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을 기리며'⑦]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최후
상태바
[비운의 독립투사 '김원봉을 기리며'⑦]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최후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의 우익 편향 정책 반발, 임시정부 '탈퇴...공산당의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도 부정 '독자적 정치생존 모색'

1948년 4월 평양서 김일성과 단독정부 수립반대 등 협상 진행, 협상 실패했으나 신변 위협 등으로 북한에 머물러

북한서도 김일성과 대립각, 1958년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정치범 수용소 생 마감 설과 옥중에 음독 자결했다는 설

일제강점기 의열단 결성, 조선의용대 조직, 한중 연합작전을 이끌며 민족 통일 전선의 선봉장 지낸 약산 김원봉...비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70) =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도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 마지막 편으로 제 7편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최후'이다. 

인민공화당 대표 김원봉/의열 기념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단독 정부수립 반대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김원봉 [사진=정성환 기자]
인민공화당 대표 김원봉/의열 기념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단독 정부수립 반대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김원봉 [사진=정성환 기자]

◆ 김원봉의 시련

1945년 12월 2일 제2진으로 환국한 김원봉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도 좌·우 합작을 향한 정치세력들과의 연대를 추진하는 가운데 1946년 1월 열린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가 우익 편향으로 기울자 우익과 좌익의 화해와 단합을 추진했던 좌파 민족주의자 김원봉은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1940년대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다양한 단체의 연합전선은 와해 되었고, 김구와 김원봉 간의 애증 섞인 연대도 끝이 난다.

임시정부를 탈퇴한 김원봉은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결성에 합류하지만,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김원봉은 공산당의 전체주의와 소련의 권위를 부정하고 공산당 가입을 단호히 거부하며 독자적인 정치생존의 길을 모색해나간다.

미 군정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우파가 첨예하게 대립 된 가운데 일제가 패망할 당시 조선총독부가 불법으로 찍어낸 화폐의 효력을 미 군정이 인정함으로써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이에 대중들의 불만이 미 군정을 향했고, 미 군정은 이를 면하기 위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해 조선 공산당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미 군정은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조선 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누명(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씌워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하고 탄압하자, 조선공산당은 강경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6년 대구 10·1 사건이 발발하자 미 군정은 이를 공산당이 사주한 폭동으로 판단하고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린다. 이에 비합법단체로 낙인찍힌 공산당원들은 월북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리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의 모습 (사진 출처=KBS 역사저널 그날)
1946년 대구 10·1 사건의 모습 (사진 출처=KBS 역사저널 그날)
북한의 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한 김구의 서신(1948.2)/백범김구 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북한의 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한 김구의 서신(1948.2)/백범김구 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이런 와중에도 민족주의 민족전선(약칭:민전)은 좌익세력의 합법 단체로 미 군정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으며, 당시 민전 의장 김원봉은 미 군정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대구 10·1 사건은 미 군정의 쌀 배급 정책의 실패로 “배고파 죽겠습니다, 쌀 좀 주소”라며 시위하는 굶주린 일반 시민들(여성, 어린이, 노인)을 향해 친일 경찰이 총격을 가해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으로 해방 후 미 군정을 뒤흔든 최초의 민중봉기였다.

당시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김원봉은 대구 10·1 사건 발생의 주요 원인은 미 군정의 실정과 친일 경찰의 시위대 학살에 있다고 판단하고, “미 군정은 실정을 인정하고 시정 해야 한다”라는 여론을 조성해나간다.

김원봉의 태도에 위기를 느낀 미 군정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1947년 3월 김원봉을 체포하게 된다.

김원봉을 체포한 사람은 악명높은 친일 경찰 노덕술이었다.

당시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악질 친일 경찰에서 해방 후에는 좌익분자를 때려잡는 애국 경찰로 둔갑한 수도 경찰청 수사과장이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치며 의열단장,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체포돼 ‘빨갱이 두목’이라는 누명을 쓰고 10여 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으며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된다.

김원봉에 대한 모욕적인 사건에 대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비분강개하여 민족 해방 운동의 영웅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을 이끌어 나갔다.

이에 미 군정은 어쩔 수 없이 김원봉을 무혐의로 풀어주게 된다.

일제 군·경의 끈질긴 추적과 엄청난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지 않았던 김원봉으로서는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에 의해 수모를 당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김원봉은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땅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는 당한 일이 없었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라며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1900~1987) 앞에서 호랑이 울음을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전한다.

1947년 6월 인민공화당 회의에서 김원봉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자, 미 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1893~1969)은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남로당과 ‘민전’ 산하단체에 대한 폐쇄조치를 단행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다.

당시 미 군정은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적을 마구잡이로 암살하고 납치·구금 하는 무질서 그 자체였다.

