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③]···조선혁명선언과 의열단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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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③]···조선혁명선언과 의열단 해산
  • 정성환 전문기자(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 승인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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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선언, 김원봉 부탁으로 단재 신채호가 6,400여 자로 만들어...의열단 무장투쟁론 이론화 선언

"민족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손 잡고, 폭력암살·파괴·폭동 등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끝장낼 것"

1926년부터 의열단의 무장투쟁을 둘러싼 내부 갈동과 임시정부,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대립...1929년 12월 해산의 길 걸어
약산 김원봉/ 경남 밀양시 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6) =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항일 의열 투쟁의 역사이다. 

그는 광복 후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의 행보에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독립운동의 큰 축을 담당했던 민족 지도자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이번 이야기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을 기리며'로 제3편 조선혁명선언과 의열단 해산이다. 제4편 조선의용대, 제5편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도 순차적으로 연재된다.

밀양 독립운동기념관/경남 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 기념관/경남 밀양시 소재 [사진=정성환 기자]

◆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흐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전 세계로 전파된 사회주의 사상은 한국의 청년학생과 독립운동가·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레닌은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이므로 어떠한 억압과 착취도 없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제국주의의 전쟁과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고 식민지 해방운동 지원을 선언했다.

1917년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는 당시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약소민족들에게는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가 되었으며 1919년 3·1운동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8년 1차 세계대전 후 독일, 터키 등 패전국의 세력을 악화시키기 위해 그 식민지를 해방하는 것이었으므로 전승국의 편에 섰던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나라와는 무관했으나 식민지 해방이라는 희망을 품기엔 충분했다.

그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모르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교와 처세의 상식으로 불릴 만큼 인기가 많았고, 특히 한국의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사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대전환점을 맞게 된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국내에서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절대군주제를 지양하고 민주 공화정을 지지하는 여론이 조성되면서 대중적 민주주의 출발점이 되었다.

의열단원이 사용한 권총, 의열단 격문(1924), 의열단 기밀부 신임장(1923년)/의열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단의 행동강령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 단재 신채호가 약산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이념을 체계화하고
항일투쟁의 노선을 이론화해 밝힌 선언서이다. /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 의열단의 행동강령 조선혁명선언

1920년대 초반 상해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으로 그 지위가 크게 약화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 회의가 열렸지만,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오히려 분열만 가져왔다.

김원봉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미국 워싱턴에서 군축회담(태평양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은 참석할 수도 없어서 우리나라의 독립문제를 논의하지도 못했다”라며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 노선을 비판하며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과 대다수 민중은 의열단원들이 일제관공서를 폭파하고 요인들을 암살하며 목숨을 건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열단의 행동에 나타난 무력투쟁만을 보고 폭력적 독립운동에 대해 비판만 할 뿐, 테러 속에 깃들어 있는 의열단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열단의 폭력적 독립운동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김원봉은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의열단 노선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 단재 신채호를 찾아가 의열단원들에게 힘이 되는 글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밝히는 역사학자요, 독립투사요, 언론인이며 명문장가였다.

당시 신채호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하였으나 1922년 국민대표회의 개최 이후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로 임시정부를 탈퇴한 상태였으나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신채호와 의열단의 독립투쟁 노선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년 1월 발표)/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김원봉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신채호는 1923년 1월 의열단을 위한 글을 써 내려 간다. 이글이 6,400여 자로 만들어진 「조선혁명선언」이다.

“민족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우리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손을 잡고 폭력암살·파괴·폭동 등을 통해 강도 일본의 통치를 끝장내자”라는 「조선혁명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 생존을 박탈해 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했다.

둘째, 3·1운동 이후 대두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및 문화운동을 일제와 타협하려는 적(敵)으로 규정했다.

셋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론, 독립전쟁 준비론 등의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했다.

넷째, 일제를 타도하려는 혁명은 민중의 직접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섯째, ‘조선혁명’과 관련 다섯 가지 파괴와 다섯 가지 건설 목표를 제시했다.

‘5 파괴’ 대상은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및 노예적 문화사상이며, ‘5 건설’ 목표는 고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 민중, 민중적 조선, 민중적 사회 및 민중적 문화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정당한 「조선혁명선언」은 한국의 모든 독립운동가와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제시한 귀중한 선언으로 의열단이 하고 싶었던 말을 남김없이 담아냈기에 의열단원들에겐 큰 용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또한, 국민대표 회의의 실패로 「조선혁명선언」에 의한 의열단의 투쟁 방향은 큰 호소력을 갖게 되어 의열단의 활동 폭은 더욱 넓어져 국내와 일본, 만주에 암살 임무의 6개 결사대를 파견할 것을 결의했으며, 의열단원 수가 3년 6개월 만에 10배 이상 늘어난 150여 명에 이르렀다.

의열단원이 국내에 반입해 사용했던 무기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단의 활약/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사상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사상과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지식인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정치 권력이나 정부의 지배를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한 정치사상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정부나 당 기구를 없애고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는 조직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김원봉 역시 그의 독립투쟁노선에는 독자적으로 암살, 파괴 활동을 하는 아나키즘 노선이 밑바탕에 깔려있었으나 민족주의자로서의 모습엔 변함이 없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나 국민대표회의 등은 자리다툼이나 하는 곳이지 독립운동에는 별로 이롭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또한, 김원봉은 자기가 만난 사람을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반드시 설득시켜 뜻을 이루었으며, 단원들이 돈이 없어 어려울 때는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 전당포에 잡혀 돈을 구해주었을 만큼 동지에 대한 사랑과 정열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의열단원들은 그를 어버이같이 따랐다고 한다.

