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하, 옹고집과 융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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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하, 옹고집과 융통성
  • 박주하
  • 승인 201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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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나랑 박주하…붓대로 멋대로―

시골에 살고 있는 친구가 바람도 쏘일 겸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때 단짝인 이 친구는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의 그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속마음을 줄 수 있는 가장 절친한 친구다. 진즉 한번 찾아간다고 마음먹었지만 바쁨에 쫓겨 만나 본지 꽤 오래됐다.













▲ 박주하 '투데이광주' 대표/발행 편집인

내가 이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모두가 대학진학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무렵인 고3 때다. 당시 계림시장 뒤쪽 모퉁이에 조그마한 술집이 있었는데 저녁 8시경 갑자기 찾아온 그가 나를 불러내더니 다짜고짜 그 곳으로 끌고 갔다.

나는 아직 술맛을 모르는데 그 친구는 제법 한잔씩 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그는 시골출신이어서 방학 중 농사철에 가끔 마셨다고 한다.

"무슨 일이야?"

나는 어리둥절해 따지듯 물었다.

"급하긴, 좀 있다 이야기 할 테니 기다려"

그러면서 주먹 크기의 고막과 새조개로 안주를 시키고 막걸리를 주문했다. 이들 안주는 지금은 몹시 비싸지만 그 때만 해도 상당히 싸고 흔했다.

술 한 주전자가 바닥났으나 그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농담만 잔뜩 늘어놓았다. 취기가 돈 모양이다. 나 역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를 붙들고 술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그의 자취방까지 간신히 돌아와 정신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로도 그에게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궁금해서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그 때마다 빙그레 웃을 뿐이다.

그런데 그 비밀이 대입원서를 제출하면서 밝혀졌다. 그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낙향을 결심하면서다. 그날 시골집으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갑갑한 심정을 나에게 털어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친구의 아버지는 서슬이 시퍼렇던 자유당 독재시절, 야당 골수분자로 낙인찍힌 바람에 가세가 쪼들려 장남인 그를 대학까지 보낼 형편이 못됐다.

그래도 친구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한 그는 끝내 이를 숨겼고 오히려 밝은 미소로 나를 대했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평소에도 궁핍한 내색은 전연 비치지 않았다. 다른 친구 같았으면 사정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을 것인데 그는 아니었다.

“꽉 막힌 놈, 융통성도 없는 놈”이라고 핀잔도 줬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저 웃고 만다. 이런 그의 마음이 나를 끌었다.

그후 연락이 끊긴 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와 다시 연락이 된 것은 그가 2남 2녀를 낳고 장남인 큰애가 서울대학교 대학원 2년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다.

연결된 전화는 뜻밖에도 그 친구였다. 퇴근 시간이어서 곧장 만났다. 반가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볼이 쑥 들어간 얼굴에 흰머리가 절반을 차지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우렁차고 패기는 만만했다.

그 동안 시골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는 한 권의 소설을 쓸 정도였다. 자기가 못 배운 한을 자식에게 쏟으면서 장남이 사법고시를 합격할 때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숱한 고생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의 소식도 접했지만 찾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장남을 대학원까지 보내고 사법고시까지 합격해 만나도 떳떳하겠다 싶어 제일 먼저 나를 찾았다고 한다.

“때려죽일 놈”

어렸을 때의 말투대로 욕부터 했다. 그러나 그 욕 속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은 무슨 까닥일까.

그 뒤부터는 자주 연락이 됐다. 검사 시보를 시작한 장남도 가끔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술을 같이 마셔보니 부전자전일까 아버지의 곧은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

“너만은 융통성을 좀 가져라”며 몇 번이나 충고했지만, 그 뒤 들린 소식은 아버지보다 더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서 그 원리 원칙이 오히려 그에게는 적격일 수도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융통성이 필요한 것 아닐까.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그 융통성 말이다.

나는 그후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안쓰러움이 앞섰다. 훌륭히 자식 키운 보람으로 고생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 융통성 없는 옹고집 때문에 흘러가 버린 세월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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