했던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고경명 이야기 인물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