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이야기]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 동학농민혁명②...제1차 동학농민혁명(고부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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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이야기]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 동학농민혁명②...제1차 동학농민혁명(고부 봉기)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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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도 중 강경파인 남접의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 동학을 반봉건·반외세 투쟁 의지를 결집하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1894년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를 위한 최초·최대의 시민 혁명인 동학농민혁명 주도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5척(약 152cm)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 얻어...1892년 고향 고부에서 동학 교주 최시형 만나 고부 지방 접주로 임명되고, 동학 남접의 행동대장으로 혁명적인 강경노선 걸어

우리나라 역사 최대의 민중 혁명이었던 동학 농민 전쟁의 출발점은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봉기로부터 시작...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침탈에 맞서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 농민 1천여 명 봉기

고부 농민 봉기,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잉태한 촉매제 역할
전봉준 장군과 동학 농민군 상(불멸-바람길, 작가 임영선)/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과 동학 농민군 상(불멸-바람길, 작가 임영선)/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소재. 1894년 5월 11일 동학 농민군의 첫 승전보를 전한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조형물.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90)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반봉건·반외세를 주창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학(西學)과 반대되는 새로운 종교를 지향한 것이 동학(東學)이다. 이번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 '동학농민혁명' 중 '제2편 제1차 동학농민혁명(고부 봉기)이다. 3편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다음회에 연재된다.


◆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세력 성장

동학은 접(接)과 포(包)를 중심으로 한 포교조직이었다.

당시 교주 최시형을 따르는 온건파 동학도들은 주로 교주 최시형이 있는 충청도 지역에 많이 분포해 있었고,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이 종교로서 인정받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동학교도들은 전라도에 주로 분포해 있었고 교조신원운동보다는 정치적인 개혁인 봉건주의 타파를 중요시했으며, 1894년 사발통문에 의한 고부 봉기를 주도했다. 그래서 온건파를 북접, 강경파를 남접이라고도 불렀다. 북접은 주로 부농층을 기반으로 했던 것과는 달리 남접은 몰락 농민과 빈농 등 반봉건을 주장한 세력들이 주도했다.

1864년 동학을 사교로 단정한 조선 정부에 의해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사형을 당한 이후, 조선 정부의 탄압을 피하면서 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가던 동학교도들은 1892년 10월 전라북도 삼례에 모여 최제우의 신원 회복과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중지를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의 동학교도들에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 앞에서 1대 교주 최제우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동학을 정당한 종교로 인정해달라는 복합상소를 올려보지만, 조선조정의 거부로 그 꿈은 무산되고 주동자에 대한 체포령과 동학에 대한 탄압은 강화된다.

이처럼 최제우의 신원 회복을 통해 동학이 종교로써 인정받기 위해 삼례 집회와 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했지만, 조선 정부의 동학에 탄압은 오히려 극심해졌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새로운 투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1893년 4월 충청북도 보은에서 일어난 보은집회이다. 보은집회는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인 민중운동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최시형이 주도한 보은집회에는 참여하지 않고,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강경노선을 지향한 김제 금구원평 집회에 참여한다. 이것은 조정과 타협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과 조정과 대립각을 세웠던 전봉준의 남접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동학 교도 중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존재했다. 2대 동학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고 동학(東學)이 조선 정부의 정당한 종교단체로 승인을 받아 민중들의 정신적인 편안한 종교로 남길 원했으나,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려온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 동학교도들은 단순한 교조신원운동을 넘어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 계급사회 철폐 등 반봉건·반외세를 요구하며 만민평등의 근대화를 목표로 정치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 강경파 남접의 리더는 전봉준으로 동학교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종교운동이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한 2대 교주 최시형과 손병희 등 온건파 북접의 교단 지도부는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동학교도들의 임의집단 행동을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경파 남접의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은 동학을 반봉건·반외세 투쟁 의지를 결집하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시켜 1894년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를 위한 최초·최대의 시민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사진=정성환 기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사진=정성환 기자]

고증을 통해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봉준 집안은 19세기 초 고창 당촌마을로 이주해 살았으며 전봉준의 생가터는 큰방, 작은방, 부엌으로 이루어진 세 칸짜리 흙담집이었다고 전한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이 동학 관련자들의 집을 불태우면서 터만 남았다.

