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 한석봉 '풍영정은 제일호산(第一湖山)’...옛날 풍영정(風詠亭) 주변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칠계 김언거, 지지당 송흠,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이름난 문인들의 문화유산 보존..."정자문화의 중심지는 광주 풍영정(風詠亭)"
"극락강 풍경, 최고의 시인과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풍요로운 휴식과 사색의 공간' 발길 이어져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88) = 광주광역시 광산구에는 풍광 좋고 정자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풍영정(風詠亭)이 있다. 이번 이야기는 극락강이 굽이쳐 흐르는 풍경을 배경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과 문인들이 풍류를 즐겼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휴식과 사색의 공간을 부여하는 '광주 정자문화의 중심...풍영정(風詠亭)을 찾아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재 풍영정(風詠亭)은 광주 출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칠계(漆溪)인 칠계 김언거(金彦琚,1503~1584)가 축조했다. 칠계(漆溪)는 극락강의 옛 이름이다.
김언거(金彦琚)는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시 병과 12위로 급제해 중앙 조성에 출사했다.
1545년 예조 좌랑, 사헌부 장령, 1546년(명종 1) 상주 목사, 1553년 연안부사, 1555년 홍문관 교리, 1560년(명종 15년) 승문원 판교(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정3품 관직)를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로 내려와 풍영정에서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했다.
풍영정(風詠亭)은 화강암 기단 위 덤벙 주초에 배흘림 원주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칠계 김언거가 지었는데 1543년 관직 재임 시 축조했다는 설과 1560년 벼슬에 물러나 낙향 후 축조했다는 설이 있다.
풍영(風詠)이라는 정자 이름 뜻은 논어의 ‘선진(先進)’ 편에 나오는 풍우영귀(風雩泳歸)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을 묻자 제자 증점(曾點)은 “맑게 흐르는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 부르며 돌아오는 것이 소원입니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한다. 이 답변 속에는 세상의 온갖 복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듯이 ‘바람을 쐬다’의 풍(風)과 ‘노래를 부르다’의 영(詠)에서 풍영(風詠)이란 글자를 따와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은 칠계의 속마음이 풍영정(風詠亭)에 담겨있다는 뜻이다.
풍영(風詠)은 ‘시가를 읊조린다’라는 의미로 시와 노래를 즐기는 공간이다.
풍영정 앞을 흐르는 물줄기를 영산강이라 부르는데 더러는 영산강의 한 구간인 극락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풍광이 뛰어난 극락강을 배경으로 세워진 정자 풍영정은 당시 많은 선비가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벗들과 교유한 장소로 애용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언거를 아끼던 사람들이 지어준 12채나 되는 정각은 왜군에 의해 불에 타 거의 소실되었고, 풍영정(風詠亭)만 화마를 피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풍영정에는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등 유명 문인들의 시가(詩歌)가 새겨진 편액 70여 점 걸려 있고 풍영정(風詠亭)의 현판은 풍(風)자와 영정(詠亭) 자의 글씨 모양이 약간 다르게 보이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전설이 내려온다.
첫 번째 전설은 풍영정(風詠亭)이란 정자 이름이 처음 지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명종 임금은 ‘김언거’에게 정자(亭子)에 걸 현판의 글씨를 당시 기인이었던 ‘갈 처사’에게 받아 정자에 걸라고 했다고 한다.
‘김언거’는 기쁜 마음으로 ‘갈 처사’를 찾아갔으나 여러 번 헛걸음 하며 만나지 못했으나 14번이나 찾아간 끝에 겨우 갈 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갈 처사’는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글을 써주며 돌아가는 도중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궁금함을 참지 못했던 ‘김언거’는 ‘갈 처사’의 당부를 져버리고 첫 장을 펼쳐 보았는데 첫 장을 펼치자마자 ‘풍(風)’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에 놀란 ‘김언거’는 ‘갈 처사’에게 급히 돌아와 다시 써 줄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한다. 김언거는 할 수 없이 ‘갈 처사’의 제자인 ‘황 처사’에게 부탁해 ‘풍(風)’ 자를 받아 정자 현판에 붙여 걸었다. 그래서 지금도 풍영정(風詠亭) 현판의 글씨를 자세히 보면 ‘풍(風)’ 자가 ‘영정(詠亭)’자 보다 조금 비뚤어진 모습으로 새겨져 있어 글자 모양이 다르게 보인다.
또 하나의 전설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덕망이 높았던 ‘김언거’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각(亭閣)을 지어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풍영정을 제외한 11체의 정각(亭閣)이 왜군에 의해 다 불타버리고 마지막 불길이 풍영정(風詠亭)으로 몰아쳤는데, 그때 현판에 쓰인 풍영정(風詠亭) 글자 중 풍(風)자가 오리로 변해 극락강을 향해 날아 가버렸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이때 극락강으로 날아갔던 오리가 다시 현판으로 날아와 글씨가 또렷하게 되살아나면서 풍영정(風詠亭)의 풍(風)이란 글자 모양이 영정(詠亭)이란 글자 모양과 다르게 약간 비뚤어지게 쓰인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판 글자체가 서로 달라서 생긴 전설로 추정한다.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는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을 풍영정(風詠亭)에서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등 유명 문인들과 교우하고 시문을 주고받으며 지냈으며, 풍영정(風詠亭) 내벽에 걸려 있는 제영현판(題詠懸板)은 이때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풍영정(風詠亭) 내부에는 명필 한석봉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扁額)이 보존돼 있어 옛날 풍영정(風詠亭) 주변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풍영정(風詠亭)에는 칠계(漆溪) 김언거 (金彦琚)의 편액 이외에도 지지당 송흠,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이름난 문인들의 시문이 새겨진 문화유산 사료들이 보존돼 있어 호남 지방 정자문화의 중심지가 풍광이 좋은 풍영정(風詠亭)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처럼 극락강이 굽이쳐 흐르는 풍경을 배경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과 문인들이 드나들며 풍류를 즐기던 풍영정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휴식과 사색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