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릴 때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 창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19세기 후반 조선의 사회상은 난세,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농민들 삶 피폐, 민중들 가슴엔 동학사상 자리, 후에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9) =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반봉건·반외세를 주창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학(西學)과 반대되는 새로운 종교를 지향한 것이 동학(東學)이다. 이번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 '동학농민혁명' 중 '제1편 동학의 창시'이다. 2편 제1차 동학농민혁명과 3편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순차적으로 연재된다.
◆ 근대역사의 시작 동학농민혁명
우리나라 역사 발전과정을 보면,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으로 봉건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고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추구하는 대변혁을 꿈꾸면서 근대를 맞이하지만, 우리 민족은 미처 그 참뜻을 알지 못했다.
한국사에서 진정한 근대사의 출발이 동학이고, 동북아 근대사의 출발점 또한 동학이며 나아가 인류사 전체에 있어서 진정한 근대의 시작이 동학이라고 얘기한다. 19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릴 때 1860년 수운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했고,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다. 당시 동학혁명은 세계사적인 대사건의 시작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가져왔고, 이것은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으며 1919년 우리 민족 최대항일운동인 3·1 운동으로 계승된다. 이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민주 공화제 헌법이 채택되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이념이 나오는데 이 모든 것은 동학사상에서 비롯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 동학(東學)의 창시
동학은 1860년(철종 11) 수운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후천개벽(後天開闢)과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당시 조선은 정조대왕 사후 순조와 헌종, 철종 대를 이어오면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 기강은 문란해지고 지방관과 토호세력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져 농민들의 삶은 피폐하고 사회불안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유교와 불교가 종교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이 틈을 이용해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서학(천주교)이 정양용 등 일부 개화된 양반 지식층과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천주교는 종교가 아닌 유교 사상과 천주교를 조화시키려는 학문적 관점에서 관직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유생들 사이에서 탐구되고 있었으며, 천주교 신앙과 과학기술을 서학(西學) 또는 천주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천주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풍속을 해친다는 교리 때문에 서학(천주교)에 대한 반발도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경주의 몰락 양반 최제우가 반봉건·반외세를 주창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학(西學)과 반대되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東學)을 창시하게 된다.
◆ 수운 최제우의 생애
1824년 최제우(1824~1864)는 63세의 아버지와 어머니 한 씨 사이에서 경주의 몰락한 양반의 서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수운(水雲)이다.
부친 최옥(崔鋈)은 영남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으나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고, 최제우는 8세 때부터 공부에 전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의 경전을 독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서자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최제우는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3세에 울산 출신 박 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17세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3년 상을 마친 최제우는 20세 되던 해에 신분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고자 1844년부터 1854년까지 무려 11년간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많은 일을 해보았다. 무술을 익혀 서자도 응시할 수 있는 무과 시험을 보려고도 했었고 포목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는 낡은 유교 신분 체제의 억압과 차별을 넘어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꿈꾸며, 자신의 좌절을 넘어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대동 사회를 이루고 싶었다.
그러던 그가 도교와 점술, 불교와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어느 것 하나 성공한 것도 없이 실의에 빠지게 된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인이 있는 울산의 처가로 향한다.
그렇다고 그의 방랑 세월이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국을 유랑하며 조선이 처한 상황과 민중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자신만의 폭넓은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최제우는 이때부터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10여 년간 잠을 아끼고 기도하며 도를 닦던 그에게 하눌님의 소리가 들려온다. 1860년(철종 11년) 음력 4월 공중에서 천지가 진동할 때와 같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최제우는 한울님과의 직접 영감으로 ‘천사문답(天師問答)’이 이뤄지면서 마침내 득도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하느님이라 부르는데, 너를 택하여 하느님의 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라고 하면서 동학의 원리를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신용하, 『하느님 동학의 창도와 동학사상』)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난무하고, 열강의 침략이 이어지는 등 민족적 위기가 고조된 1860년(철종 11),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東學)을 창시하고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세우며 힘없는 민중들 사이에 깊게 파고든다.
당시 동학은 최제우가 30년에 걸쳐 공부한 유교·불교·도교 사상의 핵심을 흡수하고 여기에 음양오행설, 역학 사상, 풍수지리설 등 동양의 다양한 사상과 천주교 사상까지 흡수된 상당히 심도 있는 사상체계를 구축하며 “내 몸에 하눌님을 모셨다”라는 시천주(侍天主)를 제시한다.
시천주(侍天主)는 보편적 존재로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은 일체의 차별이 없는 평등을 강조한 고도의 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양반층으로부터 수탈과 차별을 당하던 당시 평민과 천민들에게는 자신도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켜주고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신분과 계급, 남녀 차별 없이 자신도 하느님이라는 동학의 메시지는 양반들로부터 억압받았던 힘없는 민중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동학사상은 피폐한 민중들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듯 자연스럽게 동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고, 농민과 몰락 양반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받으며 우리 민족 종교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당시 천주교를 서양의 종교라 하여 서학이라 했는데, 서학(천주교)의 내용과 교리는 민중들 사이에 환영도 받았지만, 우리의 전통사상인 유교와는 괴리감이 있고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함과 거부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최재우는 서학의 침투에 대항하는 한편,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해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할 목표로 동학(東學)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게 된 것이다.
최제우는 이러한 사상을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 가사로 된 『용담유사』 에 담아 민중들에게 보급하고, 1861년부터 접소(接所)를 설치해 책임자인 접주(接主)를 두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동학은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 글과 노래, 부적, 주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대부 지식층은 한문으로, 농민과 부녀자 등은 한글로 동학을 전파했으며, 특히 『용담유사』에는 용담가, 교훈가, 권학가, 도덕가 등 노래를 담아 민중들에게 교리를 전파해 나갔다.