전봉준 장군 생가터/고창읍 죽림리(당촌마을). 고증을 통해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 생가터/고창읍 죽림리(당촌마을)
고증을 통해 전봉준 장군의 생가터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봉준 집안은 19세기 초 고창 당촌마을로 이주해 살았으며 전봉준의 생가터는 큰방, 작은방, 부엌으로 이루어진 세 칸짜리 흙담집이었다고 전한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이 동학 관련자들의 집을 불태우면서 터만 남았다. [사진=정성환 기자]
정읍 전봉준 유적/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초가집(복원)/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조소 마을). 전봉준은 이곳으로 이주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정읍 전봉준 유적/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초가집(복원)/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조소 마을). 전봉준은 이곳으로 이주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의 고택 내부(정읍 전봉준 유적)/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조소 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의 고택 내부(정읍 전봉준 유적)/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조소 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 고택 우물(정읍 전봉준 유적)/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조소 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전봉준 장군 고택 우물(정읍 전봉준 유적)/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조소 마을) [사진=정성환 기자]

◆ 해몽 전봉준(海夢 全琫準)

전봉준(1855~1895)은 전라북도 당촌마을(고창읍 죽림리)에서 몰락 양반 출신의 성리학자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서당 훈장이었다고도 하며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 즉 지금의 이장이었다고도 전한다.

전봉준은 5세 때 한문을 수학하고 13세 때 한시를 지을 만큼 총명했으며 키가 5척(약 152cm)의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훗날 녹두장군으로 불리게 된다. 당촌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13세 이후 정읍 고부, 전주와 태인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활하다 30세 때 정읍 이평면 장내리 조소 마을로 이주해 정착하게 된다. 전봉준은 한학과 의학에 대한 어느정도의 학식이 있었기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한, 풍수지리를 보거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글을 써주는 일을 하면서 곤궁한 생계를 이어나갔다.

1888년 33세의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을 만나 동학에 입교하고, 35세 때인 1890년 조정의 정치와 외세의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 운현궁을 찾아가 약 2년간 흥선대원군의 식객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 밀통하려 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37세 때인 1892년 운현궁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고부로 내려온 전봉준은 동학 교주 최시형을 만나 고부 지방 접주로 임명되고, 동학 남접의 행동대장으로서 혁명적인 강경노선의 길을 걷게 된다.

만석보 유지비/배들 평야가 있는 동진강/1976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33호 지정 [사진=정성환 기자]
사발통문 작성의 집/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소재. 이 집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수세징수 등의 침탈로 고부 사람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던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여 명이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 감영을 함락시킨 후 서울로 올라가자는 거사계획을 세웠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사발통문 작성의 집/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소재. 이 집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수세징수 등의 침탈로 고부 사람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던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여 명이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 감영을 함락시킨 후 서울로 올라가자는 거사계획을 세웠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사진=정성환 기자]
사발통문/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서명한 문서. [사진=정선환 기자]
사발통문/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서명한 문서. [사진=정선환 기자]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한양)로 직행할 것 /사발통문 내용 中 [사진=정성환 기자]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한양)로 직행할 것 /사발통문 내용 中 [사진=정성환 기자]
말목 장터 감나무/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소재.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유서 깊은 말목 장터 감나무는 세월의 세파 속에서도 150여 년을 견디어 왔지만, 2003년 여름 태풍 때문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에 동학혁명 기념관에서는 이 감나무의 보존전시를 바라는 지역 여론을 모아 감나무 뿌리를 보존처리 해 정읍 동학혁명 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사진=정성환 기자]
말목 장터 감나무/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소재.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유서 깊은 말목 장터 감나무는 세월의 세파 속에서도 150여 년을 견디어 왔지만, 2003년 여름 태풍 때문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에 동학혁명 기념관에서는 이 감나무의 보존전시를 바라는 지역 여론을 모아 감나무 뿌리를 보존처리 해 정읍 동학혁명 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사진=정성환 기자]
고부 봉기 기록화/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 장터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고부 봉기 기록화/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말목 장터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고부 봉기의 시작, 사발통문(沙鉢通文)과 말목 장터

우리나라 역사 최대의 민중 혁명이었던 동학 농민 전쟁의 출발점은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봉기로부터 시작된다.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날 당시 민 씨 정권은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돈을 주고 관직을 산 군수나 현감 등 지방관리들은 관직을 산 대금을 충당하기 위해 온갖 수탈을 자행했다. 이 무렵 전라도는 자원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 재정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농민들은 탐관오리들이 수탈의 대상이었다.