김원봉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언제나 말이 없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현상금이 붙어 단원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기 때문에 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의열단원들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가명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사진도 남기지 않아 단원들 서로 간에도 어느 사람이 단원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의열단원을 체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이처럼 김원봉은 늘 변장을 하고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의열단 활동을 이끄는 데 온 정열을 바쳤다.

국내에서 의열단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1920년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은 상해임시정부였다. 3·1운동 직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온건 노선을 걷고 있었으며,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된 의열단의 암살·파괴 활동과 임시정부는 무관하다는 성명을 낼 정도로, 의열단과 임시정부의 독립투쟁노선은 큰 차이를 보였다.

김원봉은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의열단의 활약은 대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1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던 김익상은 1922년 3월 상하이의 황포탄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를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브라질 여성이 죽고, 미국인과 영국인, 중국인이 총상을 입는 등 의도치 않은 인물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의열단의 활약과 식민지 한국의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상해 조계지 내 여론이 크게 약화 되고 상해임시정부도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또한, 의열단의 개별적 투쟁방식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고, 의열단원들의 희생 또한 너무나 컸다. 1924년까지 300여 명에 달하는 의열단원이 희생되었고, 거사에 참여해 체포된 의열단원 중 상당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투쟁의 효과는 생각만큼 크지 않아 의열단의 투쟁노선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무렵 세계는 사회주의 운동이 확장되고 있었으며, 의열단 내부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에 매몰된 단원들이 속출해 의열단을 이탈하고 독자적으로 세를 확보하고 나섰다.

특히 김원봉에게 불만이 많았던 의열단 고위 간부 윤자영의 청년동맹 세력은 의열단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청년동맹은 사회주의 세력 확산에 몰두하며 의열단의 파괴, 암살을 비난했고, 임시정부 또한 의열단의 활동에 제동을 걸며 비판했다.

결국, 의열단은 서서히 분열되어 하루아침에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김원봉은 충격에 휩싸였다. 의열단의 활동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봤고, 의열단의 실패에 대해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활동이 “세계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과 국내적으로 대중·사상운동의 발전에 뒤따르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암살·파괴 노선을 지양하고,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다. 민족을 중시하되 그 과정에서 민중의 복리를 위해 소수 계급은 희생시킬 수 있다”라는 생각에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것은 사회주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그것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원봉의 의열단 단원이 입학했던 황포군관학교/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 황포군관학교 입교

의열단에서 이탈한 사회주의의 청년동맹회가 상하이에서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김원봉은 상하이를 떠나 광저우로 향했다.

김원봉은 의열단의 암살과 파괴 활동에 대한 한계를 인식했고, 일제에 근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일제에 무력으로 맞설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해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해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1926년 김원봉은 광저우에서 의열단 총회를 열어 “의열단이 과거 암살과 파괴 활동에만 치우쳐서는 안 되고, 정치 단체로 탈바꿈해서 독립투쟁을 이끌어갈 유능한 간부들을 양성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중국 국민당 장제스와 협력할 것을 결심한다. 김원봉은 민중을 무장시키기 전에 우선 나 자신부터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전투기술과 군사교육을 몸소 체험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이다.

당시 김원봉은 중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조선인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의열단 단장이라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를 찾아가 의열단원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와 학비 면제 등을 요청했고, 장제스는 흔쾌히 승낙했다.

1926년 1월 김원봉은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의열단원 24명과 함께 중국의 국부 쑨원이 설립하고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는 황푸군관학교에 제4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황푸군관학교는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과 합작해 소련처럼 강력한 중국의 국민 혁명과 공산 혁명의 용사를 육성하기 위해 1924년 6월 황푸군관학교를 세운 것인데 생도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에서 추천한 학생들이었다.

생도들은 모두 국민당 당원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생도들도 있었다. 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주은래)의 영향 때문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 지도자로서 훗날 중국 수상을 지낸 인물이다.

장제스의 신뢰를 받은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그때 장제스와 맺은 인연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해 1938년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국민당 정부와 협력해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다.

밀양 독립만세운동 기념비/의열 기념관 [사진=정성환 기자]
의열 기념관 전시실 [사진=정성환 기자]

◆ 장제스와 함께한 북벌 전쟁의 희망과 좌절

1926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단하고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도와 북방 군벌을 타도하는 북벌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김원봉은 북벌 전쟁이 조선의 독립과 곧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국민 혁명군에 소속되어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을 도왔지만, 장제스는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1927년 북벌을 중지하고 당과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에 포섭된 의열단원들이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중국 공산당원들이 군중 앞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이처럼 장제스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은 의열단의 위기로 다가왔고, 장제스에 대한 김원봉의 조선독립에 대한 기대 역시 멀어져 갔다.

1927년 김원봉은 광저우를 탈출해 상하이로 향했다.

김원봉은 이때 삼민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국제주의의 온갖 사상의 시험장이었던 혁명 무대에서 민중의 힘에 의한 혁명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사상에 빠지게 된다. 훗날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레닌주의 정치학교 설립 등은 이러한 증거이기도 하다.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의열단은 1926년부터 마르크스주의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1928년 공산당을 창당하자는 의견이 대두되 와해 되기 시작한다. 결국, 의열단원 일부가 일본에 투항하고,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고 김원봉의 곁을 떠난다.

결국,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으로 분열되어 1929년 12월부터 해산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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