좌익도 우익도 어느 한 편이 아닌 민족의 통일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끈질기게 폈던 김원봉의 목숨 또한 풍전등화였다

이러한 미 군정의 탄압 속에 김원봉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와중에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하며 통일 정부수립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정치적 동지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극우파 한지근에게 암살당하자, 평소 여운형을 존경했던 김원봉은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1947년 3월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미·소 냉전체제가 가속화되면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좌파와 우파 참여 비율 문제로 결렬되자 1947년 9월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남북한 총선거를 하고, 이를 감시 협의하기 위한 한국 임시위원단 설치를 결의한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이 한국 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면서 남북한 총선거는 좌절되고, 선거 가능 지역(남한)에서의 총선거가 결정된다. 이에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등 극우세력이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찬성한 가운데 1948년 4월 김원봉은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한 통일된 정부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김일성을 만나러 북으로 향한다.

박차정 의사 관련 사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박차정 의사 관련 사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김원봉·박차정 부부 인물화/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김원봉·박차정 부부 인물화/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김원봉·박차정 부부/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김원봉·박차정 부부/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박차정 선생 일대기 표지판/박차정 선생 묘소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박차정 선생 일대기 표지판/박차정 선생 묘소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박차정의 묘/경남 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독립투사 박차정의 묘/경남 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최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던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20일 평양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납북협상을 진행하고 “단독정부 수립반대, 유엔이 주관하는 5·10선거 반대, 미국과 소련군의 동시 철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지만 이후 실현되지 못했다. 남북협상이 끝나고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으로 되돌아오지만, 친일파와 우익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리며 신변에 위협을 받았던 김원봉은 남한으로 되돌아가기를 포기하고 북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

북한에 정착한 김원봉은 북한 정권수립의 토대가 될 헌법 제정과정에 참여하고 초대 국가검열상이 된다. 한국전쟁 때는 박헌영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와 정치인·학자 등 저명인사들의 북한 정권참여를 권유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1952년부터 5년여 동안 노동상을 역임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을 역임하지만, 노동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의 직책은 권력의 핵심기관이 아니었고 특히 상임위 부위원장직은 상징적인 직책이었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김원봉은 1952년 김일성으로부터 훈장을 받게 되는 데 이것은 군사적인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라 봄 파종 사업지도 공로로 노력훈장을 받은 것이었지만, 6·25전쟁 당시 후방에서 북한 인민군을 지원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1957년 9월 노동상에서 해임된 김원봉은 1958년 9월 9일 조소앙의 장례식에 참여한 뒤 자취를 감춘 이후 김원봉의 최후를 두고 여러 설이 전해온다.

김원봉은 납북된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를 통해 통일을 이루자는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빨치산파 김일성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1958년 연안파가 제거될 때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어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설과 옥중에서 음독 자결했다는 설도 나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한중 연합작전을 이끌며 민족 통일 전선의 선봉장으로 일생을 보낸 약산 김원봉은 이처럼 비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가족사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약산 김원봉 선생의 가족사진/의열 기념관. 망건을 쓰고 있는 노인이 김원봉 선생의 부친 김주익이다. 약산 김원봉 선생의 가족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거의 모두 처형됐다. [사진=정성환 기자]
1946년 여름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서 큰아들 중근을 안고 있는 김원봉의 모습/의열기념관. 김원봉은 1947년 3월 부인이 만삭일 때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됐다. 수감 중에 둘째가 태어났는데,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난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철근’이라 지었다고 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1946년 여름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서 큰아들 중근을 안고 있는 김원봉의 모습/의열기념관. 김원봉은 1947년 3월 부인이 만삭일 때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됐다. 수감 중에 둘째가 태어났는데, 철창에 있을 때 태어난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철근’이라 지었다고 한다. [사진=정성환 기자]

남한에 남아있던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월북 빨갱이 김원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떼죽음을 당한다. 9남 2녀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4명이 ‘국민보도연맹사건’ 때 군·경에 의해 학살되고, 아버지 김주익은 홀로 유폐돼 생활하다 생을 마감했으며, 유일한 생존자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막막한 생계보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무섭고 처참한 생을 살아가야만 했다.

현상금 320억 원(김구 200억)이 내걸린 만큼 일본 제국주의가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장·조선의용대장·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약산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동조한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42년 중국 화북지대 타이항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김원봉의 고향 친구이자 의열단 동지였던 윤세주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피로 써 내려 간 항일독립운동사의 꽃 조선의용대 여성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도 1995년 뒤늦게나마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부터 항일투쟁의 공적이 있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도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북한 정권수립에 참여한 인물은 포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 할지라도 심사를 거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서훈 결정에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김원봉의 서훈 결정에도 상당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김원봉의 북한에서의 행적을 보면 북한 정권수립에 어느 정도 일조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친일 경찰과 우익 정치깡패들의 위협 때문에 북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약산 김원봉, 역사와 이념 사이에 자발적 월북자란 낙인이 찍혀 남쪽에서도 철저히 버림받고, 북쪽에서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버림받아야만 했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했다.

◆ 해방된 한반도의 부끄러운 역사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독립투사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비록 분열은 되었지만, 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적은 같았다.

그러나 해방된 이후 반공을 앞세운 미·군정과 극우파들에 의해 친일파는 애국자로 변신해 자손만대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빨갱이로 매도되어 처형당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그 누가 앞장서서 나라를 구하겠는가, 대한제국의 무능과 친일파들의 탐욕으로 치욕스럽게 나라를 빼앗겼지만, 이념을 초월해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 속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진정 나라를 위한 길인지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