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3충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숨결을 간직한 '충장사'(1) 「인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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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3충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숨결을 간직한 '충장사'(1) 「인물편」
  • 정성환 기자
  • 승인 2021.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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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호국충절한 광주의 3충신 중 의병장 김덕령(1567-1596)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
「명신록」에 김덕령 장군은 ‘제갈공명’에 비견되고, 용맹은 ‘관운장’에 버금간다고 기록...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4 =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숨결을 간직한 '충장사'(1) 「인물편」...

이번 광주 '충장사' 시리즈는 고경명·전상의 장군과 함께 광주의 3충신으로 기록된 충장공 김덕령 장군편으로 1부 「인물편」 2부「유적편」으로 나누어 연재한다.

[인물편]

충장공 김덕령 장군 영정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1567~1596 · 29세)의 생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전라도 광주목 석저촌(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충효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7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형 덕홍과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덕령은 유년과 청년기에 용력(勇力)과 효심(孝心)이 깊었다고 한다. 「명신록」에는 김덕령 장군은 ‘제갈공명’에 비견되기도 하며, 용맹은 ‘관운장’에 버금간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선조실록」은 김덕령이 젊을 때부터 용기가 뛰어나 모두 탄복했다. 의병장으로서 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충장사=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위폐와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추모제는 해마다 9월 15일 열린다. [사진=정성환 기자]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7일 만에 선조는 도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고, 조선의 수도 한성은 일본군에 함락당했다. 김덕령은 형 ‘덕홍’과 함께 고경명 의병장의 막하로 들어가 의병에 합류하여 전주까지 출정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했다. 1572년 6월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형 덕홍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형의 복수를 위해 무등산 원효사 계곡에서 무기를 만들고 왜적과의 전투를 준비했다고 한다. 지금도 원효사 계곡 상류에는 김덕령 장군이 칼과 창을 만들었다는 ‘주검동 유적’이 있다.

충용문(외삼문)=충용(忠勇)’이란 이름은 선조가 김덕령 장군께 하사한 군호‘충용군(忠勇軍)’에서 따와 ‘충용문’이라 했으며, 글씨는 경암 심상필 선생이 썼다. [사진=정성환 기자]

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과 한성을 탈환하자 1년 6개월만인 1593년 10월 3일 한성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일본군은 경상도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웅거하며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백성들은 흉년까지 겹쳐 기아에 허덕이고, 민심은 흉흉해 생활은 피폐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를 지켜볼 뿐, 아무런 대책도 없었고 당쟁만 일삼고 있었다.

익호문(내삼문) [사진=정성환 기자]
익호문(내삼문)=광해군이 김덕령에게 하사한 군호 ‘익호장군(翼虎將軍)’에서 따와 ‘익호문’이라 했다. ‘익호(翼虎)’란 날개가 달린 호랑이란 뜻으로 용맹하고 날쌘 장수를 말한다. 글씨는 경암 김상필 선생이 썼다. [사진=정성환 기자]

이 무렵 김덕령은 어머니의 3년 상을 모시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충의정신(忠義情神)은 상중임에도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그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1594년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충용장’ 군호를 받았으며 형조 좌랑과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김덕령은 5천여 명의 의병장이 되어 1594년 1월 “쓰시마를 거쳐 오사카로 진격한다”는 노정표를 발표하고 진주로 향했다.

동재 [사진=정성환 기자]
동재 [사진=정성환 기자]

 

서재 [사진=정성환 기자]
서재 [사진=정성환 기자]

조정에서는 군 작전상의 문제와 군량 문제 등으로 전국의 의병을 통합하여 김덕령의 충용군에 소속시키니, 1594년 4월(선조 27) 27세의 김덕령은 조선 의병 총수가 되어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아 진해와 고성에 주둔하면서 왜군의 호남침략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장문포 해전’에서 수륙합동 작전을 펼쳤으나 명군과 왜군의 휴전협상으로 특별한 전과나 전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결국, 장문포 해전의 작전 실패로 도체찰사 윤두수는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김덕령 장군 또한 많은 사람의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내삼문(익호문)과 동재 서재 [사진=정성환 기자]
내삼문(익호문)과 동재, 서재 [사진=정성환 기자]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김덕령 장군은 임무를 태만한 군인이나 탈영병에 대해서는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탈영병의 아버지인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를 장살 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진주 유림과 정탁의 변호와 선조의 결단으로 간신히 석방되기도 했다. 그 당시 의병의 군율은 매우 엄격하여 도망병과 민가를 침해하는 자는 참수에 처하고 그 처자까지 노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덕령 장군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은 조정 대신과 장군들의 시기와 모함, 권력의 음모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96년 4월 감옥에서 풀려난 김덕령 장군은 사기진작과 흐트러진 군대를 재정비하는 데 힘써보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울분의 세월을 보내다 4개월 후인 1596년 7월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2차 투옥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충장공 신도비=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훌륭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2004년 2월 23일 충장사 경내에 세웠다. [사진=정성환 기자]

 

헌사비 [사진=정성환 기자]
헌사비(獻辭碑)=2004년 건립됐으며, 충장사 추진위원회의 헌금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정성환 기자]

1596년(선조 29) ‘이몽학’은 서얼 출신의 왕족으로서 홍성에서 ‘한현’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김덕령 장군은 ‘권율’의 명을 받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운봉(남원)까지 진군했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권율의 장계를 받고 진주로 돌아왔으나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종사관 ‘신경행’의 무고와 ‘한현’의 거짓 진술로 체포되어 선조로부터 한 차례의 친국과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국문을 받으며 무릎과 정강이뼈가 아스러지는 고문을 당한 김덕령 장군은 ‘춘산곡’을 지어 자신을 구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한탄하며,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 밖에 없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1596년 8월 21일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29세였다.

