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학아세, 전태일 재단 "당시 하루 15시간 근로 댓가 커피 한잔 값"...류석춘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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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학아세, 전태일 재단 "당시 하루 15시간 근로 댓가 커피 한잔 값"...류석춘 비난
  • 박종대
  • 승인 201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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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학아세, 전태일 재단 "당시 하루 15시간 근로 댓가 커피 한잔 값"...류석춘 비난

전태일재단이 류석춘 연세대 교수의 전태일 관련 월간조선 기고글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다.

전태일재단은 11일 ‘류석춘 교수의 곡학아세를 규탄한다’는 입장문에서 “최근 몰역사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류 교수가 월간조선에 전태일과 관련한 글을 썼다”며 “내용 자체도 무지와 왜곡투성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전태일과 노동자들을 박정희 정권을 왜곡·미화하는데 활용했다는 면에서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류석춘 교수는 최근 월간조선에 “전태일은 16세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3000원을 받았다”,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등의 내용이 담긴 글을 기고했다.  

전태일재단은 “수치만 나열하며 그 이면을 보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는 전형적인 곡학아세”라며 “1960년대 당시 서울의 커피 1잔 값이 50원이었다.

당시 시다들의 월급 1500원은 하루 종일 일해도 커피 1잔값 밖에 벌지 못하는 살인적인 저임금이었다”고 질타했다.

이어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어 받았다는 15,000원 또한 하루 일당이 커피 10잔, 커피값으로 추산하면 요즘 돈으로는 4만원 정도다.

10배가 올라도 하루 일당 4만원, 그야말로 살인적인 저임금인 것이다.

이렇게 시다들의 임금 자체가 살인적인 저임금이었기 때문에 그 임금의 열 배를 받아도 저임금이었던 사정을 류석춘 교수는 전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다.

또한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적게 잡아도 주당 105시간으로 일요일도 없이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며 “이렇게 일해서 받는 일당이 시다는 커피 한 잔 값인 50원, 재단사는 커피 10잔 값인 500원이었다.

이게 착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전태일재단은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전태일의 월급이 많이 올랐다고 하는 것은 전태일평전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반증”이라며 류석춘 교수는 전태일평전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전태일평전과 일기를 보면 전태일이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 전태일은 재단사와 재단보조, 다림질까지 1인 3역의 일을 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전태일이 월급이 많이 올랐다고 하는 것은 전태일평전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강하게 비난했다.

전태일 재단은  끝으로 류석춘 교수는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몰역사적이다.

그런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고, 우리 사회의 적폐다. 고 덧붙였다.

다음은 전태일 재단 입장문 전문

최근 몰역사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연세대 류석춘 교수가 월간조선에 전태일과 관련한 글을 썼다.

내용 자체도 무지와 왜곡투성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인 전태일과 노동자들을 박정희 정권을 왜곡-미화하는 데 활용했다는 면에서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류석춘 교수는 해당 글 전태일 관련 내용에서 “전태일은 16세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고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3000원을 받았음”으로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어서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이는 수치만 나열하며 그 이면을 보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는 전형적인 곡학아세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류석춘 교수는 임금의 액수만 이야기하고 실질 구매력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 결과 기준점으로 제시한 시다들의 임금이 먹고살 만한 임금이었는지는 아예 관심도 두지 않는다. 1960년대 당시 서울의 커피 1잔 값이 50원이었다. 당시 시다들의 월급 1,500원은 하루 종일 일해도 커피 1잔 값밖에 벌지 못하는 살인적인 저임금이었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어 받았다는 15,000원 또한 하루 일당이 커피 10잔, 커피값으로 추산하면 요즘 돈으로는 4만원 정도다. 10배가 올라도 하루 일당 4만원, 그야말로 살인적인 저임금인 것이다. 이렇게 시다들의 임금 자체가 살인적인 저임금이었기 때문에 그 임금의 열 배를 받아도 저임금이었던 사정을 류석춘 교수는 전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다.

둘째, 류석춘 교수는 당시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70년대 당시 한국은 유례없는 장시간 노동 국가였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적게 잡아도 주당 105시간, 일요일도 없이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 이렇게 일해서 받는 일당이 시다는 커피 한 잔 값인 50원, 재단사는 커피 10잔 값인 500원이었다. 이게 착취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셋째, 류석춘 교수는 당시 노동구조와 임금체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미싱사들은 주로 ‘객공’이라는 도급제 방식으로 일했다. 그래서 시다와 미싱보조의 월급도 미싱사가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노동자의 월급으로 주어야 했던, 그래서 미싱사가 실제 가져가는 월급은 훨씬 적었던 기막힌 노동구조를 류석춘 교수는 아예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넷째, 류석춘 교수는 전태일평전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전태일평전과 일기를 보면 전태일이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 전태일은 재단사와 재단보조, 다림질까지 1인 3역의 일을 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전태일이 월급이 많이 올랐다고 하는 것은 전태일평전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그 외 GDP 통계를 활용한 주장 등은 경제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황당한 이야기이므로 굳이 더 논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류석춘 교수처럼 편협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불순하게 전태일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역사에 또 다른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그래도 전태일에 대해 언급하겠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한 검토와 연구를 한 후 이야기하는 것이 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점을 류석춘 교수에게 다시 상기시켜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류석춘 교수는 학자로서는 게으르고, 기고자로서는 비양심적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몰역사적이다.

그런 사람이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불행이고, 우리 사회의 적폐다.

류석춘 교수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오점을 반성하고 당장 교수직을 사퇴해야 할 것이다.

2019년 10월 11일

전태일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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