이 무렵 조선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에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기에 서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동학사상은 조정 대신들과 기득권 양반 세력에게는 부정당했지만,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삼남 지방의 힘없는 농민들 사이에는 희망의 불씨가 되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한편 동학의 확산이 두려웠던 조선 조정은 동학 교도들을 유학에 반하는 사상적 집단이며 백성을 현혹하는 사교 단체라 규정하고, 1864년 3월 10일 최제우를 체포해 사도난정(邪道亂政)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을 씌워 대구 남문 밖 아미산 아래 관덕정 앞뜰에서 참형에 처했다.
당시 관덕정 앞뜰은 중죄인과 천주교인이 처형하는 형장이기도 했다. 서학 교도들이 순교한 이곳에서 최제우 역시 처형된 것이다. 훗날 대구 관덕정이 천주교와 동학(천도교)의 성지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최제우의 참형과 조선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포교는 계속되었고 교세는 더욱더 확장되어갔다.
그리고 최제우 사후 30년이 지난 1894년 모두가 평등한 삶을 누리는 대동 세상을 꿈꾸던 힘없는 농민들에 의해 동학 농민 전쟁은 불타오른다.
◆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배경
1857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난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조선은 서양 침략에 대한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다.
19C 후반 조선은 안동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로 인한 부정부패와 삼정의 문란으로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농민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지자 1862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 지방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 가운데 1863년 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간다.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타파와 서원 철폐, 양반에게 호포세 징수 등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해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원납전과 당백전을 발행해 경제 질서가 무너지고, 반강제로 노역에 동원되어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또한, 서양 열강의 통상요구에 반발한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더욱 굳건해졌지만,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기류에 합류하지 못한 조선 정부는 스스로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잃고 흥선대원군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고 민씨 일족은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을 계책을 세운다. 1873년 대원군의 숙적인 민비’는 유림을 대표하는 최익현을 사주해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한다. 결국, “국왕의 나이 21세로 성년이 되었으니 국왕이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라는 최익현의 지부상소(持斧上疏)는 권력의 상징인 흥선대원군의 명분을 빼앗아 갔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10년 권세는 몰락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지만.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매관매직과 백성에 대한 수탈은 극에 달하면서 또 다른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국가 재정은 파탄 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운요호 사건이 발생한다.
1875년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해안탐사를 빙자해 강화도 근처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접근했다. 이에 조선군은 포격을 가했고 양측간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조선 측이 갑자기 공격해와 싸움이 벌어졌다”라는 억지를 부리며 조선을 압박했다. 그리고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산에 군함 3척을 파견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를 자행했으며 군함 6척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와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 개항할 것을 강요했다. 1876년 당시 조선은 조약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상태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제공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후 조선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도 못한 채 단 한 명의 통역관이나 외교관도 없이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영국 등 열강들과 연이어 통상조약을 맺게 되고, 이로써 서구 열강에 모든 경제적 이권을 빼앗기면서 조선왕조의 국운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사회상은 난세였다.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신분 질서가 무너진 격변의 시기에 무능한 왕과 민 씨 정권의 매관매직,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피폐했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침탈로 인해 국내에서 생산된 많은 쌀이 일본으로 유출이 돼 쌀값과 물가가 폭등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방곡령 사건 등 격변의 시기를 겪으면서 엄청난 배상금을 일본에 갚아야만 했기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고 배고픔에 시달렸다.
결국, 무능한 조선 정부의 국고는 바닥나고, 민씨 일족의 폐단 때문에 그 폐해는 모두 농민들에게 떠넘겨져 농민들의 삶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핍박받고 고통받던 민중들의 가슴에 동학사상은 깊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긴 농민들의 감정은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하게 된다.
◆ 동학(東學)의 확산과 교조신원운동
비록 철종 대에 동학을 창시한 1대 교주 최제우는 1864년 비록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모두가 평등함을 추구했던 동학사상은 조선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활동으로 농민과 몰락 양반은 물론 양반들 상당수가 동학에 심취하면서 동학은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1871년 최시형과 진주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1824~1871)가 최제우의 기일에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또다시 동학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당시 이필제는 문경 세제에서 체포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형 되고,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은 관헌들의 추격을 피해 소백산 등 산속을 숨어다니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1대 교주 최제우가 지은 동학 경전 『동경대전』과 『유담유사』를 목판으로 간행하고, 포주·접주 제도(포접제)를 도입해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하면서 중부 전역과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890년대 초에 이르러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들은 조선 정부로부터 동학을 합법적인 종교단체로 승인받고자 했다. 그들은 1864년 참형 된 동학의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1892년 전라도 삼례역 집회에서부터 시작된 ‘교조신원운동’이다.
그러나 삼례 집회는 지방 관아였기에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1893년 1월 동학교도들은 중앙정부에 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다. 참여자들은 복합상소문을 받들고 3일 동안 광화문 앞에서 엎드려 호소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교조신원운동 주동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려 동학교도들을 탄압했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기득권층에 하소연하는 방법으로는 목표를 당상 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근본적인 사태 해결은 전국적인 봉기를 통해 민씨 정권의 타도와 외국세력의 축출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1893년 동학교도들은 4~5만 명이 모인 보은집회를 통해 ‘교조신원운동’과 더불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정치적 기치를 내걸고 조선조정과 맞섰다. 한편 전라북도 금구(현, 김제시)에서는 남접의 대 접주 전봉준, 김개남, 김화중 등 강경파 교도들이 모여 척양척왜(斥洋斥倭) 기치를 내걸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새로운 항쟁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 새로운 항쟁이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꿔놓았던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 즉, 전봉준의 고부 농민 봉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