충장사건립공적비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사건립공적비(忠壯祠建立功績碑)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 가족묘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 가족묘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관해 『선조수정실록』 은 “김덕령 장군의 죽음은 선조의 계획에 따라 영의정 유성룡, 윤두수, 의금부 판의금부사 최황 등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김덕령 장군이 억울하게 옥사하자 남도 의병은 해체되고 의병장 곽재우는 비슬산에 은거하며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 김덕령 휘하의 용장 최담령과 최강은 어리석은 겁보인 체 스스로 폐인처럼 살았으며 김덕령의 처남 ‘이인경’도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역사의 기록을 보면, 김덕령 장군을 ‘이몽학의 난’에 끌어들여 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이것은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제거하기 위한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음모였다고 볼 수도 있다.

김덕령 장군 묘소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 묘소=묘 앞에는 장명등(長明燈), 석양(石羊), 무인석(武人石) 등 석물이 배치돼 있다. 또 산 끝자락에 김덕령 장군의 가족묘가 조성됐다. [사진=정성환 기자]

그만큼 그의 죽음은 백성들, 특히 남도의 민중들에게 큰 슬픔이자 충격이었다. 김덕령 장군의 시신은 아우 ‘덕보’와 친척들에 의해 한성에서 광주까지 운구되었다. 김덕령 장군은 역모죄로 문초 받았기에 시신은 문중의 산소가 있는 곳에 안장되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무등산 이치마을의 야산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65년의 세월이 흐른 1661년(현종 2년) 신원 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숙종 때 ‘벽진서원’에 회재 박광옥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벽진서원’을 ‘의열’이라 사액하였다. 1788년 (정조 12)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와 ‘정려비’를 하사하였으며,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리고 『김충장공유사』를 편찬하였다.

은륜비각 [사진=정성환 기자]
은륜비각 [사진=정성환 기자]
은륜비 [사진=정성환 기자]
은륜비=김덕령 장군의 호국정신과 충효 사상을 기리기 위해 정조임금의 ‘윤음’을 읽고 1842년 광주 목사로 부임한 조철영이 1842년(현종 8)에 장군의 행적을 직접 쓰고 ‘은륜비’를 세웠다. 은륜비는 원래 충효동 배제 마을에 있었으나 충장사를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사진=정성환 기자]

 

호패형은륜비 [사진=정성환 기자]
호패형 은륜비=<유명조선국김충장공덕령 은륜비> 조철영이 짓고 썼다. [사진=정성환 기자]

 

한글로 쓰인 은륜비 [사진=정성환 기자]
한글로 쓰인 은륜비=1972년 12월 임창순이 짓고 이규형이 썼다. [사진=정성환 기자]

‘은륜비’가 한문으로 쓰여있어 김덕령 장군의 업적을 알리기에 부족함이 있어,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내용을 보완하여 동판에 한글로 써서 따로 세웠다.

김덕령 장군 유물관 전경 [사진=정성환 기자]
유물관=김덕령 장군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곳으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 곽, 친필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정성환 기자]

1971년 김덕령 장군 충장 사우를 건립을 위해 이치마을 산기슭에 안장되어 있던 장군 묘소를 378년 만인 1974년 11월 19일 이장하기 위해 파묘를 했다.

관을 열어보니 살은 썩지도 않았고 장군의 큰 눈동자는 정면을 주시하고 있어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생존자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 활동 시기의 의복과 관련 유적지 [사진=정성환 기자]

 

그 당시 옷을 누비는 순서를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해 준다. [사진=정상환 기자]

 

김덕령 장군 의복=의복 11점이 출토됐다. 이중 8점(저고리 1점. 천릭 2점. 직령포 4점. 겹유고 1점)이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됐다.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 관곽 [사진=정성환 기자]
관곽=시신을 모셨던 당초의 내곽과 외곽 [사진=정성환 기자]
관곽 측면 [사진=정성환 기자]
관곽 정면 [사진=정성환 기자]

김덕령 장군 관곽. 묘 깊이는 6척(180cm) 관 위의 석회 두께 30cm의 회격묘로 전면이 돌로 이루어졌다. 관은 내관, 외관 두 겹으로 되어있는데 내관의 길이가 178cm이며 관 외관에 정6품 관직인 ‘형조 좌랑’의 글씨도 남아 있다. 관의 크기로 보아 장군의 키는 5.5척(168cm)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김덕령 장군 친필 문서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유사 [사진=정성환 기자]

<충장공유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행록과 시문을 기록한 책이다. 부록에는 형 덕홍이 의병에 참여하여 순국한 사실, 동생 덕보가 정묘호란 때 병으로 의병에 참여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694년(숙종 20) 왕명에 따라 편찬되었고 정조 때 다시 간행되었으며 숙종 본은 규장각 도서에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사 와 김덕령 장군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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