이 격변의 시기인 1893년 벼슬과 재물을 탐하는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이 신임 고부 군수로 부임하면서 고부 농민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조병갑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음서로 등용돼 뇌물을 주고 고부 군수 자리를 얻은 만큼 그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그 몇 배 이상의 세금을 힘없는 농민들에게 수탈해야 했다. 그 당시 지방관리의 부정부패와 수탈은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나 조병갑의 탐욕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했다. 그는 태인 현감을 지낸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냥을 착취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다는 불효 죄, 형제간에 화목하지 않았다는 불목 죄 등으로 사람들을 옥에 가둔 후 대가를 받고 풀어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2만여 냥을 수탈했다고 한다.

조병갑의 탐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멀쩡한 만석보(萬石洑)를 만들면서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강제로 거둬들였다.

이처럼 조병갑의 도를 넘는 횡포에 지친 농민들은 합법적으로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시정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조병갑은 탄원서에 서명한 농민들을 처벌하는 등 학정은 그치지 않았다. 1893년 6월경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침탈에 항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잔반(殘班) 출신이었다.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해 서당 운영과 한약방을 운영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지만, 매우 의식이 높은 향촌의 지식인으로 훗날 전봉준의 의식과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농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엔 충분했고, 평범한 민중들이 다 같이 힘을 합친다면 세상을 뒤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고부 지방 동학 접주 전봉준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봉기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동학(東學)사상은 농민들이 착취당하고 고통이 깊어지는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농민들의 구심점이었으며,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후인 1893년 11월 전봉준은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힘을 모아 탐관오리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만약 이 계획이 발각된다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전봉준은 상자에서 사발을 꺼내어 통문 위에 원을 그린 후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이름을 적게 했다. 이것이 거사가 발각될 경우 주동자가 누군지 모르게 하기 위한 사발통문으로 그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것이었다.

※사발통문 내용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갈취한 탐관오리를 쳐 징계할 것 ▲전주영을 함락하고 수도(한양)로 직행할 것

말목 장터(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장소)/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소재. 전봉준은 1894년 음력 1월 10일 말목 장터 감나무 밑에서 농민군 수천 명을 모아놓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비행을 일일이 열거하며 봉기의 정당성과 목적 등을 역설하고 고부 관아를 습격해 점령했다. [사진=정성환 기자]
말목 장터(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장소)/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소재. 전봉준은 1894년 음력 1월 10일 말목 장터 감나무 밑에서 농민군 수천 명을 모아놓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비행을 일일이 열거하며 봉기의 정당성과 목적 등을 역설하고 고부 관아를 습격해 점령했다. [사진=정성환 기자]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 농민 1천여 명이 죽창과 횃불을 들고 집결지인 ‘말목 장터’에 모여 고부 관아를 기습 공격하자 고부 군수 조병갑과 관군은 도망갔다. 고부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창고와 감옥을 부수고 불법으로 거둬들인 세곡을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했으며 무기고에서 조총과 탄약을 탈취해 만석보를 파괴했다. 이처럼 고부 관아를 완전히 장악한 전봉준은 일부 농민군을 고부 관아에 잔류시키고 주력부대를 백산으로 옮긴다.

이 엄청난 사건을 보고 받은 조선 정부는 조병갑을 붙잡아 파직시켜 완도로 유배 보내고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한다.

신임군수 박명원은 부임하자마자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고 고부 군민을 안심시키며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자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다.

이렇게 고부 민란이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조선 조정은 고부 농민 봉기의 진상을 조사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8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안핵사 이용태를 고부로 파견한다. 당시 조선 시대에는 민란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핵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 역시 조병갑과 똑같은 탐관오리 중의 한 명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 군수 박원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부 농민 봉기를 동학교도들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무고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고, 농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능욕하고, 반항하면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를 지켜본 농민들의 분노는 또다시 불타오른다.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였기에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동학의 반란세력들을 매우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학교도들이 더 이상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그것은 조정의 오판에 의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용태는 안핵사로서 고부 농민을 보호하고 안심시키고 위로해 줘야 했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의 분노를 격화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고부 농민 봉기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잉태한 촉매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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